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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석이(가명)는 눈빛과 말투가 강렬했다. 3월 초 어느 수업 시간이었다. 나는 일부러 은석이에게 몇 번이나 따뜻한 눈길을 주었다. 그때마다 은석이는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은석이의 차갑고 냉소적인 눈빛은 상당히 부담스러웠다.

개학한 지 며칠 되지 않았을 때였다. 은석이 반에서 하는 수업도 겨우 두어 시간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말하자면, 속된 말로 아이들과 교사가 서로 '간을 보는' 시기였다. 서로가 눈치를 보면서 관계의 우위를 선점하기 위한 치열한 눈치 작전의 시기 말이다.

은석이를 향한 내 눈길은 '간 보기' 위한 것은 아니었다. 단지 관심의 표시였을 뿐이다. 그런데도 은석이는 아마도 내 눈길을 간 보기 시도로 이해했던 듯하다. 나는 은석이의 부담스러운 눈빛에도 불구하고 계속 눈길을 주었다.

은석이도 일부러(!) 이글거리는 눈빛을 '연출하는' 게 힘들어서였을까. 어느 순간부터였다. 은석이는 건성으로라도 교과서며 학습지를 쳐다보기 시작했다. 눈에 잔뜩 들어가 있던 '힘'도 풀어졌다. 은석이의 이글거리는 눈빛에 들썩였던 마음도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3월 초, 은석이의 눈빛이 부담스러웠다

 은석이(가명)는 눈빛과 말투가 강렬했다.
은석이(가명)는 눈빛과 말투가 강렬했다. ⓒ 쇼박스(주)미디어플렉스

그날 점심 때였을까. 은석이와의 '극적인' 만남이 있었다. 교무실 바로 앞에 있는 우리 반 교실에서였다. 우리 반의 한 아이를 보기 위해 잠깐 교실에 들어섰다. 마침 은석이는 몇몇 친구들과 함께 창문을 넘어가려 하고 있었다. 창 너머에는 조그만 농구장이 있었다. 그곳으로 가려면 복도를 끝까지 지나쳐야 했다. 그런데 은석이는 우리 반 창문을 통해 농구장으로 가는 '지름길'을 이용하려던 것이었다.

나는 은석이 곁에 있던 성우(가명)를 불렀다. 성우는 은석이 앞에 서서 창문에 덧댄 철주를 붙잡고 막 창을 넘으려던 참이었다.

"성우야, 창문을 넘다가 다치기라도 하면 어떻게 하려고 그래."
"예? 아니 괜찮아요."

성우는 삐딱한(?) 목소리로 건성건성 대답하며 다시 창문을 넘으려고 했다. 나는 손짓으로 성우를 불렀다. 성우는 못마땅하다는 몸짓으로 내게 왔다. 나는 두 손으로 성우의 어깨를 지그시 붙잡고 다시 찬찬히 이야기했다.

성우의 표정에는 못마땅하다는 기색이 역력했다. 자신의 어깨를 붙들고 있는 내 손을 빼내려고 두 팔에 힘을 주기도 했다. 성우는 '도전적인' 눈빛이 여느 아이들 못지 않게 강한 녀석이었다.

그때 은석이가 우리 둘이 있는 곳으로 쪼르르 달려왔다. 은석이는 아무 말도 없이 나와 성우를 바라보았다. 은석이의 얼굴에서는 재미있는 구경거리라도 생기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 같은 게 묻어나는 듯했다. 하지만 나는 둘을 번갈아 보며 차분하게 말했다.

"은석아, 성우야, 창문으로 넘어가면 안 돼. 다치잖아. 저쪽으로 돌아서 가거라."

그렇게 말하며 나는 은석이의 입가에 묻은 과자 부스러기를 살짝 닦아 주었다. 점심을 먹고 난 직후에도 많은 아이가 입에서 과자며 음료수, 핫바 등을 떼어놓지 못했다. 중2 나이라면 돌이라도 씹어먹을 때가 아닌가. 은석이도 막 과자를 먹은 모양이었다.

은석이는 순간 쑥스러워하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러고는 곧 손등으로 자신의 입가를 다시 쓰윽 문질렀다. 그런 표정과 동작을 만들어내던 은석이는 내게 이글거리는 눈빛을 던지던 그날 오전의 은석이가 아니었다. 그는 단지 겨우 열다섯 살 먹은 풋풋한 소년이었을 뿐이다.

나는 한 번 더 창문을 넘지 말라고 말하며 뒤돌아섰다. 은석이와 성우는 복도를 향해 갔다.교무실로 들어서면서 등을 살짝 돌려 녀석들을 살폈다. 두 녀석은 언제 내 말을 들었느냐는 듯이 창문 철주를 붙잡고 장난질을 치고 있었다. 그래도 녀석들은 창문을 넘지는 않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고는 한 마디 더 할까 하다가 그냥 돌아섰다.

'허세작렬 꼴통'들, 꼭 이겨먹으려 해야 할까

아이들을 '이겨 먹으려는' 교사들이 많다. 교사의 권위가 아이들을 꼼짝 못하게 제압하는 데 있다고 믿는 교사들도 부지기수다. 그 때문일까. 아이들을 '당해 내지' 못하는 교사들은 공공연히 무능하고 무기력한 교사로 찍히곤 한다.

