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CBS의 인기 시사 프로그램 <60분>에 출현한 한 미국인은 이라크 제재의 결과로 50만 명 이상의 어린이들이 숨진 게 정당화될 수 있느냔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네. 그런 희생을 치를 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해요."수단에 대한 도덕성은 차치하고라도 아무 것도 모른 채 숨져간 아이들의 생명에 대해 조금의 경외심도 없는 대답이었다. 전쟁영화에 너무 심취한 사람이라서? 아니면 이라크에 개인적인 원한이 깊은 사람일까? 다 아니다. 발언을 한 이는 후에 미국 국무장관을 역임하며 우리에게도 익숙한 얼굴인 당시 클린턴 정부의 UN대사 매들린 올브라이트였다.
역사에서 무엇을 배워야 하나그 정도의 위치에 있는 이의 발언이기에, 가벼운 논쟁거리로 여기기엔 너무나 슬픈 현실이 담겨 있다. 그녀의 시각이 곧 미국의 시각을 대변한다고 봐도 무리가 없기에 그렇다. 파키스탄 출신의 정치운동가 타리크 알리는 미국 영화감독 올리버 스톤과의 대담에서 이 발언을 소개하고 꼬집었다.
"미국엔 이런 정신 상태를 가진 지도자들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미국을 제외한 나머지 지역에 도덕에 대한 교훈을 가르치겠다고 하고 있죠. 그러니 이들의 주장이 곧이곧대로 들리지 않는 겁니다." - <역사는 현재다> 199쪽"테러와의 전쟁이란 본질적으로 미국 외교 정책이 자국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도구였습니다. 미국은 테러와의 전쟁이라는 미명하에 동맹국들의 도움으로 세계 곳곳에서 원하는 대로 사람들을 감금하고 체포했습니다." - <역사는 현재다> 197쪽역사는 흐르고 있지만, 슬프게도 이런 장면은 되풀이되고 있다. 알리에 따르면, 굳건한 엘리트 교육 체계를 통해 이 체제와 그 관리자들이 계속 재생산되고 있다고 한다. 그래서 그는 바로 이 시점에서 가장 중요한 질문을 던진다.
"그들은 과거 역사를 반복해 서로 싸우고, 그런 과정을 통해 이 행성을 파괴할 작정인가?"
20세기를 돌아보며 알리와 스톤은 대화를 나눴다. 그리고 그 내용을 책 <역사는 현재다>에 담았다. 문제가 무엇인지, 왜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지, 그럼에도 긍정적인 시각을 유지해야 하는 까닭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타리크 알리의 이력은 독특하다. 파키스탄에서 태어났지만, 영국에서 공부했으며, 결국 군사독재에 저항한 전력이 문제가 돼 고국으로 다시 돌아가지 못했다. 현재 영국에서 망명 상태로 살아가고 있다.
그를 인터뷰한 올리버 스톤은 한국과 아주 각별하다. 반평생을 함께한 부인이 한국인이다. 그녀를 통해 한국을 보고 느꼈다. 그런 그가 한국인들을 '전사의 투지가 깃들었다'고 표현했다. 어떤 상황 속에서도 한국인들은 '진실한 영혼'을 잃지 않으리란 말도 덧붙였다.
그렇기에 그가 인터뷰어로, 타리크 알리가 인터뷰이로 참여한 대담집 <역사는 현재다>를 읽다 보면 한국에 대한 언급도 심심찮게 등장한다. 콕 찍어 한국을 언급한 대목은 그리 긍정적이지 않다. 물론 전체적으로도 대화의 틀은 넓다. 둘의 대화에 성역은 없었다. 특히 알리의 거침없는 언사는, 왜 그의 조국 파키스탄이 그를 불편해 하는지 짐작할 수 있을 정도였다.
"이승만 정권이 대부분의 남한 사람들에게 북한의 김일성 정권만큼이나-어쩌면 그보다 더-억압적이었다는 사실을 아는 미국인은 거의 없었다. 미국은 이승만을 그곳(한국-기자말)의 마피아 보스로 만들고, 많은 양의 돈과 무기를 제공하는 등 후원을 아끼지 않았다. 이는 미국의 수많은 결정적 오판 중의 하나다. 이승만은 '우리의' 독재자였고, 그의 정부는 2차 세계대전 당시 일제에 협력했던 수많은 부역자들로 꾸려졌다."- <역사는 현재다> '한국어판 서문'에서지금도 한국을 비롯한 동북아는 미국의 그림자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알리는 하루속히 자신들만의 연합체를 구성해 문제를 해결해 나가는 방식이 더욱 평화적일 것이라 예상했다. 그러나 동북아(한국, 중국, 일본)가 유럽연합과 같은 종류의 연합을 형성할 수 없는 이유가 미국이라고 지적했다.
