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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젠 말할 수 있다... 사실 행복하지 않았다고

난 그 시절 행복하다고 생각했다. 순간마다. 사실 그것이 자기최면이라는 걸 알면서 매일 행복하다고 생각했다. 아직 살지도 않은 내일도 행복할 것이라고 미리 결론 내려놓고 내일을 살곤 했다. 왜 그렇게 행복을 갈구했는지. 왜 그랬어야 했는지.

내가 호들갑스러워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난 객지에서 아이 둘 낳아 키우는 게 너무 버거웠다. 남들은 내게 '어쩜 그렇게 에너지가 넘치느냐'고, '참 보기 좋다'고 치켜세웠지만 직장생활과 병행하는 결혼·출산·육아는 나의 몸과 영혼을 갉아 먹는 것 같았다.

그때 지친 내 곁에 있던 선배들은 하나같이 "그때가 좋은 거야, 그게 행복인 거야"라고 말했다. 또 "그때는 그게 행복인지 몰랐지만 시간이 지나고 나니 그게 행복이었다는 것을 알게 됐어"라고. 행복인지 몰랐는데 알고 보니 행복이었다고? 순간 행복인지 모르고 사는 게 어리석게 느껴졌다.

그럼 난 아직 그들이 말한 과정 중에 있으니 '이것이 행복이다'라고 단정 지어버리면 되겠다. 그럼 나중에 후회를 덜 하겠지? 겨우 서른 즈음이었는데 어떻게 그런 판단을 했는지 모르겠다. 그래서 수없이 되뇐 말.

"난 행복하다. 난 행복하다. 지금이 행복한 순간이다."

몽펠리에
▲ 고기잡는 어부는 없고 캠핑생활자만 많았던 바닷가 마을 몽펠리에
ⓒ 이성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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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그때의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저 몇몇 장면과 느낌이 기억난다. 저녁, 큰아이 손을 잡고 아이스크림 사 먹으러 우리가 걷던 길. 아이는 광장에서 뛰어놀라 하고 언니와 커피를 마시며 수다를 떨던 어느 날 저녁 하늘 풍경.

퇴근하며 곧장 김밥과 물을 사서 오산천으로 갔던 어느 날, 난 돗자리를 깔고 앉았고 아이들은 주인 따라 산책 나온 강아지를 쫓아다녔지. 그런 두 아이를 피곤한 눈으로 바라봤었던 것 같아. 그러다 배가 고프면 셋이 둘러앉아 사온 김밥을 먹고 집으로 다시 퇴근하던 어느 날 서글펐던 기억.

몽펠리에의 기억이 딱 그와 같다. 행복했다고 단정했지만 기억하고 싶지는 않은 곳. 가려고 했던 곳이 절대 아니었다. 절대.

우리가 가고자 하는 따뜻한 남쪽을 위해 어쩔 수 없이 머무르게 됐던 곳. 겨우 두 번째 캠핑장이었던 이곳은 다섯 달 동안의 모든 여행지와 숙박을 통틀어 정말 잊고 싶은 곳이었다. 심리적으로 너무나 피폐해져 일기로도 기록을 남기지 않았다. 남편의 휴대전화에 저장된 사진을 보고서야 그곳이 몽펠리에였음을 알았다. 맞다. 바닷가였어.

#2. 하필 왜 비까지 왔는지

느낌 아니까.
▲ 한낮의 어두운 날씨. 앞으로 펼쳐질 우리의 미래 느낌 아니까.
ⓒ 이성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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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본격적인 캠핑의 시작점은 프랑스가 아니었다. 프랑스는 단지 자동차를 빌리고 장비를 구입하기 위한 목적 지향의 장소일 뿐이었다. 혹 마음이 통하는 현지인을 만났다거나 저녁마다 저절로 행복해지는 훈풍이 불었다면 우리의 마음이 열리고 몸이 움직였을 수 있었겠지.

만약 그랬다면 계획한 일정을 살짝 바꿨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공기·바람·사람을 아우르는 프랑스 만물 모든 것은 우리의 계획에 찬성표를 보내는 듯 우리를 남쪽으로 내몰았다.

오래 이동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아이들이 멀미를 한다. 번갈아가며 멀미를 하는데 한동안은 기분이 착잡해 우린 조용히 마음을 추슬러야 했다. 남편은 운전만 했고 참새처럼 조잘대던 나는 입을 굳게 닫는다.

