엊그제(1일)는 국경일이자 기자가 사는 군산시 나포면 '면민의 날'이었다. 올해는 100주년이 되는 해여서 의미가 깊게 다가온다. 대문 앞 전봇대에 매달린 마을방송 스피커에서는 전날부터 50~60년대 악극단을 떠오르게 하는 트로트 메들리로 흥을 돋우었다. 일찍 오셔서 맛있는 음식도 드시고, 즐거운 시간 보내시라는 안내 방송도 간간이 흘러나왔다.
나포면은 조선말까지 임피군 '하북면'에 속하는 작은 포구(나리포)였다. 그러다가 일제에 의해 지방 행정개편이 이루어진 1914년 3월 1일 상북면 일부를 합해 '나포면'이라 하였다. 해방 후에는 주민들이 8월 15일을 '면민의 날'로 정하고 행사를 치러오다 2010년 3월 1일 '면민의 날' 선포식을 가졌다. 이렇듯 통곡과 환희의 역사가 겹친 날이어서 많은 걸 생각하게 한다.
지금도 반딧불이가 발견되는 나포면은 '군산의 허파'로 불린다. 공기가 그만큼 맑고 청정지역이라는 얘기다. 유적도 많고, 역사도 유구하다. 고조선 마지막 임금 준왕이 다녀갔다는 설과 백제 도읍지 공주에서 떠내려 왔다는 설 등이 담긴 공주산(65m)과 백제 침류왕 원년(384) 인도 출신 고승 '마라난타'가 창건했다는 불주사(불지사)가 대표적이다.
군산의 식량 창고인 십자들녘을 산모가 아기 품듯 품고 있으며, 시내로 출퇴근하는 직장인이 상당수 거주하는 나포면은 도시형 농촌으로 각종 철새들이 4계절 내내 목격된다. 안타까운 것은 개체 수가 예년에 비해 줄었다는 것. 그럼에도 철새가 무리를 지어 논에서 먹이를 찾고, 공중을 비행하는 모습은 마음에 평화를 안겨준다.
갈비탕 500인분, 15분 만에 바닥나오전 10시가 넘어서야 대문을 나섰다. 잔뜩 찌푸린 하늘이 심술 고약한 놀부 얼굴을 연상시킨다. 그래도 논둑과 길가에 파릇파릇 돋아나 봄을 손짓하는 새싹들이 기분을 전환시켜준다. 점심을 맛있게 먹으려고 아침을 걸러서 그런지 허기가 느껴진다. 엊그제 시장에서 봤던 싱싱한 봄나물과 구수한 된장국 생각이 간절해지면서 입맛이 다셔진다.
행사장에 도착하니 잔칫집 앞마당이 따로 없다. 풍물패 한마당에 이어 화려한 한복 차림의 아마추어 명창들이 고수의 추임새와 호흡을 맞추며 태평가, 창부타령, 진도아리랑 등을 열창한다. 분위기가 달아오른 할아버지 할머니들은 어깨춤과 박수로 화답한다.
"얼씨구 좋다!" 소리도 들린다. 20~30대 주부도 눈에 띈다. 모두 웃음이 만면에 한가득이다.
오전에는 주민들로 구성된 나포면풍물패 공연과 판소리, 오카리나 연주, 요가 시범, 경품 추첨 등의 식전행사와 주현노 면장의 나포면 역사 소개, 내빈 축사, 기념식수 식재 등 '면민의 날' 100년을 기리는 기념식이 열렸다. 보기에도 푸짐한 김장김치와 수육, 갈비탕으로 점심을 맛있게 먹고 오후에는 경품추첨과 장기자랑, 초청가수 공연 등 주민 화합의 장이 펼쳐졌다.
