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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곡성읍사무소 앞에 놓인 쌀 항아리. 곡성읍청년회에서 어려운 이웃들이 아무 때라도 쌀을 담아갈 수 있도록 내놓은 것이다.
곡성읍사무소 앞에 놓인 쌀 항아리. 곡성읍청년회에서 어려운 이웃들이 아무 때라도 쌀을 담아갈 수 있도록 내놓은 것이다. ⓒ 이돈삼

지난 3월 말, 섬진강변에 흐드러진 매화와 지리산 자락을 샛노랗게 물들인 산수유를 보고 오는 길이었다. 곡성읍사무소 앞을 지나는데 항아리 하나가 놓여있다. 순간 무엇에 쓰는 물건인가 싶었는데, 바로 위에 '나눔의 쌀 항아리'라고 적혀 있다. 그 밑에는 '쌀이 없어 식사를 제대로 하지 못하는 분들께서는 마음껏 담아 가세요'라고 씌어 있다.

'효의 고장'으로 알려진 심청고을과 잘 어우러지는 항아리였다. 때마침 읍사무소에서 조기현(43) 곡성읍청년회장을 만났다. 나눔의 쌀 항아리를 설치하고 관리하는 곳이 곡성읍청년회다. 자연스레 쌀 항아리에 대한 얘기를 나눌 수 있었다.

"회원들의 의견을 모았어요. 우리 지역의 어려운 이웃을 위해 무엇을 할까 고민하던 중에요. 쌀 항아리를 놓자는 얘기였죠. 읍장님과 총무계장님하고도 상의를 했는데. 다들 좋은 일이라고 하면서 읍사무소도 동참하겠다고 하시더라고요."

조 회장이 밝힌 나눔의 쌀 항아리 설치 배경이었다. 설치 장소도 회원들의 의견을 들어 읍사무소 앞에다 했다.

 쌀 항아리에 적혀 있는 안내판. 현대판 '타인능해'와 맥이 닿는다.
쌀 항아리에 적혀 있는 안내판. 현대판 '타인능해'와 맥이 닿는다. ⓒ 이돈삼

 항아리에 담긴 쌀. 아무나 담아갈 수 있도록 바가지가 놓여 있다.
항아리에 담긴 쌀. 아무나 담아갈 수 있도록 바가지가 놓여 있다. ⓒ 이돈삼

"솔직히 우려도 있었어요. 만의 하나, 누가 못된 짓이라도 하면 어쩌냐는 거죠. 쌀 항아리에 좋지 않은 약품을 넣는다거나, 이물질을 넣으면…. 술에 취한 사람이 행패를 부릴 수도 있을 것 같고. 또 어린 학생들이 쌀을 가져다가 팔아 술이나 담배를 살 수도 있지 않을까 싶었죠. 결론은 우리 군민들을 믿기로 했습니다."

조 회장의 말에서 회원들의 고민이 느껴졌다. 남들이 보기에 별 것 아닌 항아리일지라도 허투루 놓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청년회원들이 읍사무소 앞에 '나눔의 쌀 항아리'를 설치한 게 지난 3월11일. 아직 한 달이 채 안됐다. 그 동안 쌀을 어떤 사람들이, 얼마나 가져갔는지 궁금했다.

"누가 가져가는지 확인하지는 않았어요. 주변 사람들의 얘기를 들어보면 저녁에 주로 가져간다고 하더라고요. 낮에 담아가는 사람도 있고요. 대체로 가져갈 만한 분들이 가져간다고 하던데요. 쌀을 항아리에 가득 채우면 40㎏들이 한 포대 반 정도 들어가는데. 하루에 절반에서 3분의 2 가량 없어지는 것 같습니다."

조 회장의 말이다.

쌀 항아리를 읍사무소 안에다 놔두지 않고 밖에 내놓은 것도 쌀을 가져가는 사람들의 자존심까지 생각한 회원들의 배려였다. 다른 사람의 눈을 의식하지 않고 쌀이 필요하면 밤낮 아무 때라도 가져가라는 의미에서다. 마음 씀씀이가 예쁘다.

