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북자 서울시 공무원 간첩사건' 2심 재판에 국정원과 검찰이 제출했던 증거 문서들의 조작 경위가 점점 명백해지는 가운데, 1심 재판 당시 유력한 근거였던 유우성씨 여동생 유가려씨의 각종 진술서도 곳곳에 짜맞춘 흔적이 보이고 있다.
<오마이뉴스>는 1심 재판 초기 검찰이 내놓지 않았다가 나중에야 제출했던 유가려씨의 진술서 26개를 입수해 검토했다. 그 결과 국정원 수사관들의 주문대로 쓰여진 것으로 의심되는 내용을 여러 건 발견했다. 유가려씨는 1심 재판 당시에도 "국정원 수사관들이 원하는 대답이 안 나오면 마지막까지 진술을 받으려 했다"고 증언한 바 있다.
지난 2012년 10월 30일 입국한 유가려씨는 이후 180일 동안 국정원이 관리하는 합동신문센터에 수용돼 수많은 자술서와 확인서, 반성문을 썼다. 하지만 검찰은 그중 최종 공소제기한 내용과 부합하는 '매끄러운 진술서'만 증거로 제출하고 다른 진술서의 존재는 알리지 않았다. 그러나 공판과정에서 그 존재가 확인됐고, 변호인 측의 요청에 따라 재판부가 명령해 추가증거로 제출됐다.
[의문점 ①] 오빠의 대한민국 출입국기록을 줄줄 읊은 여동생
지난해(2013년) 1월 10일 체포돼 2월 26일 기소된 유우성씨의 공소사실 중 밀입북 혐의는 총 5차례(①2006년 5월 22일 ②2006년 5월 27일 ③2007년 8월 중순 ④2011년 7월 초순 ⑤2012년 1월 24일)다. 그런데 유가려씨가 합신센터에 수용된 지 23일만에 쓴 2012년 11월 20일자 진술서에는 오빠 유우성씨의 밀입북 시기를 15번으로 적었다. 최종 공소사실과 차이가 너무 크다.
그런데 그 15번 밀입북 시기 진술서와 거의 완전히 일치하는 기록이 있다. 바로 유우성씨의 대한민국 출입국기록이다. 유우성씨가 한국에 온 이후 출국한 시기는 총 16번인데, 유가려씨가 이중 15번을 정확히 알고 밀입북한 시기라고 진술한 것이다.
유우성씨가 탈북해 한국에 온 시기는 2004년이다. 아무리 동생이라고 하더라도, 10년 가까이 떨어져 산 오빠의 한국 출입국 시기를 년도는 물론 날짜까지 줄줄 읊었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어렵다. 결국 유가려씨가 무언가 보고 그대로 옮겨 적었다고 보는 것이 가장 자연스럽다. 합신센터에 수용됐던 그와 접촉이 가능했던 사람은 국정원 수사관들밖에 없다.
[의문점 ②] 북한→중국 이주도 무시한 진술같은 날짜(2012년 11월 20일) 다른 진술서에서 유가려씨는 "(오빠 유우성씨가) 2012년 1월 말 (북한의) 회령에 들어와 음력설을 보내고 중국으로 나갔다가 재차 다시 회령에 들어왔다 중국으로 나간 사실이 있다"고 하면서 두만강을 몰래 건너가는 장면을 묘사하기도 했다. 12월 2일 진술서에서도 유우성씨가 그해 10월 24일 회령 집으로 찾아와 하룻밤을 자고 다음날 오빠와 자신이 두만강을 건너 중국으로 갔다는 내용이 있다.
그러나 이 진술은 그 자체로 성립되지 않는 내용이다. 당시 북한 회령에는 유씨의 집이 없었다. 유가려씨와 부친은 이보다 앞선 2011년 7월 북한에서 이사를 나와 중국 옌지에 살고 있었다.