입맛에 맞는 걸 먹이지도 못했는데 아이들이 자꾸 쏟아내니 '미쳤다고 저 어린 것들 비행기 태워 이곳까지 끌고 나왔나'라는 죄책감마저 든다. 그러나 다행인 것은 그리 오래 지나지 않아 이 문제를 담담하게 받아들이기로 했다는 것. 그 해결책으로 여러 개의 반찬통을 준비했다. 물론 모두가 예상하는 그 용도이다. 

국도를 따라 흐르는 론강의 수량과 유속에 감탄하며 몽펠리에를 향해 내려오는데 비까지 온다. 그래도 반대 차선에 비해 차가 밀리지 않아 다행이다. 토하고 잠들었던 아이들이 깨어나니 우리도 내비게이션에 찍힌 목적지까지 거의 도착했다. 다행히 론강 캠핑장지기 피터가 준 책에 캠핑장의 주소가 있었다.

자동차에 장착된 내비게이션은 주소 중 우편번호를 찍으면 대충 그 동네를 가르쳐준다. 그러면 주변을 돌며 눈을 씻고 목적지를 찾아낸다. 현재 우리가 익힌 최선의 방법이다. 디지털 방식과 아날로그의 결합인 셈이다. 그래도 이런 낯선 곳에서는 디지털 방식으로 길 찾기를 하고 싶다. 하루속히.

집들은 누런 빛깔 단층이다. 바다는 흐린 회색인데 파도가 일지 않는다. 이상하다. 삼면이 바닷가인 대한민국 어느 한 면도 닮지 않았다. 너무나 낯선 바닷가 마을 풍경이다. 비가 추적추적 온 날이라 그런지 골목에는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는다.

사람이 사는 곳이긴 한 건지…. 평범한 마을처럼 보이는 곳에 캠핑장이 두 곳이나 있는 것도 내 상식을 넘어선다. 한 곳은 별이 두 개, 한 곳은 세 개. 담 넘어 들여다보니 특별히 달라 보이지도 않는다. 그래도 별이 세 개인 쪽이 잔디도 푸르고 들어앉은 캠핑카 수도 적다. 그나마 더 쾌적해 보인다.

"와, 그래도 사람들 많은가봐." 

캠핑장에 들어서니 입구는 열려 있고 직원은 이미 퇴근했다. 오후 5시 30분까지 도착했어야 했는데 조금 지났더니 퇴근했다는 쪽지만 붙여놓고는 사람이 없다. 그때 남편이 "어쩌지? 어댑터 빌려야 하는데?"라고 한다. 전기를 쓰려면 캠핑장 콘센트에 맞는 어댑터가 있어야 하는데 우린 미처 구입하지 못했다. 론강에서는 피터가 흔쾌히 빌려줬다. 이번에도 일찍 도착해 사무실에서 또 빌려보자고 했지만, 낭패다. 을씨년스럽게 비 오는 날에 전기담요까지 쓸 수 없다니 짜증과 함께 막막함이 올라온다.

오랜 시간 동안 차에 갇혀 있던 아이들은 내리자마자 줄넘기를 꺼내 들었다. 빗발은 약하지만 멈추지 않는다. 나도 바람 좀 쐴 겸 한 바퀴 둘러봤다. 그런데 여기 이상해도 너무 이상하다.

첫 캠핑장은 네덜란드 사람들이 끌고 내려온 최신형의 깔끔한 캠핑카만 있었는데, 이곳은 캠핑카는 거의 없고 캐러밴만 여러 개다. 캐러밴의 특성상 캐러밴을 끌 승용차가 나란히 있어야 하는데 승용차도 거의 없다. 캐러밴마다 대부분 회색톤의 천막이 쳐져 있다. 내가 쓰지 않으니 뭐라고 하는지도 모르겠다. 타프라고 해야 하나? 거의 업소 차양막처럼 튼튼해 보인다. 여하튼 하루 이틀 머무는 사람들이 아닌 것 같다.

수돗가 쪽엔 사람의 기척이 느껴지는 1인 텐트 두 개가 설치돼 있다. 옆에는 자전거가 놓여있다. 지독한 자전거 여행가. 지금은 집을 비웠다. 어디 간 건지. 잔디밭에 비가 자작자작 찼는데 어떻게 잠을 잘까 싶다.

