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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노동자들의 노동 3권은 손해배상 소송에 가로막혀 있다. 노조의 파업에 대응하기 위해 사측이 청구하는 손배 규모가 1천억 원을 넘어섰다. 파업 손배소는 이제 더 이상 새로운 사건이 아니다. 일상이 돼버렸다.

법원에서도 파업에 참가한 노동자들에게 수십억 원의 손해를 배상하라는 판결이 쏟아지고 있다. 또한 파업이 발생하면 노동조합만을 상대로 법적인 책임을 묻던 예전과 달리, 최근엔 조합원 개인에게까지 손배 '폭탄'이 떨어지고 있는 추세다. 헌법상 권리인 노동 3권도 손배소 앞에서 맥을 못추고 있다.

사측이 노조와 조합원을 상대로 제기한 소송의 규모는 얼마나 될까. 법원의 판결 결과는 어떻게 나오고 있을까. 전국의 대표적인 사업장에서 벌어진 파업 사건을 중심으로 파헤쳐본다. 또한 파업과 관련된 법률과 판례 분석을 통해 대부분의 파업이 불법이 될 수밖에 없는 배경과 수십 억대 손배소가 가능한 원인을 찾아본다.

'손배소에 가로막힌 노동3권'이라는 기획을 통해 노동조합과 사측, 법률사무소 등을 통해 입수한 통계자료, 판결, 소송서류, 관련논문 등을 분석하여 파업 손배소의 현황과 문제점, 그리고 대안을 모색해보고자 한다. - 기자 말

"사용자는 이 법에 의한 단체교섭 또는 쟁의행위로 인하여 손해를 입은 경우에 노동조합 또는 근로자에 대하여 그 배상을 청구할 수 없다."

노동조합 및 노동관계조정법(아래 노조법) 제3조의 내용이다. 회사의 손해배상 '폭탄'으로부터 노동3권을 지키고 정당한 노조활동을 보장하기 위한 조항이다.

그러나 2014년 현재, 회사들은 파업에 대응하기 위해 천문학적 규모의 손해배상을 노조에 청구하고 있다. 법원도 노조와 파업 노조원에게 '수십 억 원의 손해를 배상하라'는 판결을 쏟아낸다. 노조법 3조가 있는데도 불구하고 파업을 벌인 노조·노조원이 회사의 거대 손배 소송에 무참히 당하는 모양새다.

노조법 3조가 파업을 벌인 노조들을 보호하지 못하는 이유는 해당 조항의 '전제조건' 때문이다. 대법원 판례는 이 조항을 "민사상 배상책임이 면제되는 손해는 정당한 쟁의행위로 인하여 입은 손해에 국한된다"고 해석한다. 현행 노조법에 따르더라도 '임금·근로시간·복지·해고·기타 대우 등 근로조건 관련 쟁의행위' 정당한 파업, 즉 합법파업으로 규정한다. 

반면, 구조조정·정리해고·민영화에 반대해 벌인 파업은 '불법'으로 해석된다. 2003년 민영화에 반대해 파업한 철도노조가 회사에 24억 원을 배상하고, 2010년 정리해고 반대 파업을 벌인 한진중공업이 1심에서 59억 원의 배상판결을 받은 것도 법원이 '불법파업'이라고 해석했기 때문이다.

임금·근로시간 파업만 '합법', 정리해고 반대는 '불법'

