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상회담, 바쁜 다자회의 중 간략하게 할 것"
일본 아베 정부에 대한 강경 대응 등 외교·안보 분야에 대한 호평으로 60%가까운 지지도를 유지해 온 박근혜 대통령이 시험대에 서게 됐다.
그동안 아베 일본 총리와의 정상회담을 거부해 왔으나 24∼25일에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리는 핵안보정상회의 자리에서 한·미·일 3국정상회담(이하 3자 정상회담) 형태로 아베 총리와 마주 앉게 된 것이다.
- 우리 정부는 헤이그 핵안보정상회의 계기에 미국이 주최하는 한미일 3국 정상회담에 참석하기로 하였으며, 회담시 북핵 및 핵비확산 문제에 관해 의견 교환을 가질 예정임.-한편 우리 정부는 일본 정부와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문제 관련 국장급 회의를 개최하기 위한 협의를 진행 중에 있음.외교부가 21일 오후 대변인 명의로 낸 3자 정상회담 개최 발표문이다.
정상회담을 청와대가 아닌 외교부에서 발표한 것은 전례가 없는 일이다. 이번 헤이그 핵안보정상회의 중에 한·중정상회담을 한다는 내용도 청와대 주철기 외교안보수석이 발표했다.
결국 원하지 않았던 한·미·일 정상회담의 격을 낮추기 위해 청와대가 아니라 외교부에 발표를 맡긴 것으로 해석된다.
정확한 정상회담 날짜와 장소를 한·미·일 3국이 조율중인 가운데 정상회담 소요시간에 대해서도 외교부측은 "바쁜 다자회의 중이기 때문에 간략하게 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박근혜 정부가 이번 회담에 응한 것은 미국의 압박 때문이다.
존 케리 미국 국무장관은 지난 2월 중순 한국을 방문해 "역사 문제를 뒤로 하고 미래지향적 관계가 필요하다"며 일본과의 관계 개선을 강조했고, 오바마 정부 1기 시절 외교·안보 정책을 이끈 톰 도닐런 전 백악관 국가안보 보좌관도 이달 초 한 세미나에서 노골적으로 "박 대통령과 아베 총리가 핵안보정상회의에서 만나길 기대한다"고 주문했다.
핵심 대외정책으로 '아시아로의 귀환'을 내건 오바마 행정부는 중국 견제를 위해 한·미·일 3각 동맹의 복원·강화를 강하게 추구해 왔다. 그러나 아베 총리 등장 이후 한일관계가 악화되자, 한일 양국에 지속적인 관계개선을 요구해 왔고 관계개선의 한 기회로 이번 핵안보정상회의 자리를 이용한 것이다.
정상회담 발표문에 '위안부 관련 국장급 회의' 넣어
우크라이나 사태도 큰 영향을 미쳤다. 미국은 G7과 유럽연합(EU)이 모이는 이번 핵안보 정상회의를 크림반도를 합병한 러시아를 비난하는 무대로 활용하겠다는 생각이다. 그런 미국으로서는 한·미·일이 정상회담에서 같은 의견을 내기를 원하고 있다.
일본도 이번 한·미·일 정상회담을 강력히 원했다. 아베 정권의 우경화를 기정사실화하는 무대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한·미·일 정상회담 개최 발표 이후 아베 총리는 "잘 됐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일본 언론들도 "아베 총리와 박 대통령에게는 취임 후 첫 공식 회담으로, 북핵 문제 등 세 나라 공동의 과제를 중심으로 의견을 교환할 전망이며, 일한관계 개선으로 이어질지 주목된다"(NHK), "미국 정부가 주도해서 타진했으며, 일한관계 악화를 방치할 경우 북핵 문제가 심각해지는 상황에서 안보상의 우려가 커진다는 견해가 강해졌기 때문"(니혼게이자이 인터넷판)이라는 등 환영하는 분위기다.
반면, 적극적인 반일 행보를 보여온 박근혜 정부로서는 곤혹스런 상황이다. 얻는 것 없이 미국과 일본에 이용만 당할 수 있는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아베 총리가 일본 제국주의 시절 과거사를 인정하고 반성하는 '무라야마 담화'와 '고노 담화'를 계승하고, 초등학교 사회과 교과서 검증발표를 미루겠다는 것 외에 별다른 변화가 없는 상황에서, 최고 지도자 간 만남이 성사되는 모양새만 만들어줄 수 있다.
외교부 발표문에도 이런 궁색한 고민이 그대로 드러난다. 한·미·일 정상회담 의제가 아닌 위안부 문제와 관련해 "우리 정부는 일본 정부와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문제 관련 국장급 회의를 개최하기 위한 협의를 진행 중에 있음"이라고 집어넣은 것이다.
외교부 고위 당국자는 이와 관련해 "우리 정부가 올바른 역사인식을 바탕으로 한일관계를 안정적으로 발전시켜 나간다는 기조를 확고하게 유지해 온 결과 아베 총리가 지난 14일 무라야마 담화를 포함한 역대 내각의 역사인식을 계승하고, 고노 담화도 수정하지 않겠다는 진전된 입장 표명이 있었다고 생각한다"며 "최근 일본 정부는 우리의 위안부 피해자 문제를 위한 국장급 회의 개최 요구에 성실하게 응하겠다는 답변을 해왔다"고 말했다.
결국 아베 정부가 이런 일련의 움직임을 보였기 때문에 3자 정상회담에 응했다는 것이다.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진정성 있는 행동이 없으면 정상회담을 하지 않겠다는 그동안의 정부 입장과 달리 왜 정상회담을 하느냐'는 비판에 대한 답변인 셈이다.
하지만 정상회담 발표문에까지 넣은 '국장급 회의'는 개최가 확정된 것도 아니고, 개최된다고 해도 처음 있는 일도 아니다. 국장급 회의에서 일본이 이전 입장을 번복할지도 미지수다.
만약 이번 3자 정상회담 이후에 아베 정부가 과거사 왜곡과 우경화의 수위를 높이고 나온다면, 미국의 압박으로 아베 총리와 마주 앉은 박근혜 대통령에게는 악몽같은 상황이 될 수밖에 없다.
정상회담 이후 아베 정부가 과거사 왜곡 수위 높이면?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도 참석하는 핵안보정상회의에서 북핵 문제를 주제로 한·미·일 3국만 정상회담을 한다는 점도 우리로서는 부담이다.
이 때문에 외교부 고위 당국자는 "그간 한중 양국 정상은 계기별로 별도 회동을 하면서 친분과 신뢰를 쌓은 만큼 금번 정상회담에서도 '전략적 협력 동반자 관계' 내실화 방안과 한반도 정세 등에 대해 유익한 의견교환이 이뤄질 것으로 기대한다"고 각별히 강조하기도 했다.
헤이그에서의 적극적인 반 러시아 행보 역시 우리로서는 탐탁지 않은 대목이다. 전반적으로 자칫하면 네덜란드에 이어 방문하는 독일에서 발표할 예정인 '통일 독트린'의 빛이 바래질 수도 있는 상황이다.
이 때문에 정부는 한·미·일 정상회담 의제를 핵 문제에만 집중한다는 계획이다. 외교부 고위 당국자는 한·미·일 정상회담에서 "일본의 역사인식 문제도 거론되느냐"는 질문에 "그건 아니다"라고 선을 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