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철의 사진집 <가부키초>는 16년의 세월을 두고 일본 도쿄 신주쿠 가부키초의 구석구석에서 끈질긴 생명력으로 살아가는 인간 군상들을 숙성시켜 드러낸다. <가부키초>는 아시아 최대의 환락가라는 가부키초의 욕망의 장치들을 보여주기보다는 욕망이 드러내는 거대한 사회상을 기록하고 있다.
이 사진집에는 화려한 네온의 이면에서 살아가고 있는 인간들의 희로애락이 담겨 있다. 권력에 대한 냉정한 감시와 고발이 있고, 인간에 대한 따스한 애정이 숨쉰다. 오늘도 욕망의 바다를 바라만 보지 않고 바다에 뛰어들어 거친 파도와 싸우는 사진가 권철을 사진집 <가부키초>에서 만난다.
일본 신주쿠 구에 있는 가부키초는 어스름이 찾아들 무렵 꿈틀대기 시작한다. 어둠이 잦아들고 화려한 네온이 하나둘씩 밝혀지면서 온갖 칼라로 장식된 가부키초의 거리와 건물들은 생명을 얻는다. 일본 최첨단의 환락의 장치와 공간들, 그리고 사람들이 살아 숨 쉬고 있는 곳, 가부키초. 또한 인간의 가장 원초적인 욕망이 날개를 펴는 곳이기도 하다.
가부키초에는 호객꾼, 호스티스, 호스트, 야쿠자, 경찰, 취객들, 노숙자들, 그리고 향락의 공간을 찾는 여고생, 대학생, 관광객 등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이 서로 자신의 찾고자 하는 욕망을 발견하기 위해 거리를 헤메인다. 권철은 이 군상들의 움틀거리는 욕망의 방황을 찾는 탐사자이자 저널리스트다.
때론 경찰보다 빨리 현장에 도착해 촬영
가부키초는 긴박한 사건의 현장이다. 권철은 아시아 최대의 환락가 가부키초에서 사건을 기다린다. 언제 어느 곳에서 일어날지 모르는 돌발 상황에 대비하기 위해 그는 거리 구석구석을 돌아다니기도 하고, 건물 계단에 걸터앉아 잠깐의 휴식을 취하기도 한다. 때론 가부키초를 담아왔던 동료 사진가들과 때론 혼자서 돌발 상황을 기다린다. 식당에서 식사를 하다가도, 집에서 잠을 자다가도 사건사고의 소리가 들려오는 곳으로 그의 카메라는 달려간다.
조직 간의 총격 사건, 여성을 향한 묻지마 폭행 사건, 무전취식자 체포 현장, 취재 구타 사건, 마약상 도주 장면, 취객 소매치기 현장, 조직 간 패싸움, 경찰의 단속 현장 등 가부키초에서 일어나는 모든 사건은 권철이 카메라를 가지고 담아야 하는 현장이다. 때론 길을 걷자다가 마주치기도 하고, 때론 엠블란스 소리에 반응하기도 하고, 때론 가부키초의 동료들이 제보를 해주기도 한다.
동물적으로 사건을 감지하는 순간 그는 달려가 현장을 장악하고 사진을 찍는다. 때론 경찰의 출동보다도 빠르게 현장에 도착해 촬영을 한다. 거칠고 투박할 수도 있는 이미지들은 사건 현장의 여과 없는 투영이다. 폭력이 무질서하게 난무하고 피범벅이 된 얼굴들, 구급차의 사이렌 소리, 경찰들의 무미건조한 얼굴들, 호객꾼들의 치기 어린 웃음, 마약상의 필사의 도주 등 그의 사진에는 박진감이 넘치는 영화 같은 실제의 장면들이 생생하게 담긴다.
그의 사진은 정서적으로 정제되어 있지 않다. 거칠고 투박하고 피가 철철 넘친다. 하지만 그의 사진에는 무질서한 공간에서도 본질을 탐구하는 날카로운 혜안이 담겨 있다. 아름답고 정서적인 사진에서는 결코 볼 수 없는 본질을 직시하는 돌직구의 힘이 날아온다.
카메라를 통해 인권이 살아 있음을 확인하는 남자
사건사고의 현장에 있지만, 그리고 그 모습들을 담지만, 평범한 사람들에게는 무질서한 무법지대로 보이지만, 그에게 가부키초의 날 모습은 완벽한 조화이다. 숨길 수 없는 인간의 속내가 그대로 드러나 있으면서도 서로가 조화로운 삶을 영위하고 있기 때문이다.
권철의 사진은 가부키초에서 생활하는 사람들의 투박한 일상을, 거친 사건을 담아내지만 대상에 대한 인간의 정을 결코 포기하지 않는다. 가부키초는 험난한 사건사고의 현장이지만 그곳에는 인간이 살고 있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는 권력의 무자비한 폭력을 거부한다. 무전취식하는 노숙자를 검거하는 현장에서 그의 카메라는 웃으면서 노숙자를 제압하는 경찰을 고발한다. '가진 것이 없는 자들은 저렇게 아무렇게나 다루어도 좋은가'를 자문하면서 인권의 감시자가 되고자 자신을 드러낸다. 권력의 폭력을 고발하고 인권이 살아 있음을 그는 카메라를 통해 확인하는 것이다.
