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마을에도 산악회가 생겼다. 예전에는 인근 마을 중에서 우리 두계마을이 구례 장 보러 다니던 길목이었다고 한다. 곡성에서 구례 화엄사까지 최단거리로 가는 길이 바로 우리 마을 앞을 지나는 길이라는 것이다. 작년 강 건너 송정마을에 갔을 때 어떤 아주머니가 '옛날에 우리 시아버지가 구례 장에서 소 사 갖고 두계마을 지나서 강 건너 왔' 다는 이야기를 했다.
그래서 호기심에 구례로 넘어가는 길을 찾아보려고 몇 번을 이리저리 올라가 보고 작년 가을에는 '구례곡성 아름다운 길 걷기'를 주관하는 이까지 초빙해서 걸어봤지만, 나중에는 또 헤매고 말았다. 길이 묵어서 찾을 수가 없었다. 결국, 동네 분을 앞세우고 갈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 구례 넘어가는 길 좀 가르쳐 주셔요.""뭣 헐라고?""그냥 한 번 가보게요."하지만 농사일에 바쁜 동네 분들이라 짬을 낼 수 없다가 농사철이 끝난 작년 12월 14일 드디어 구례 넘어가는 길을 가보기로 했다. 눈발이 날리는 아침, 연심이네, 석재네, 재수네, 재수네 아저씨. 나, 우리 집 아저씨 이렇게 여섯 명이 산으로 향했다.
소풍이라도 가는 양 쉬엄쉬엄 올라가는데 처음에는 환히 보이던 길이 갈수록 이리저리 흩어져 나중에는 종잡을 수가 없었다. 다행히 그럴 때마다 재수네 아저씨가 눈에는 안 보이지만 기억 속에 있는 길을 가리켰다.
올해 칠순 잔치를 한 재수네 아저씨는 말을 못하는 대신 아직도 총기가 남아있어 예전에 구례로 넘어다니던 기억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었다. 구례 산동에서 시집온 재수네 친정집에를 자주 갔다고 했다. 갓 시집온 열여섯 살 새댁 재수네는 구례 쪽만 봐도 눈물이 났단다.
"첨에는 어치께 땀이 나고 힘든지 아이고 무담시 왔다 했는디 이렇게 옹께 재밌네잉." 중간에 쉬면서 등에 지고 온 소주 한잔이 들어가자 비로소 연심이네가 웃었다.
드디어 재(두계치)를 올라서자 산동으로 내려가 지리산온천을 가자는 재수네 아저씨를 말려서 그냥 산 능선을 한 바퀴 돌아 동네로 내려가기로 했다. 구례로 가면 자동차가 없어서 교통편이 복잡해지는 까닭이었다.
"우리도 도시사람들 맹키로 이렇게 배낭메고 산에 와서 밥먹응께 영 재밌네이." "우리야 생전 나무하러 댕기고 너물 뜯으로 댕기고 숲가꾸기 허러 댕겼제 요렇게 놀러 온 적은 없잖여." 장만해온 도시락을 내놓고 먹으면서 다들 즐거워했다.
"겨울에 회관에서 놀지만 말고 요렇게 산에 댕기먼 좋겄네. 한 달에 한 번씩이라도." "그래 그래. 그렇게 해." "그럼 다음에는 언제 갈꺼여."산에서 내려오면서 동네사람들은 기분이 좋아 모두 한마디씩 했다. 두계 산악회가 생겨난 내력이다.
두 번째 산행은 1월 15일, 나는 동네에 없어서 빠지고도 무려 열 두 명이 갔다고 했다. 연심이네, 석재네, 물가상집. 덕례네, 재수네, 봉덕이네, 또랑갓집, 재수네 아저씨, 봉덕이네 아저씨, 또랑갓집 아저씨, 우리 집 아저씨. 종현씨.
그날은 안골로 해서 가동봉으로 올라 비득재를 거처 가시덩굴을 뚫고 큰 느랏터로 내려왔다는데 하루 종일 걸어 모두들 다리가 아파서 혼났다고 야단이었다. 무슨 산악회가 두 번째 부터 그렇게 고강도 산행을 했는지 알 수 없다. 종현씨 빼고는 모두 60대 70대 촌 양반들이.
세 번째 산행은 2월 9일. 전번 산행이 너무 고돼서 다 안 나올 줄 알았는데 뜻밖에 또 열 두 명이 되었다. 연심이네, 석재네, 재수네, 봉덕이네, 또랑갓집, 물가상집, 봉덕이네 아저씨. 또랑갓집 아저씨. 우리 집 아저씨, 두가헌 아저씨, 마을사무장, 그리고 나. 우리 집 뒤 요꼴로 올라가서 나는 순천에서 오는 중학교 학부모들 맞느라 중간에서 내려오고 나머지는 모두 능선을 타고 가다가 느랏터로 내려왔다고.
네 번째 산행은 3월이라 다들 바쁜 철인데 동네 분들은 그래도 가신단다. 산바람이 좀 많이 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