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밭과 논을 갈던 쟁기와 탈곡기
▲ 산촌마을의 농기구 밭과 논을 갈던 쟁기와 탈곡기
ⓒ 정덕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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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지방자치단체들에 의해 유행처럼 회자되는 말이 있다. '활로'와 '스토리텔링'이다.
활로(活路)는 말 그대로 살길을 찾는 것이고, 스토리텔링은 우리말로 표현하면 이야기꺼리를 나누는 것 정도로 해석 가능하다. 스토리텔링(Storytelling)이 왜 급속도록 최근 자치단체들에 의해 회자되는가 하는 문제는 각 자치단체들의 사활이 걸렸기 때문이란 걸 누구라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그런 작업을 위해 투자되는 막대한 비용을 쓰지 않으면 남을 것 아니냐는 단순한 논리로 현상에 대한 해답을 찾는 건 불가능하다. 절약이 능사가 아니다. 막대한 비용을 치르고라도 사람들을 끌어들일 문화를 만들어야 할 이유는 분명하다. 이야기가 될 '꺼리'를 만들어야 미래에 대해 큰 기대는 불가능 하더라도 최소한 살 길은 모색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무언가 재주가 좋고 잘 하는 사람을 '꾼'이라 한다. 지게질을 잘 해도 지게꾼이요, 소리를 잘 하는 이는 소리꾼이라 했다. 마찬가지로 이야기를 잘 하면 이야기꾼이나 재담꾼이라 한다. '쟁이'와는 비슷하지만 품위가 조금 격상된 우리말이 바로 이 '꾼'이다.

이야기꾼이 이야기를 하는 걸 스토리텔링이라 보면 맞다. 그러니 스토리텔링 만들기를 하겠다는 말들은 의미가 잘못되었다. 먼저 스토리를 만들고 스토리텔링을 하면 되는 것이 맞는 이야기다.

사람의 이야기거나 마을에 전하는 이야기 모두 스토리텔링의 소재다. 거리에서 발생했던 사건, 혹은 그 거리에 얽힌 삶의 편린들이 모여 줄거리가 있는 이야기가 되고 그걸 또 다른 누군가에게 생동감 있게 전달하는 행동이 바로 스토리텔링이다.

사진을 촬영하고 글을 쓰니 다양한 경로로 초청을 받아 여러 곳을 다녀왔다. 더러는 이미 있는 이야기를 널리 알리기 위해 부르고, 더러 새로운 길을 모색하기 위해 조언을 구하거나 이야기를 좀 더 구체화시키려는 의도로 부른 경우도 있다. 산촌을 찾았을 때 냉정한 시각으로 내가 보고 느낀 부분들에 대해 이야기를 했다.

"한 시대를 고정시켜 마을을 만들면 이야기가 저절로 만들어질 것 아니가 싶습니다. 70년대의 모습이면 70년대로 맞춰 마을을 유지하는 방법과 같이 말입니다. 그러면 드라마나 영화를 촬영하는 이들이 먼저 찾을 걸로 보입니다."

단순하게 설명하며 시골마을 어디랄 거 없이 대체로 70~80년대 풍경을 그대로 간직한 상태로 방치되어 있다. 흙벽은 더 이상 손길이 가지 않은 탓에 허물어진 그대로, 디딜방아는 돌확은 누군가 인테리어 소품으로 가져가고 흔적도 없는 상태로 말이다.

오색1리 마을엔 오래전부터 '장군바위'란 이름으로 불리는 바위가 하나 있다. 그 바위가 있는 마을 이름을 오래전부터 백암리(白巖里)로 불렀다. 흰 돌이 있어서였겠으나 마을 이름으로 명명 될 정도로 눈에 띄는 흰 돌은 보질 못했다. 언제부터 백암리로 불렸는지도 유추불가능하다. 그러나 큰물이 나가고 바위들에 낀 이끼가 모두 걷힌 상태에서 마을에 흔한 바위들이 하얗게 보여 그리 불렀을 수도 있지 않았을까 싶다.

'오색'이란 지명도 이곳에 오색나무가 있어 그리 불렸고, '관터(관대:官臺)'란 지명도 관청이 자리했던 곳에 형성된 마을이라 붙여진 이름이니 그에 합당한 사연은 분명 있을 것이다.

여기에서 이 마을에 얽힌 유래만 제대로 밝혀도 이야기는 된다. 그러나 그만으로 많은 이들에게 감동을 주기는 쉽지 않다. 조금 더 입에 착착 감기고,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재료가 필요하다.

오색1리 백암마을의 장군바위
▲ 장군바위 오색1리 백암마을의 장군바위
ⓒ 정덕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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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암마을을 휘돌아 흐르는 냇물 건너편 산봉우리 하나를 형성하고 있는 장군바위에 얽혀서는 백암리에 장군발자국이 찍힌 돌이 있었다고 한다. 최근까지 그 돌이 마을 초입에 있었으나 집터를 닦으며 파묻었는지 알 길이 없다고 한다. 그걸 소재로 이야기 하나 만들면 좋겠다는 어르신들께 말씀을 드리길 "먼저 장군발자국이 찍힌 돌부터 찾아야겠습니다. 이야기는 그 다음 문제고요. 1977년 늦가을 오색에서 유현목 감독이 '옛날 옛 적에 훠어이 훠어이'란 영화를 제작하셨는데 그 내용도 위기에 처한 이들을 살리기 위해 장군이 왔다가 떠나는 줄거리로 기억합니다. 그걸 함께 엮으면 좋은데 장군바위는 있어도 그게 그냥 바위 형상만을 놓고 불리는 경우와, 발자국이 찍힌 바위가 있는 경우는 전혀 전달되는 느낌이 다를 것으로 보입니다"라 했다.