하필 추적추적 내리는 비는 강인한 자전거 여행자의 보금자리를 더 궁색하고 처량하게 만들어 버렸다. 그 옆에는 나의 시아주버님께서 20년 전 캠핑을 하려고 구입하셨다가 딱 한 번 쓰시고 우리에게 넘겼던 텐트의 디자인과 흡사한 게 있다. 줄을 아주 단단하게 묶고 비닐까지 이중으로 쳤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천년만년 이곳에서 살 기세다. 이곳에서 산다? 이곳에서 사나? 이곳에서 사나 보다.

저 뒤에 보이는 풍경이 바로 캠핑 생활자들의 집.
▲ 별 세 개짜리 캠핑장이시다. 저 뒤에 보이는 풍경이 바로 캠핑 생활자들의 집.
ⓒ 이성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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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캠핑생활자가 낭만적이라고? 전설의 고향일세

사람들이 이곳에 정착해 사는 것 같다는 느낌이 강해졌다. 그 무렵 밥때가 가까워졌다. 남자는 약하지만 아버지는 강하다. 남편은 캠핑장을 휘젓고 다니며 누군가 빼가지 않은 어댑터를 하나 구해왔다. 콘센트함은 모두 열려 있는지 전기를 우리 텐트까지 끌어왔다. 관리가 잘되는 캠핑장은 캠핑 사이트를 배정받은 후에야 콘센트함을 열어준다. 그런데 이곳은 관리가 덜 되니 직원이 콘센트함을 닫지 않았나 보다. 천만다행이다.

여하튼 나는 끌어온 전기로 밥을 지어먹고 설거지를 하러 갔다. 피터와 농약통을 진 씩씩한 그녀가 관리하던 론강 옆 캠핑장에 비하면 이곳은 정말 너무 하다. 하늘에서 내려와 캠핑장 입구에 박혀 있는, 빛을 잃은 저 별이 대체 뭐라고 개수대며 샤워장의 사소한 페인트칠마저 내 마음을 만신창이로 만든다. 그래도 먹고 살아야 하니 설거지란 것을 하고 있는데…, 그때. 꿀꺽.

내 곁으로 사람이 온다. 할아버지. 아직 밤도 아닌데 회색빛 목욕 가운 같은 것을 입고 설거지통을 들고 오신다. 캠핑에 어울리지 않는 설거지통이다. 산뜻한 색상, 적당한 크기. 저것은 캠핑을 위한 살림살이가 아니다. 그냥 살림을 위한 살림살이다. 저들은 캠핑 생활자인 것이다.

얼마나 이곳에 오래 머무르는지는 모르겠으나, 과연 자신들의 명의로 된 번듯한 집이 프랑스 도심 어딘가에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여하튼 이곳에서 오래도록 머무르는 사람들이다. 비 오는 날 이렇게 후미지고 후진 캠핑장에서 만나서 그런지 너무 가난해 보인다.

얼굴은 왜 그리 창백해 보이는지. 꼭 좀비 같다. 나는 눈인사를 했지만 그가 나에게 눈인사를 했던지는 기억이 나질 않는다. 이곳엔 그 흔하고 지겨운 '봉슈아'도 없다. 창백한 얼굴에 검버섯만 있다. 아앙…, 무섭다.

불편함에 대해 그다지 징징대지 않는 편이지만 나는 그날 밤 남편을 닦달했다. 내일 당장 떠나자고. 너무나 무섭다고. 이 핏빛도 기력도 없는 할머니·할아버지들을 노상강도 취급하며 남편에게 텐트 지퍼에 자물쇠를 달자고 했다. 남편의 대답은 역시 깔끔하다.

"야, 물건이나 돈을 빼앗을 것 같으면 칼로 텐트를 찢으면 되지."

헉, 자물쇠도 필요 없다니. 이 허술한 천 쪼가리가 집이라고 믿었던 내가 바보다.

아이들은 피곤해서 골아 떨어졌다. 이만한 온기도 감사해야 할 것인데. 난 공포영화 시나리오 한 편을 쓰다가 잠이 들었다. 시나리오 들어볼 텐가? 액션!

그는 이 시기가 되면 일자리를 찾아 몽펠리에 바닷가까지 기어들어오지. 젊어서 변변한 일자리도 없었고 얼마간 모아두었던 돈도 도박·사기·여자로 모두 털렸고. 이렇게라도 지역을 옮겨가며 캠핑생활자로 일을 하면 그래도 명은 유지할 수 있으니까.