"미국은 자신들이 세계에서 차지하고 있는 패권에 극동지역이 가장 큰 위협이 된다고 보고 있어요. 2차 세계대전 이래로 일본이 독자적인 외교 정책을 추진하는 건, 독일의 경우와는 달리, 허용되지 않았어요. 일본은 거의 미국의 의도대로 움직였죠. 사실 이것은 위험한 일입니다. 또다시 위험한 형태의 민족주의를 초래할 수 있거든요. 그것은 일본에도 다른 국가에도 좋지 않은 일입니다. 중국, 일본, 한국이 함께 일을 도모할 수 있도록 격려하는 게 더 나을 거예요. 그 틀 안에서 북한 문제도 다룰 수 있을 것입니다."- <역사는 현재다> 170쪽사실 둘의 대담에는 약간의 음울함이 배어 있다. 세계대전, 홀로코스트, 한국전쟁, 베트남전쟁, 걸프전쟁, 보스니아 내전. 둘이 돌아본 인류의 지난날은 전쟁과 학살, 분쟁으로 얼룩져 있다. 폭력과 야만이 지난 세기를 집어삼킨 원인은 무엇인가. 타리크 알리의 답은 "이윤에 대한 욕망이 모든 것을 지배하는 부르주아 문명"이다. 그 문명의 영향 아래 국가가 파괴적인 경쟁에 개입했고, 그 결과 수많은 사람의 희생이 초래됐다는 것.
히틀러의 탄생에서 신자유주의까지인류 역사에서 최악의 비극으로 꼽히는 제2차 세계대전도 결국 인간의 욕심이 문제였다. 히틀러가 무럭무럭 자랄 수 있었던 데에는 영국의 제국주의적 욕망이 자리했다. 러시아혁명을 바라보며 자기네 식민지를 잃지 않을까 하는 조바심이 더 컸다. 그렇게 전쟁의 씨앗은 잉태됐고, 뿌리를 내렸다. 결과는 참혹했다.
"영국이 러시아를 증오했던 가장 큰 이유는 대영제국이 위협받았기 때문입니다. 영국 내에서 위협이 됐던 건 아니었어요. 아프리카와 아시아의 식민지 사람들은 특별히 러시아 혁명을 희망의 빛으로 인식했습니다. 그 때문에 영국이 매우 당황했던 것이죠."- <역사는 현재다> 49쪽"영국의 대독 유화론자들은 알려진 대로 극단적인 우익 정치인이었지만, 비이성적인 사람들은 아니었어요. 그들은 히틀러를 이용해 러시아를 막을 수 있다면 큰 이익이 될 거라고 주장했지요."- <역사는 현재다> 42쪽미국이 참전하는 계기가 됐던 일본의 진주만 공격에 대한 알리의 시선은 날카롭다. 당시 일본이 진주만을 습격하자, 미국에서는 일본계 미국인들이 감금됐다. 국적이 미국이었는데도 말이다. 별다른 이유 없이 자유를 박탈 당했다. 더 무서운 사실은 나머지 사람들이 그 비정상적인 조취에 대해 침묵했단 점이다. 알리는 이를 "결코 있어서는 안 됐을 일"이라고 표현했다. 그러면서 지금도 그런 일이 충분히 벌어질 수 있음을 상기시켰다.
"저는 늘 궁금했습니다. 9.11 이후 몇 주 사이에 미국이 모든 미국인 무슬림들을 수용소에 무기한 감금하는 결정을 내렸다면 그 반응이 어땠을까. 별 반응이 없었을 것 같아 두려웠어요. 전 그런 게 두렵습니다." - <역사는 현재다> 59쪽과거의 폭력이 전쟁과 학살이었다면, 지금은 신자유주의 체제를 필두로 한 경제적 야만이 문제다. 그러나 책은 신자유주의 체제가 붕괴되고 있음을 말했다. 희망의 단초는, 그 누구도 예상치 못했던 라틴 아메리카였다. 거품은 걷어지고, 이제 전 세계가 대안을 기다리고 있다.
"모든 곳에서 납세자들의 돈은 부자들을 구제하는 데 사용되어 왔습니다. 신자유주의의 이념이란 국가는 쓸모없고, 시장이 모든 역할을 다 한다는 게 전부입니다. 시장이 가장 우월하다는 거죠. 그런데 시장이 무너졌습니다. 국가 앞에 무릎을 꿇고 애걸하고 있습니다. "도와주세요, 제발." 납세자들의 돈이 서방 세계의 모든 은행을 살리는 데 투입되었습니다. 하지만 그 충격은 고스란히 대중의 의식에 남아 있을 것입니다. 어떤 결과를 낳을지 지켜보게 될 거에요. "- <역사는 현재다> 166~167쪽이렇듯 비관적인 역사를 읊는 둘의 대담은, 그럼에도 미래를 '낙관'하자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 희망의 눈으로 역사를 살펴볼 때에만 답을 구할 수 있는 기회가 찾아오기 때문이다. 폭넓은 지식과 날카로운 통찰력이 돋보이는 대화를 통해 역사를 돌아봐야 할 이유는 바로 그 때문이다.
덧붙이는 글 | <역사는 현재다>, 타리크 알리·올리버 스톤 지음, 박영록 옮김, 오월의봄 펴냄, 2014.02, 1만3천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