최소한 찾지는 못 하더라도 찾는 시늉이라도 해야 이야기는 살아난다. 찾아지면 제대로 위치를 밝혀 사람들이 찾을 수 있게 만들고, 찾지 못 하면 못한 그대로 찾으려 노력하는 모습이라도 사람들에게 보여주어야 이야기는 제대로 구성된다.

이야기를 만드는 목적 자체가 마을을 지속적으로 유지할 수 있는 길을 찾으려는 방편이다. 역사와 진실에 근거하고, 현지 지형과 지리적 여건 등을 최대한 활용해 이야기가 구성되어야 감동이 큰 법이다. 특정인 한 사람의 머리로 만들어진 창작물이 아닌, 구전되어진 연유부터 제대로 살펴 밝힐 일이다.

이 봄 가장 기억에 남는 시(詩) 한 편을 말 하라면 주저 없이 소월 김정식 선생의 '진달래'를 말한다.

진달래가 아주 깊이 있고 좋은 시라서가 아니라 우리의 정서 속 고향에 대한 풍경과 연모의 정을 사람마다 간직하고 살기에 시가 지닌 연모와 그리움의 화면을 자신의 추억과 대입시킨 까닭이다.

하물며 진달래 온 산천에 활활 불꽃을 지핀 이 봄날임에야 누구라 진달래를 가장 기억에 남는 시라 답하지 않으랴.

가장 익숙한 겨레의 음률에 실려 읊조려지는 진달래에 한 지명이 나온다. 참으로 애석하게도 이곳 설악의 한 마을도, 평안북도의 한 마을이다보니 우리가 쉽게 갈 수 있는 곳도 아니지만 누구나 그 시를 통해 영변의 약산에 핀 진달래를 그려본다.

소월 김정식 선생의 시 진달래가 떠 올려지는 만개한 바위산의 진달래
▲ 진달래 소월 김정식 선생의 시 진달래가 떠 올려지는 만개한 바위산의 진달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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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달래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말없이 고이 보내 드리우리다

영변에 약산
진달래꽃
아름 따다 가실 길에 뿌리우리다

가시는 걸음 걸음
놓인 그 꽃을
사뿐히 즈려밟고 가시옵소서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우리다
<소월 김정식/진달래 -매문사. 1924>

시 한 편도 스토리텔링의 주요한 자원이 된다. 물론 그 시를 지은 이가 살다간 터전도 자원이다. 봉평이 가을이면 먼지 풀풀 나는 드팀장마당마냥 들썩거리는 이유도, 가산 이효석 선생의 '메밀꽃 필 무렵'의 주요 무대이기도 하거니와 선생께서 그곳에서 나고 살으신 까닭 아닌가.

마을이나 각 자치단체들이 앞 다퉈 미래를 위한 활로 찾기에 스토리텔링을 구성하고자 하는 이유는 단순하고 명료하다. 바로 이런 문화적 자원이 다른 여타 자원보다 더 큰 영향력을 발휘한다는 점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알곡을 빻고 떡쌀을 찢던 디딜방아
▲ 디딜방아 알곡을 빻고 떡쌀을 찢던 디딜방아
ⓒ 정덕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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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무형의 문화자원은 누가 거저 주는 것이 아니다. 거듭 노력하고 삶을 소중히 여길 줄 아는 지혜로운 안목을 지녔을 때 찾아지는 법이고, 이와 같은 미래의 풍요를 보장하는 자원이 우리 주변에 이미 존재함을 깨달을 수 있다. 디딜방아 하나도 소중히 여겨 지키지 못하고, 돌담을 허물고 콘크리트로 담장을 세우는 안목으로야 어림없는 노릇 아니겠는가.

아이들과 지게를 지고 나무를 마련해 아궁이에 부모와 함께 불을 지피는 여행을 생각해보자. 아궁이에 불이 들면 밥솥에 어느새 허연 김이 오른다. 숯불 끌어내 아궁이 앞에 자글거리며 된장찌개가 끓고, 석쇠에 자반 한 손 구우면 입맛 절로 다셔진다.

이런 여행문화를 먼저 선택할 줄 아는 것도 미래를 제대로 열어가는 안목이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http://www.drspark.net/의 한사 정덕수 칼럼에 동시 기재됩니다.



태그:#스토리텔링, #활로찾기, #오색리, #디딜방아, #장군바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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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이 보고, 많이 듣고, 더 많이 느끼고, 그보다 더 많이 생각한 다음 이제 행동하라. 시인은 진실을 말하고 실천할 때 명예로운 것이다. 진실이 아닌 꾸며진 말과 진실로 향한 행동이 아니라면 시인이란 이름은 부끄러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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