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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주의 어느 '가맥'집
전주의 어느 '가맥'집 ⓒ 송준호

술에 얼큰하게 취한 두 사내가 골목길을 걷는다. 그중 하나가 담배를 사려고 근처 구멍가게로 들어간다. 주인 아주머니가 담배를 꺼내는 사이 그는 음료수 냉장고에 들어 있는 맥주병을 발견한다. 마침 가게 한쪽에 낡은 테이블 하나와 등받이 없는 의자 서너 개가 놓여 있는 게 보인다.

그는 담뱃값을 치르다 말고 주인 아주머니에게 "저 냉장고에 있는 맥주를 몇 병 꺼내다가 여기서 마시고 가도 되느냐"고 묻는다. 수더분하게 생긴 그 아주머니, 얼마든지 그러시라고 답한다. 그는 밖에 서 있는 친구를 구멍가게 안으로 불러들인다.

그 사이 아주머니는 부엌에서 맥주잔 두 개를 씻어다가 탁자에 내놓는다. 한 친구는 음료수 냉장고에서 맥주 두 병을 직접 꺼내오고, 다른 친구는 가게에 진열된 새우깡 한 봉지를 집어온다. 즉석에서 맥주상이 차려진다. 맥주 한잔 마시기에는 조금도 부족함이 없다.

'딱 한 잔'만 하기로 했는데 테이블 밑에는 어느새 빈 맥주병이 이열 횡대로 여덟 병이나 서 있다. 술을 맛나게 마시다 보니 이번에는 진열대 한쪽에 누워 있는 오징어가 들어온다. 입맛이 동한다. 맥주 안주로는 그만이라는 걸 잘 알기 때문이다. 아주머니에게 오징어를 구워 달라고 부탁하자 연탄불에 노릇노릇 구워진 오징어와 고추장을 내온다.  

한국인 직성에 딱 어울리는 '가맥'

'가맥'('가게 맥주'를 줄여서 부르는 말)은 그렇게 시작됐다. 다음날, 혹은 그 며칠 뒤 구멍가게에서 오붓하게 마셨던 맥주 맛을 잊지 못한 아까의 두 친구가 다른 친구 두어 명을 더 데리고 그 구멍가게를 다시 찾게 됐다. 그게 입소문이 나면서 구멍가게마다 맥주 테이블을 하나씩 두 개씩 더 들여놓고, 새우깡뿐 아니라 별도의 안주까지 내오기 시작하면서 '가맥'은 '막걸리 집'과 더불어 '음식문화 창의도시' 전라북도 전주시를 대표하는 술집으로 자리를 잡았다.

'가맥'의 장점은 뭐니뭐니해도 맥줏값이 싸다는 것이다. '가맥'의 맥줏값은 호프집은 물론이고 일반 식당에서 파는 것보다 저렴하다. 작은 병맥주 하나씩 손에 쥐면 친구와 함께 한두 시간 대화를 나누는 데 부족함이 없는 유럽인들과 달리 우리는 빈 맥주병의 수를 세어가면서 마셔야 직성이 풀린다. 주머니 사정이 넉넉지 못한 대학생들이나 서민들에게 '가맥'은 그런 '직성'에 딱 어울리는 맥주집인 것이다.

'가맥'에 가면 특유의 안주를 맛볼 수 있다. 대표 안주로 꼽을 수 있는 게 북어와 갑오징어 그리고 계란말이다. 북어는 버터나 치즈 같은 걸 발라서 바삭하고 고소하게 구워서 내놓는다. 한때는 '가맥'마다 그 집 바깥주인이 쇠망치로 갑오징어를 두드리는 소리가 끊일 날이 없었다. 온갖 야채를 다져 넣어서 만들어낸 계란말이는 안주인의 손맛을 직접 가늠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다.

전주의 어느 '가맥'은 북어와 갑오징어를 찍어먹는 '장맛' 하나로 성업을 이룬 대표적인 경우로 꼽힌다. 물엿과 한약재를 비롯한 각종 재료를 넣고 달인 간장에 청양고추를 썰어넣고 그 위에 마요네즈를 듬뿍 얹은 장맛을 이제는 대부분의 '가맥'에서 맛볼 수 있다. 

진짜 '가맥'을 구별하는 방법

요즘 '가맥'은 '기업화'돼 옛날의 정감을 찾기 어렵다. 진열대에서 함부로 집어다가 봉지를 부욱 뜯어서 술안주로 먹었던 새우깡이나 오징어땅콩도 자취를 감춘 지 오래다. 스프에 생라면을 찍어서 안주로 곁들여 먹고 싶으면 근처 편의점에 가서 직접 사와야 한다. 그걸 곱지 않은 시선으로 바라보는 주인도 더러 있으므로 경계를 게을리 해서는 안 된다.

'가맥', 그 이름이 '과메기'처럼 들리는 이들이라면 전주에 갈 때 한 번쯤 들러서 시원한 얼음 맥주를 마셔보길 권한다. 대신 한 가지는 알아두는 게 좋다.

'무슨무슨 가맥'이라는 상호를 내세우는 가맥은 대부분 '짝퉁'이다.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가맥은 '가맥'이라는 말조차 들먹이지 않는다. 위 사진처럼 '슈퍼'가 붙어서 영락없이 옛날의 구멍가게처럼 보여야 진짜 '가맥'이다.


#가맥#가게 맥주#전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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