단순한 착각일까? 유가려씨의 진술은 모두 불과 몇 개월 전의 일이라며 했던 말이다. 또한 북한에서 중국으로의 이주는 시기를 혼동할 만큼 사소한 일이라고 보기도 힘들다. 게다가 만약 사실일 경우 매우 중요한 이 진술은 최종 공소사실에서 싹 빠져버렸다. 이 시기 유우성씨는 탈북 청년들이 무료로 참가했던 태국여행 프로그램에 단체로 참가중이어서 간단히 알리바이가 증명되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결국 유가려씨의 이 진술은 유우성씨의 출입국 기록에 맞춰진 '맞춤형 진술'이었다는 의심이 들 수밖에 없다.
[의문점 ③] 너무 확확 바뀌는 보위부 포섭 시기
이뿐 아니다. '밀입북한 오빠가 북한 보위부에 붙잡힌 뒤 조사를 받고 간첩으로 포섭된 시기'에 대한 유가려씨의 진술이 너무 자꾸, 크게 바뀐 점이 확인된다. 보위부 포섭 시기는 이번 사건에서 핵심 내용 중 하나다.
유가려씨는 2012년 11월 21일 진술서에서 이 시기를 '2008년 1월 말'이라고 했다. 그런데 6일 뒤인 11월 27일 진술서에서는 '2007년 8월 중순'으로 바뀌었다. 한겨울에서 한여름으로 5개월 앞당겨진 것이다. 이후 약 보름 뒤인 12월 15일자 진술서에서는 다시 '2006년 5월 28일 경'으로 1년 3개월이나 앞당겨졌다. 이젠 봄이다.
보위부 포섭 시기가 두차례나 연도를 넘나들어 바뀌는 것도 이상하지만, 유우성씨의 행적과 비교해보면 점점 알리바이 입증이 쉽지 않은 방향으로 이동한 흔적을 엿볼 수 있다.
'2008년 1월 말'은 유씨가 영국으로 어학연수를 떠난 때다. '2007년 8월 중순'은 유씨가 북경사범대 교환학생으로 연수를 하기 위해 북경에 가 있었을 때다. 모두 상대적으로 알리바이 입증이 수월하다. 하지만 마지막 시기로 선택된 '2006년 5월 28일 경'은 좀 다르다. 이때 유우성씨는 수두를 앓아 베이징과 장춘 등지에서 치료를 받았다고 주장했지만, 바깥 활동이 적었던 때라 다른 두 시기에 비해 알리바이 입증이 쉽지 않다.
유가려 "수사관이 '이때 이때가 밀입북 가능성 높다'고 했다"자신의 친오빠가 간첩이라는 내용의 유가려씨의 증언은 이런 식으로 '진화'했다. 공소사실과 부합하는 마지막 매끄러운 진술서를 넘어서, 그 과정에서 나온 26건의 유가려씨 진술을 면밀히 살펴보면,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힘든 내용과 뒤죽박죽 진술이 섞여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왜 그랬을까?
유가려씨는 1심 재판과정에서 증인으로 출석해 "대머리 수사관(그는 자신을 조사했던 국정원 수사관의 이름을 알지 못했다. 그래서 법정에서 이렇게 불렀다.)이 흰 종이에 2007, 2008, 2012를 써놓고 '이때 이때 이때 오빠가 북한에 들어갔다 나왔을 가능성이 높다'고 설명했다"고 증언한 바 있다. 또 "우리(국정원)가 유도하는 대로 진술하지 않으면 오빠도 교화(징역) 간다고 계속 주입했다, 자신들이 원하는 대답이 안 나오면 마지막까지 진술을 받으려 했다"고 증언했다.
1심 재판부는 유가려씨의 진술이 객관적 사실과 다른 부분이 많다며 유우성씨의 간첩 혐의에 대해 무죄를 선고했지만, 유가려씨에 대한 국정원의 강압이나 가혹행위 가능성은 인정하지 않았다.
그러나 유우성씨와 변호인들은 여전히 수사관들의 강압수사 때문에 허위자백할 수밖에 없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지난 12일 기자회견에서도 유우성씨는 "동생이 합신센터에서 수사를 받는 동안 '회령 화교 유가려'라고 쓴 종이를 앞뒤에 붙이고 다른 탈북자들 앞에 세워서 공개 망신을 줬다"고 주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