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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수영구 수영동 민족과 여성 역사관에 내걸린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의 사진. 사진 속 위안부 피해자들은 모두 세상을 떠났다.
 부산 수영구 수영동 민족과 여성 역사관에 내걸린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의 사진. 사진 속 위안부 피해자들은 모두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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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의 유일한 일제 위안부 역사관인 '민족과 여성 역사관'이 겨우 폐관 위기를 넘긴 건 2012년이었다. 지역 유일의 위안부 역사관이 문을 닫게 될지도 모른다는 소식에 전국에서 자발적인 모금운동이 일었다. 500만원이 모였고, 밀린 월세를 낼 수 있었다. 요즘에는 어떤지가 궁금했다. 불쑥 전화를 했고, "여전히 그렇죠"라는 말 뒤에 한숨을 들었다.

7일 오후 수영구 수영동에 있는 역사관을 찾았다. 3층 상가 건물의 2층에 자리잡은 역사관으로 올라가는 계단에는 위안부 피해자들의 사진과 그들이 직접 그린 그림이 다닥다닥 붙어있었다. 역사관은 불이 꺼져있었다. 대신 복도 맞은편 부산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아래 부산정대협) 사무실로 들어서자 역사관을 그동안 운영해온 김문숙(86) 부산정대협 회장이 기자를 반갑게 맞았다.

김 회장의 책상은 바닥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여러 신문기사와 책자들이 수북하게 쌓여있었다. 김 회장은 기자를 불 꺼진 역사관으로 이끌었다. "사람이 안 올 때는 불을 꺼놓는다"며 열쇠 뭉치를 가져와 자물쇠를 열었다. 겉으로 보기에 좁아보였던 역사관은 내실과 외실이 구별되어 있는 제법 큰 규모였다. 자료는 한눈에 보기에도 상당해보였다. 

1990년 5월부터 스크랩해온 위안부 관련 신문기사들부터 시작해서 재판 기록, 사진 등이 켜켜이 쌓여 있었다. 모두 김 회장이 한국과 일본, 중국, 필리핀 등지를 누비며 모아온 것들이라고 했다. 한쪽 벽면에 붙은 위안부들의 사진이 눈에 들어왔다. 이귀분, 하순년, 박두리 할머니는 부산에 살던 위안부 피해자들이었다. 그들의 생사를 물었고 "한 해 터울로 몇 해 전에다 돌아가셨지"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그가 주머니 돈 털어 일본과 위안부 소송한 이유

부산 유일의 위안부 역사관인 민족과 여성 역사관을 운영해오고 있는 김문숙(86) 부산 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회장.
 부산 유일의 위안부 역사관인 민족과 여성 역사관을 운영해오고 있는 김문숙(86) 부산 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회장.
ⓒ 정민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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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하나둘씩 떠나는 위안부 피해자들처럼 김 회장은 이 모든 게 세상에서 사라질까 봐 걱정했다. 하지만 그는 "더 이상 버티기가 힘들 것 같다"고 말했다. 2012년 운영난 소식이 알려지고 대책 마련에 나선 부산시가 역사관 월세와 취업준비생 인턴 1명을 지원하고 있지만 나머지 운영비는 고스란히 김 회장의 주머니에서 나가고 있기 때문이다.

"젊을 때는 돈을 많이 벌어서 중앙동에 건물도 있었거든, 그걸 팔아서 통장에 넣어놓고 썼지. 그런데 이걸 운영하면서 1천만원씩 적금을 깨다보니깐 이제 남은 돈도 없어. 일하는 사람을 데리고 있고 싶어도 월급을 줄 돈도 없으니 사람을 제대로 데리고 있지도 못하고 이젠 스크랩을 하려해도 신문 글자가 잘 안보여. 강제동원역사관이 생기면 모아놓은 자료를 넘겨주고 싶은데 그때까지 버틸지 모르겠어."

김 회장은 부산에 짓고 있는 일제 강제동원역사관의 완공을 바라보고 있었다. 정부가 일제 강제동원 피해자들을 위해 짓겠다며 2008년 입지가 정해진 일제강제동원역사관은 2011년 여름 공사를 시작해 당초 2012년 완공 예정이었지만 여전히 공사중이다. 그 사이 몇 명의 위안부 피해자들이 더 세상을 떠났다.

김 회장이 위안부 피해자들과 인연이 닿은 건 1990년대 초반이었다. 우연히 위안부 피해자가 부산에도 생존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냈고, 힘들게 살아가던 그들을 찾아내기 시작했다. 1992년부터는 근로정신대와 군 위안부 피해자들을 모아 일본정부를 상대로 소송도 진행했다. 6년간의 법정 싸움 끝에 피해자들은 일부 승소 판결을 받았다. 6년의 기간 동안 재판을 하기 위해 일본을 오가며 들어간 1천만원 가량의 비행기 값도 김 회장이 마련했다. 김 회장이 왜 그렇게 했냐는 기자의 질문에 "보람 있잖아"라고 당연한 듯 대답했다.

"찾아오는 학생들 응원, 큰 힘 된다"

부산 수영구 수영동 민족과 여성 역사관 전시실. 군 위안부 피해자 관련 신문 스크랩 자료와 사진, 피해 청구 소송 당시 모습 등을 전시하고 있다.
 부산 수영구 수영동 민족과 여성 역사관 전시실. 군 위안부 피해자 관련 신문 스크랩 자료와 사진, 피해 청구 소송 당시 모습 등을 전시하고 있다.
ⓒ 정민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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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는 섭섭한 게 많았다. 우선은 사람들에게 섭섭하다고 했다. 김 회장은 "일본에서 위안부 강제성이 없다고 하고 독도가 일본땅이라고 하는 걸 하도 많이 하니까 요즘은 그냥 그런가 보다라고 생각하나봐"라며 "요즘 학교에서는 역사를 안 가르치나"라고 기자에게 물어보기도 했다. 정부에도 불만을 토로했다.

"공무원들 자기네는 퇴직하고 기업에 취직하던데 그 사람들 한 사람 월급이면 우리는 충분히 운영해. 그런데 우리한테 지원해달라고 하면 온갖 소리랑 싫은 소리해. 그래서 지지난해에 못하겠다고 했더니 그제야 월세를 대신 내주겠다고 하더라고, 부산에 한 곳 있는 게 문 닫으면 체면이 안 선다고 생각했나봐."

이렇게 푸념을 하다가도 김 회장은 꾸준하게 제 발로 찾아오는 학생들을 이야기하며 함박 웃음을 짓었다. 김 회장은 "한번은 학생들이 우리 돕겠다고 길에서 춤도 추고, 노래도 해서 모금한 걸 30만원인가, 40만원인가 들고 왔어, 그걸 보면 어떻게 문을 닫겠나 싶어서 계속하고 있지"라고 말했다.

지금 김 회장은 일본의 역사왜곡과 망언을 모아놓은 책자를 발간할 준비를 하고 있다. 물론 그 역시 자비로 한다. 잊으면 안 된다는 이유에서고, 젊은 사람들이 더 알아야한다는 이유에서다. 김 회장과의 이야기를 마치고 역사관을 나서는 길. "끝나지 않은 이야기 일본군 위안부"라는 문 옆의 글귀가 유난히 침울하게 읽혔다.


태그:#민족과 여성 역사관, #일본군위안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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