많은 교사가 학기 초부터 아이들을 단단히 옥죄는 이유다. 대다수 아이들을 향해 윽박을 지르고, '뺀질거리는' 아이들에게는 겁을 먹어 꼼짝 못하도록 '협박'을 일삼기도 한다. 교사들은 아이들의 조그만 실수도 쉽게 용납하지 않는다. 학년 초, 담임들은 조례·종례 때마다 원칙과 규율, 질서 등을 다른 그 무엇보다 강조한다.

그런 교사의 방식과 태도가 과연 교육적일까. 그것이 과연 최선의 방책일까. 나는 군림하고 억압하는 교사가 이른바 몇몇의 '문제아'들뿐만 아니라 평범한(?) 보통의 아이들에게 더 큰 폐해를 가져다 준다고 믿는다. 아이들이, 힘의 열세에 눌려 부당한 권력이나 권위에 눈치껏 순응하는 것이 일신의 편안함을 가져다 준다는 처세술을 갖게 되지 않을까 해서다. 그런 아이들에게서 정의와 민주주의 감각을 기대하는 건 무리다.

'중2병'에 걸린 '괴물'들이 30여 명 넘게 살아가는 중2 교실이라면 이야기가 다르지 않느냐고 반문할 수도 있겠다. 놀라운 호르몬의 영향력 아래 있는 아이들은 언제 어디로 튈지 모른다. 그런 아이들을 엄격한 권위나 규율 없이 어찌 다스릴 수 있겠느냐고 묻는다면 솔직히 할 말이 별로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간과해서는 안 되는 문제가 여전히 있다. 많은 이가 '중2병'이니 '괴물'이니 하는 말로 뭉뚱그려 말하지만, 대다수의 중2 아이들은 지극히 평범한 일상을 살아간다. 교사나 부모가 그런 아이들을 굳이 이겨 먹을 필요가 없는 것이다.

'허세 작렬'에 '꼴통 짓'을 하면서 반항하는 아이들조차도 사실은 자기 자신을 잘 모른다. 스스로는 다 컸다고 여기면서도 변덕스러운 행동과 모순적인 생각 속에서 치기를 드러낼 때가 많다. 미성숙한 자신의 모습을 위장하기 위해 허세를 부리고 반항하는 것이다. 그런 아이들을 어른들이 이겨 먹으려고 하는 게 말이 되는가.

우리 학교에는 일명 '복도파'가 있다. 아이들 사이에서 제법 힘께나 쓰는 '껄렁거리는' 아이들을 일컫는 말이다. 쉬는 시간마다 복도를 휘젓고 다니는 데서 생긴 말이다. 은석이도 그런 복도파 중 하나다. 지금도 은석이는 여전히 껄렁거리며 복도를 날다람쥐처럼 오간다.

그런데 은석이는 그렇게 바쁜(?) 와중에도 종종 교무실 내 자리 근처에 와 기웃거린다. 내가 "은석이 무슨 일 있냐"며 물으면 하얀 치아를 드러낸 채 쑥스러운 미소를 짓는다. 그러고는 별다른 대답도 없이 어깨를 건들거리며 교무실을 빠져 나간다. 복도를 오가노라면 일부러 내게 찾아와 인사를 꾸벅 하기도 한다. 그런 은석이에게서, 녀석이 처음 내게 던진(것으로 내가 착각했을지도 모르는) 이글거리는 눈빛은 그 어디서도 찾을 수 없다.

며칠 전 수업이었다. 은석이는 교과서와 학습지를 챙겨 와 내가 일러 준 학습 활동을 부지런히 했다. 고개를 숙인 채 차분히 생각하며 무언가를 적고 있는 은석이의 모습이 얼마나 대견스럽고 의젓했는지 모른다. 한 시간 내내 나와 눈빛만 주고받은 것을 생각하면 얼마나 큰 변화인가.

교사는 처음부터 따뜻한 마음으로 아이들에게 다가가야 한다. 진심 어린 인정과 칭찬, 대가 없는 관심과 사랑에 목마른 아이들일수록 더욱 그렇다. 어렸을 때부터 어른들의 윽박과 일방적인 훈계에 길들여진 아이들이 심하게 '중2병 앓이'를 한다.

그런 아이들을 여전히 강압적으로 대하면 엇나가기 마련이다. 극와 극이 만나면 파국으로 치달을 뿐이다. 아이들에게는 한 조각의 알량한 지식보다 진심 어린 관심과 사랑이 더 우선시되어야 한다. 그것이야말로 아이들을 진정으로 강하고 튼튼하게 해주는 최고의 보약이 아닐까.

아내에게 이달치 용돈을 받으면 따뜻한 시편들이 담긴 시집 한 권 사 은석이에게 전해야겠다. 내 직감으로 보건대, 은석이는 은근히 책을 좋아하는 것 같다. 그렇지 않더라도 상관 없다. 시집을 건네는 내 마음을, 나는 너를 믿고 있다는 내 진심을 은석이가 알기만 하면 되니까 말이다.

덧붙이는 글 | 제 오마이뉴스 블로그(blog.ohmynews.com/saesil)에도 실릴 예정입니다.



#중2#중2병#교사#학교#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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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 민주주의의 불한당들>(살림터, 2017) <교사는 무엇으로 사는가>(살림터, 2016) "좋은 사람이 좋은 제도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좋은 제도가 좋은 사람을 만든다." - 임마누엘 칸트(Immanuel Kant, 1724~1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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