전국철도노동조합 조합원들이 지난해 12월 14일 오후 서울 중구 서울역 광장에서 열린 '철도파업 승리, 민영화, 연금개악 저지, 노동탄압 분쇄 민주노총 결의대회'에서 철도민영화를 반대하며 구호를 외치고 있다.
▲ 철도민영화 저지 외치는 철도노동자 전국철도노동조합 조합원들이 지난해 12월 14일 오후 서울 중구 서울역 광장에서 열린 '철도파업 승리, 민영화, 연금개악 저지, 노동탄압 분쇄 민주노총 결의대회'에서 철도민영화를 반대하며 구호를 외치고 있다.
ⓒ 유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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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계·법조계에서는 '정당한 쟁위행위'로 해석되는 범위가 지나치게 좁다고 입을 모은다. 단순히 임금인상이나 노동시간 단축, 부당한 처우 정도를 근로조건으로 보고, 이를 개선하기 위한 파업만을 합법으로 인정하는 우리나라 판례에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정리해고야말로 노조에게는 조합원들의 근로조건 유지를 위해 싸워야할 일이에요. 다수의 조합원이 갑자기 해고될 위기에 처하는데 어느 노조가 손 놓고 가만히 있을 수 있겠어요? 그런데도 법원이 노조에게 '불법이니 파업하지 말고 가만히 있어'라고 하는 건, 아예 노조 활동을 하지 말라는 소리죠. 민영화란 이슈도 노동자 입장에서는 '노동자의 근로조건이 개선되느냐, 악화되느냐'의 문제이기 때문에 노조가 나서서 쟁의행위를 할 수밖에 없는 겁니다." - 권영국 변호사(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 노동위원장)

전문가들은 선진국 추세에 따라 대법원 판례 태도도 바뀌어야 한다고 지적한다. 정리해고나 경제 이슈 관련 파업도 노동자들의 근로조건 개선과 연관이 있으면 합법으로 간주해 정당한 쟁의행위의 범위를 넓혀야 한다는 것이다.

실제로 일부 선진국은 노조의 합법파업의 범위를 넓게 해석하는 경향이다. 일본·영국 등은 정리해고에 반대하는 파업을 정당하다고 해석하고, 프랑스는 민영화 반대 같은 경제이슈 관련 파업도 합법 쟁의행위로 본다.

우리나라에서도 변화는 일고 있다. 지난 1월 서울남부지법이 MBC가 노조와 파업 노조원들을 상대로 낸 손배소에서 노조원들의 손을 들어준 게 대표적 예다. 당시 재판부는 MBC 노조가 파업 근거로 내세운 '공정방송 보장'이 근로조건과 관계있다고 보고 파업의 목적성이 정당했다고 판단했다.

하지만 대법원 최종 판례 태도가 바뀌거나 대법원 전원합의체로 판례를 바꾸는 건 사실상 무리라는 시각도 있다. 현재 보수 성향의 대법관 비율이 높기 때문에, 대법원이 파업의 정당성을 넓히는 판결을 당장 내놓을 가능성은 현실적으로 낮다는 지적이다.

판례변경·법개정 필요하지만... "사회적 공감대 확대가 우선"

지난 2월 26일 오후 서울 중구 서울시청 시민청 이벤트홀에서 열린 '손배 가압류를 잡자, 손에 손을 잡고'(약칭 '손잡고') 출범식에서 금속노조 쌍용차지부 김득중 지부장과 참석자가 손해배상, 가압류 문제 해결을 염원하며 각 사업장이 감당해야 하는 금액에 색칠을 하고 있다.
▲ 손배 가압류 없는 세상을 위해 지난 2월 26일 오후 서울 중구 서울시청 시민청 이벤트홀에서 열린 '손배 가압류를 잡자, 손에 손을 잡고'(약칭 '손잡고') 출범식에서 금속노조 쌍용차지부 김득중 지부장과 참석자가 손해배상, 가압류 문제 해결을 염원하며 각 사업장이 감당해야 하는 금액에 색칠을 하고 있다.
ⓒ 유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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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노총 등은 입법 조치가 우선돼야 한다고 주장한다. 노조법 자체를 바꿔 법원이 합법파업으로 인정할 수 있는 범위를 넓혀야 한다는 것이다.

민주노총 금속노조 법률원 소속 김태욱 변호사는 "법원이 쟁의행위의 정당성을 너무 좁게 인정하고 있기 때문에 합법파업에 해당하는 범위를 넓히는 쪽으로 법 조항이 개정돼야 한다"면서 "'정리해고나 정치·경제이슈 파업이 근로조건 유지·개선을 위한 쟁위행위에 해당한다'는 조항을 추가하는 등의 방법을 고려해봐야 한다"고 말했다.