전쟁의 폐허 속에서 재생의 움직임이 만들어낸 가부키초. 권철은 가부키초의 역사를 탐구하고 기록하고 미래를 조망한다. 가부키의 극장을 만들어 문화의 공간과 유흥의 공간을 함께 하고자 설계했던 지역 유지들의 꿈을 읽는다. 하지만 그들의 꿈과는 달리 가부키초는 일본, 아니 아시아 최대의 환락가가 되었다. 빼곡이 들어선 건물의 공간에는 음식점과 술집, 클럽들이 빈틈없이 메우고 있다. 최첨단 풍속 산업의 기법들과 장소들이 시대의 변화를 넘어 가부키초에서 부침한다.
가부키초의 중심에 자리잡고 있던 코마극장은 가부키초의 역사이다. 일본의 대형 가수들이 공연하는 날이면 코마극장 앞은 북새통을 이룬다. 코마극장을 돌아 긴 행렬이 만들어진다. 코마극장을 권철이 가부키초 촬영의 원점으로 여기는 곳이다. 가부키초를 촬영하는 날이면 언제나 이곳에서 주변을 돌아보고 시작하는 출발점이기도 하다.
엔카의 전당 코마극장은 세워질 당시 최신식의 극장이었다. 엔카 공연은 물론 뮤지컬이, 화려한 쇼가 공연되면서 많은 관객들을 엔터테인먼트의 세계로 불러들였다. 도쿄를 찾는 단체 관광객들의 메카였다. 이제는 시대를 따라가지 못하고 쇄락한 코마극장은 문을 닫았고, 호텔과 극장이 들어서 초대형 건물이 신축되고 있다. 하지만 그 거리는 이제 중국의 단체관광객이 자리를 대신하고 있다.
이질적인 모습들이 함께 숨쉬고 있는 공간 '가부키초'
권철은 코마극장의 화려함에만 주목하지 않는다. 그는 화려함의 뒤에서 일상을 살아가는 상가의 사람들, 극장 앞 광장에서 술에 취해 펼치는 퍼포먼스들, 안방을 차지하듯 거리에 주저 앉아노니는 젊은 여성들, 밤이 되면 종이박스를 들고 잠자리를 찾아 모여드는 노숙자들의 고단한 삶을 기록한다.
그의 사진은 결코 에두르는 법이 없다. 정면에서 돌격한다. 코마극장 앞의 눈내리는 길을 걷는 여고생들의 감성적 사진에서도 치열한 삶의 공간을 읽는다. 가부키초에서 살아가는 새로운 세대들의 성장에도 관심을 기울인다. 상가 주인의 손자는 안정된 삶 속에서 이질적인 공간을 신기하게 관찰한다.
하지만 노숙인 모녀의 삶은 격차사회 일본의 적나라한 부조리를 드러내고 있다. 자본주의의 냉혹한 현실을 사는 소녀는 그래도 웃음을 잃지 않는다. 권철은 다가오는 노숙 소녀에게 조심스레 반응하면서 그의 삶을 담담하게 담는다. 냉혹한 현실을 비웃는 듯한 노숙 소녀의 해맑은 미소를 담는 권철의 카메라는 일본 격차사회의 비극을 고발한다.
코마극장 앞 광장을 찾는 다양한 사람들의 기념사진 같은 단체 사진들에서도 시절의 변화와 시대의 흐름을 읽는다. 지금은 거의 사라진 야만바 그룹, 산타클로스, 할로윈 축제에 참여한 어른과 아이들, 모임을 마친 대학생들의 활기찬 미소들 속에서 소박한 인간의 삶을 투영한다.
하지만 어둡고 쇄락한 가부키초의 모습을 바꾸고자 몸부림치는 사람들의 이야기도 있다. 의도적으로 가부키초의 모습을 변화시키려고 디자인하는 관청의 모습을 읽기도 한다.
어쩌면 전혀 관계가 없는 이질적인 모습들이 함께 숨쉬고 있는 공간이 가부키초다. 권철은 굳이 주장하지 않는다. 권철의 사진들은 이질적인 모습들이 서로를 보듬으면서 하나의 완벽한 조화를 이루어 코마공간의 역사를, 가부키초의 역사를 보여준다.
날것을 그대로 정면에서 보여주는 권철의 돌직구
가부키초는 권력의 가식적인 퍼모먼스가 맨얼굴을 드러내는 곳이기도 하다. 도쿄도는 폭력과 섹스산업의 혼돈을 탁색시키고자 '정화작전'을 시작한다. 권철은 이시하라 신타로 도쿄도 지사가, 관방장관 시절의 아베 신조가 '정화작전'의 현장을 방문하는 퍼포먼스를 조롱한다. 이시하라나 아베가 출입기자단을 대거 대동하고 가부키초의 거리를 살펴보지만 그들이 떠난 거리는 바로 일상으로 돌아간다.
경찰은 불법 체류자, 불법 도박장, 불법 호스트바 등을 단속한다는 정보를 기자들에게 현장에 몰려들게 한다. 단속의 현장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서 영업을 재개한다. 가부키초의 다양한 불법의 현장은 경찰과 '악어와 악어새'의 관계로 공생한다. 근원적인 문제의 해결이 아니라 표피적으로 눈가리고 아웅하는 식이다. 범죄와의 전쟁이 아니라 단지 월급쟁이로 살아가고 있는 경찰의 모습을 기록하면서 권철은 권력의 무사안일을 고발한다.
권철의 사진은 단지 공간의 표피나 일상을 담는 것에 그치지 않고, 사회적인 메시지를 던진다. 저널리즘이라는 기초를 되내이기 때문이다. 그가 주목하는 것은 단순히 눈길을 끄는 공간, 건물, 인간이 아니라 현장이 담고 있는 사건의 본질이고 내면 탐구이다. 장식하지 않고 가공하지 않고 날것을 그대로 정면에서 보여준다. 돌직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