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오늘(3월 11일), 네 분의 중학교 동창이 함께 오셨습니다. 함께 서울 면목여중 시절로 돌아가 그 때를 추억했습니다.
"합창 연습하던 기억이 새롭네. 처음의 각기 다른 음정들이 맞춰져서 발표 때는 마치 성악가가 된 듯 우쭐했던…….""윤정권 도덕 선생님 기억나지? 안 생겼지만 모두 좋아했었지.""회초리는 한 번도 놓고 오는 법이 없었어." 1969년도 입학동기이니 45년 전쯤의 이야기입니다. 강산이 네 번 변하는 시간이 흘렀지만 그 때의 교실 풍경뿐만 아니라 선생님의 이름까지도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김용자 동기가 오늘이 생일이라고 했습니다. 간식으로 먹기 위해 가지고 온 사과파이에 비상용 초 하나를 꽂고 즉석에서 58번째 생일을 함께 축하했습니다.
"난 그때 마흔 살이 되면 죽어야 되는 줄 알았어.""쉰 살 어른들이 깔깔대고 웃으면 그 나이에 뭐가 좋아 웃을까 싶었지." 모두가 죽어야 되는 줄 알았던 그 나이를 지나서도 한참을 살았습니다.
"내 생전에 60살이 안올줄 알았지."올해 안에 죽지 않으면 모두가 안 올 줄 알았던 그 나이에 함께 도달하게 되었습니다.
#2
친구들의 즉석 생일 축하에 상기된 김용자 선생님이 스마트폰을 열었습니다.
"어제 내 동생이 보내준 글인데 노년의 박경리와 박완서 선생님이 쓰신 글을 발췌한 것이야. 읽어볼게."김용자 선생님이 문학을 전공했다는 동생이 보내준 '박경리와 박완서의 노년관(老年觀)'이라는 글을 읽기 시작하자 모두 귀를 세웠습니다.
소설가 박경리씨는 운명하기 몇 달 전 이렇게 말했습니다. "다시 젊어지고 싶지 않다. 모진 세월 가고... 아아~~~ 편안하다. 늙어서 이렇게 편안한 것을...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 다음은 노년의 박완서씨가 썼던 글입니다. "나이가 드니 마음 놓고 고무줄 바지를 입을 수 있는 것처럼 나 편한 대로 헐렁하게 살 수 있어서 좋고 하고 싶지 않은 것을 안 할 수 있어 좋다. 다시 젊어지고 싶지 않다. 하고 싶지 않은 것을 안 하고 싶다고 말할 수 있는 자유가 얼마나 좋은데 젊음과 바꾸겠는가... 다시 태어나고 싶지 않다. 난 살아오면서 볼 꼴, 못 볼 꼴 충분히 봤다. 한 번 본 거 두 번 보고 싶지 않다. 한 겹 두 겹 어떤 책임을 벗고 점점 가벼워지는 느낌을 음미하면서 살아가고 싶다. 소설도 써지면 쓰겠지만 안 써져도 그만이다." 낭독을 듣고 조금은 숙연해진 분위기에 제가 끼어들었습니다.
"문제는 앞으로 죽기가 어렵다는 겁니다. 어쩌면 선생님들은 지금까지 살아온 세월을 더 사셔야할지도 몰라요." 한 분이 반문했습니다.
"60년을 더 살아요?"좀 더 구체적인 상황을 제시했습니다.
"네, 암이 극복되면 평균수명 120살은 더 빨리 올지도 모릅니다. 그럼 나머지 60년을 뭘 하며 살아야 할까요? 지난 60년은 연애하고 출산하고 육아하느라 경황 없이 지나갔지만 70세에 출산하고 육아에 전념해야 할 리도 없으니 나머지 60년은 훨씬 느리게 갈 텐데 말이지요." #3한 분의 남편은 자가 사업을, 두 분의 남편은 정년퇴임하신 지 이미 두어 해가 지났다고 했습니다. 정년퇴임하신 두 분 중 한 분은 관련기관에 재취업을 했고, 한 분은 김포에서 농사를 짓고 계셨습니다.
"400평이나 되니 텃밭 정도는 아니고 귀농한 농부처럼 농사를 짓습니다. 지난 2년 동안 먹을 수 있는 모든 야채를 다 심어 봤어요. 판로가 문제더라고요. 지금까지는 인근 슈퍼마켓에 내다 팔고 있었어요. 수확하자마자 바로 팔아야 되는 것이 있고 저장했다 팔아도 되는 것이 있는데 우리는 그것도 몰랐어요. 작년에는 땅콩 농사를 지었는데 주변에서 평이 좋았습니다. 그래서 올해는 땅콩만 주문 생산할 예정입니다." 김용자 선생님은 다른 경우였습니다.
"저희 부부는 2003년에 평창으로 갔습니다. 그해 여름에 방 네 개로 펜션을 시작했어요. 지금도 함께 청소하면서 손님을 맞고 있지요. 항상 바쁜 것은 아니므로 산에도 오르고 산나물도 뜯곤 하지요. 요즘에는 교회의 목사님에게 드럼을 배워서 저는 드럼을 치고 있습니다. 한 두시간 정도 드럼을 두드리고 나면 스트레스도 풀리고. 오늘은 남편과 5일간의 서울 나들이입니다. 우리는 간혹 이렇게 인터넷 예약 사이트를 막아두고 여행을 떠나요. 남편은 평창으로 가기 전에 차를 공급하는 사업을 했었는데 지금도 계속하고 있어요. 예전처럼 활발하지는 않지만..."얘기는 자식들에게로 넘어갔습니다.
"저희 펜션에 부모하고 오는 사람의 95%는 딸이에요. 그래서 남편은 며느리가 시부모 모시고 오는 사람들에게는 엄청 칭찬해 줘요."펜션지기의 그 말을 듣고 아들만 둘이라는 동창을 걱정스럽게 바라보았습니다
"괜찮아. 일전에 한 의사의 말을 들어보니 불치의 병에 걸렸다는 진단을 하면 딸은 울고불고 난리래. 그런데 3일만 지나면 슬그머니 빠지고 그 뒤부터는 며느리가 수발을 다 든다는 거야. 의무를 감당하는 것은 역시 며느리야." 덧붙이는 글 | 모티프원의 블로그 www.travelog.co.kr 에도 함께 포스팅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