현재 국회에서는 심상정 정의당 의원이 지난 2012년 7월 노조법 개정안을 발의한 상태다. 폭력이나 파괴행위에 따른 손해만 배상 청구가 가능하다는 게 개정안의 주요 골자다. 전순옥 새정치민주연합의원은 지난해 6월 노조 파업에 대한 손해배상 청구 요건을 강화하는 내용의 특별법을 발의했다.

일각에서는 정당한 파업행위의 범위와 관련해 노조법을 개정하는 것은 바람직한 방법이 아니라고 우려한다. 손해배상은 민법의 적용을 받는데, 노조 파업에 대해서만 지금보다 특별규정을 강화하는 건 위헌 소지가 있고 다른 손해배상 사건과 비교해서 형평성 문제가 발생할 수도 있다는 뜻이다. 또한 여당이 과반 의석을 차지한 국회에서 이같은 법률안이 통과될 가능성도 낮다는 시각이 많다. 다만, 유럽의 사례와 같이 노조에게 청구할 수 있는 손해배상액 상한을 조항으로 두거나 조합원 개인에게 손해배상을 요구할 수 없도록 하는 법 개정은 필요하다는 게 전문가들의 의견이다.

학계에서도 거액의 손배청구와 가압류의 개선방안에 대한 연구가 늘고 있다. 원로 노동법학자인 김형배 교수는 자신의 저서 <노동법>을 통해 사측의 손배청구가 "노조 활동을 약화시키려는 수단으로 오용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지적했다. 김 교수는 개선방안으로 ▲단순가담자 등 개별조합원 책임제한 ▲정리해고, 구조조정 등과 관련해 노사가 신뢰할 수 있는 분쟁해결제도 도입 ▲임금, 조합비 압류를 일정하게 제한해야 한다는 등의 해결책을 내놓았다.

이외에도 회사가 손해배상 청구 전후로 과도한 가압류를 하는 관행에 제동을 걸 방안도 마련돼야 한다는 의견도 있다. 법원이 가압류 결정전에 노사 양측의 의견을 듣는 심문절차를 진행하거나 손해배상과 관련한 소명자료를 더욱 엄격하게 심사해야 한다는 것이다. 법원이 노동문제의 특수성을 인정하는 판결을 내릴 수 있도록 노동법원 설립이 필요하다는 시각도 제기됐다.

전문가들은 판례 변경이나 법 개정, 제도 마련이 실현되려면 사회적 공감대가 확대되는 게 우선이라고 강조했다. 소비자들의 거센 비판이나 압박이 없기 때문에 현재 우리나라 대기업들이 별다른 부담 없이 수십·수백억 원 대의 손배소를 제기한다는 것이다. 실제로 일부 선진국에서는 기업들이 소비자에게 받을 비난을 우려해 섣불리 거액의 손배소를 제기하지 못하는 분위기가 형성돼있다고 전해진다. 노동계와 법조계에서는 국민적 여론 압박이 기업을 넘어 국회나 정부를 움직일 수 있게 될 것이라고도 기대한다.

최근 이러한 움직임이 국내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손배·가압류를 해결하자는 취지의 사회적 기구(손잡고)가 출범했고, 노조 손배 피해를 돕기 위한 모금운동인 '노란봉투 캠페인'이 가수 이효리씨 등의 참여로 사회적 반향을 일으켰다. 여기서 더 나아가 불매운동이나 탄원서로 민사 손배 소송의 당사자인 기업 자체를 압박해야 한다는 의견도 나온다.

'손잡고' 모임에 참여하고 있는 은수미 민주당 의원은 "사람들이 점점 (노조 손배) 문제를 자신의 문제로 생각하게 되는 것 같다"면서 "재계와 정부·여당이 반발한다 해도 국민이 동의한다면 (법 개정 등은) 가능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태그:#손배, #손배가압류, #손잡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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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으로 세상과 소통하려는 법원공무원(각종 강의, 출간, 기고) 책<생활법률상식사전> <판결 vs 판결> 등/ 강의(인권위, 도서관, 구청, 도청, 대학에서 생활법률 정보인권 강의) / 방송 (KBS 라디오 경제로통일로 고정출연 등) /2009년, 2011년 올해의 뉴스게릴라. jundorapa@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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