오늘 밤 그는 얼마 안 되는 하루 일급으로 술을 마시고 밤이 늦어서 캠핑장에 들어오겠지. "어라, 못 보던 텐트가 있네. 어라, 여기선 보기 힘든 새 차도 있네. 더 이상 떨어질 바닥도 없는데 돈이나 벌어볼까? 텐트를 찢어야겠어. 칼. 칼이 어딨지?"

커트! 아함. 졸리다.

#4. 정신적 에너지 고갈... 캠핑 중단

호들갑스럽지 않고 지극히 합리적인 남편의 말대로 나도 그들처럼 캠핑생활자가 돼 2박을 했다. 아직 빗물이 마르지 않은 텐트를 접는데도 떠난다는 사실에 기분은 매우 보송보송하다.

"여보, 앞으로 별 세 개 이상. 되도록 4개 이상 가자."

그 반찬통을 또 준비하고 남쪽을 향해 운전을 시작했다. 점심때가 지나 별이 네 개인 캠핑장에 들어섰다. 관리가 잘 되고 있는 곳 같다. 사무실에 가서 설명을 들으니 이곳은 텐트장과 방갈로가 반반이란다.

방갈로의 반은 대여, 반은 주인이 있는 별장이란다. 그런데 주중이라 그런지 아무도 텐트를 치지 않았다. 우리도 덩달아 치고 싶지 않다. 더구나 풀 한 포기도 없는 흙바닥에 치고 싶지 않다. 쓸데없는 나의 사치심 발동. 가격으로 따지면 텐트장 사용료에 비해 두 배나 비싼 방갈로에 묵기로 했다.

별 네 개짜리 캠핑장의 방갈로.
▲ 한적한 캠핑장으로 숨어들었어. 별 네 개짜리 캠핑장의 방갈로.
ⓒ 이성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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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보, 우리 그냥 방갈로에서 묵자."

물론 대의명분은 '김치 만들기 미션 완수'였다. 낯선 재료에 한국산 고춧가루만 넣고 만들려면 거의 실험에 가까운 작업이 될 텐데 이왕이면 부엌이 있는 방갈로가 좋겠다고 했던 것이다. 그러나 사실 몸과 마음이 너무 피폐해져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가방에서 꺼내 던지면 2분 동안이면 완성되는 원터치 텐트지만 손가락 하나도 까딱하고 싶지 않다.

방 두 개짜리 방갈로는 좁았다. 나와 남편은 말을 아낀 채 각자 생각이 많았던 것 같고, 아이들은 아무도 없는 놀이터에서 흙을 만지작거리며 놀았다. 남편과 난 머릿속 추상적 개념으로만 있던 '유럽' '캠핑'이란 낱말을 마음과 몸으로 치열하게 받아들여야만 했다. 받아들이는 과정은 쉽지 않았다. 은둔자처럼 숨어들어 조용히 숨만 쉬었다. 생각이 깊다. 우리는 이 여행을 계속 할 수 있을까.

햇빛이 지독하게 강렬해서 그랬는지, 인기척이 전혀 없어서 그랬는지는 몰라도 정말 무료했다. 무료할 쯤 옆 방갈로의 주인이 휴가를 왔다. 주인은 이곳에서 두 시간 거리에 있는 중소도시에 거주하는 건축가 부부. 결혼 20년 차 부부지만 둘 다 매력적이다.

그들이 방갈로를 보수하는 모습을 가끔 훔쳐보다가 눈이 맞으면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지만 그래도 심심하다. 양배추와 단무지 무를 사다가 김치 비슷한 걸 담그고 나니 또 심심해졌다. 무료함에 질식당할 것만 같다.

그래도 얼마 지나지 않아 에너지 충전 완료!

"시동 걸어. 뛰쳐나가!"

햇볕은 얼마나 따갑던지
▲ 사방에 빈 방갈로와 짙푸른 나무들 햇볕은 얼마나 따갑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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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재미가 덜하다.
▲ 그네도 미끄럼틀도 다 아이들 차지다. 그래서 재미가 덜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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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중 비수기의 적막함.
▲ 둘이서 이러고 논다. 주중 비수기의 적막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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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리씨네 여행기 입니다.



태그:#유럽캠핑, #리씨네 여행기, #맞벌이 가족 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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