판소리 공연이 끝나고 마을별로 경품 추첨이 시작됐다. 경품은 전기밥솥, 세탁기, 분무기, 예취기, 자전거, 삽, 화장지 등 다양하다. 점심 전에는 농가 필수품인 '삽'만 한다는 사회자 말에 약속이나 한 듯 모두 경품권을 꺼내 자신의 번호를 확인한다. 이장이 번호를 호명할 때마다 탄식과 탄성이 교차한다. 어떤 아저씨는 경품권을 빌렸다가 들키기도. 농촌 아니랄까봐 '삽' 인기가 대단하다.
점심은 갈비탕에 수육이다. 국물이 진하고 구수하다. 살코기도 연하다. 씹을수록 갈빗살 특유의 고소한 냄새가 입안에 감돈다. 수육과 김장김치 궁합이 환상적이다. 입과 코가 즐겁다고 한다. 갈비탕 500인분을 준비했다는데 15분 만에 바닥이 났다. 음식은 여럿이 야외에서 먹어야 더 맛있다는 말이 떠오른다. 반찬은 김치, 깍두기, 시금치나물, 조개젓 등 4~5가지. 알차게 준비한 것 같다.
주민들이 전하는 나포면 이야기
점심을 먹고 강세성(51) 주민자치위원장을 만났다. 그는 "나포면 나이 100년의 세월 속에는 선조들이 흘린 땀과 피, 눈물과 환희, 기쁨과 슬픔, 따뜻한 정까지 모든 역사가 담겨 있다"며 "우리에게는 나포의 역사와 정신을 되새기고 후손들에게 전해줘야 할 의무가 있다"고 힘주어 말했다. 이어 "모든 가치를 돈으로만 따지는 물질만능주의 사회에서 만남과 소통으로 끈끈하고 애틋한 정이 넘치는 고장으로 거듭나기 위해 자리를 마련했다"고 덧붙였다.
장상리 군둔마을 김종풍(74) 이장은 나포가 '쌈터'라고 했다. 쌈터는 '싸우는 터'가 아니라 '태를 가른 곳'으로 토박이를 말한다는 것. 군둔마을은 지대가 높아 옛날에 군인이 주둔했던 요새(要塞)여서 붙여진 지명이란다. 그래도 산세가 '무주구천동'처럼 깊어 가뭄이 들어도 굶는 일은 없었단다. 어렸을 때 서당교육을 받았다는 그는 군둔마을 소개를 이어갔다.
"도시가 발전하면서 모두 떠나버려 낙후된 마을이 됐지만, 옛날에는 50가구 가까이 살면서 인삼도 재배하고 살만했어요. 마을에 양조장, 이발소, 담배 가게, 고약 만드는 공장도 있었으니까. 그때는 '면민의 날'에 축구시합, 달리기, 발목 묶고 달리기, 줄넘기, 노래자랑, 윷놀이 등을 했는데, 마을별로 돼지도 잡고 거창했습니다. 기(旗) 싸움도 했죠. 이기면 형님마을 지면 동생마을로 불렀어요. (웃음)"
부모와 함께 왔다는 나포초등학교 3학년 채 정(10살) 학생은 "오늘이 삼일절인 것만 알고 왔는데, 어른들이 노래도 하고 맛있는 음식도 먹으면서 재미있게 노니까 좋다"며 활짝 웃었다. 3년 전 군산 시내에서 이사왔다는 '정이'는 "처음에는 산과 구름만 보여서 심심했는데, 금방 익숙해졌고, 농부 아저씨들이 일하는 모습을 보면서 본받아야겠다"는 마음이 들었다고 말했다.
지난 연말 제1회 나포사랑 글짓기 대회에서 <10년 후 나포의 모습>이란 제목으로 대상을 받은 채 정 학생은 "친구들이 축하도 해주고, 선생님이 칭찬을 해줘 기뻤다"고 했다. "3학년은 1학급에 모두 8명뿐으로 학생이 많아졌으면 좋겠다"며 자신의 희망을 밝히기도. "학생이 많아지면 (면민의 날) 행사도 더 재미있을 것 같다"는 말도 빼놓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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