 조기현 곡성읍청년회장과 안태영 곡성읍장. '나눔의 쌀 항아리'를 놓고 운영하는 주역이다.
조기현 곡성읍청년회장과 안태영 곡성읍장. '나눔의 쌀 항아리'를 놓고 운영하는 주역이다. ⓒ 이돈삼

'나눔의 쌀 항아리'가 등장하면서 어려운 이웃들만 좋아하는 게 아니다. 읍내 분위기도 훈훈해졌다. 쌀 항아리를 보는 사람들의 가슴도 따뜻해졌다. 짧은 시간 쌀 항아리는 군민들의 칭찬을 받으며 회자됐다. 어려운 이웃을 위해 쌀을 내놓겠다는 사람도 줄을 잇고 있다. 읍사무소 한쪽에 주민들이 가져다 놓은 쌀 포대가 차곡차곡 쌓일 정도다.

"며칠 전 이장회의 때 쌀 항아리를 소개했거든요. 쌀을 필요로 하는 주민들이 있으면 적극적으로 알려서 언제든지 담아 가라고요. 그랬더니 이장님들이 홍보는 당연한 것이고, 너도나도 쌀을 내놓겠다고 하더라고요. 나눔의 쌀 항아리가 우리 읍의 자랑이고 자부심이 되는 것 같습니다. 정말 뿌듯하더라고요. 항아리가 주민들을 하나로 묶어주는 보물단지가 된 것 같아요."

조 회장과의 대화를 듣고 있던 안태영 곡성읍장의 얘기였다. 안 읍장은 "누구나 쌀을 기부하고 또 쌀이 필요한 저소득층 주민들이 언제라도 가져갈 수 있도록 청년회원들과 함께 나눔 캠페인을 지속적으로 벌여나갈 것"이라고 덧붙였다.

 조기현 곡성읍청년회장과 양광래 회원이 쌀 항아리에 쌀을 쏟아 붓고 있다.
조기현 곡성읍청년회장과 양광래 회원이 쌀 항아리에 쌀을 쏟아 붓고 있다. ⓒ 이돈삼

 항아리와 쌀. 곡성읍사무소에 놓인 쌀독이다.
항아리와 쌀. 곡성읍사무소에 놓인 쌀독이다. ⓒ 이돈삼

그 사이 조 회장이 읍사무소 밖에 있던 쌀 항아리를 보고 오더니 쌀 포대 하나를 메고 나간다. 항아리에 쌀이 조금밖에 남지 않았다는 것이다. 읍사무소에서 일을 보고 있던 청년회원(양광래·39)이 함께 거든다.

쌀 포대를 풀고 항아리에 쌀을 쏟아 붓는 조 회장의 얼굴이 환하다. 흐뭇한 표정이다. 쌀 항아리에 훈훈한 이웃사랑이 수북이 쌓이는 것 같아 보는 이의 마음도 따뜻해진다.

"갈수록 사정이 어렵잖아요. 경제도 어렵고, 인심도 팍팍해지고요. 그래도 이 쌀 항아리는 바닥이 드러나지 않도록 항상 가득 채워놓을 생각입니다. 야박한 세상이라지만 이 쌀을 담아가는 사람들에게 아직 살맛나는 세상이라는 걸 이야기하고 싶어요. 우리 모두 마음 풀어놓고 서로 믿고 기대며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조 회장의 바람이다.

그의 말에서 나누고 배려하며 더불어 살려는 마음이 묻어난다. 이웃을 돌보면서 느끼는 행복도 배어있다. 배를 곯는 이웃들에게 쌀을 나눠줘 밥을 짓도록 한 고택 운조루(雲鳥樓)의 옛 주인 류이주(1726∼1797)의 나눔과 배려·상생 정신과도 서로 통하는 것 같다.

 나눔의 쌀 항아리가 놓인 곡성읍사무소. 누구나 쌀이 필요한 사람이 가져갈 수 있도록 읍사무소 밖에 항아리를 내놓고 있다.
나눔의 쌀 항아리가 놓인 곡성읍사무소. 누구나 쌀이 필요한 사람이 가져갈 수 있도록 읍사무소 밖에 항아리를 내놓고 있다. ⓒ 이돈삼



#타인능해#조기현#곡성읍청년회#쌀독#곡성읍사무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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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찰이 일상이고, 일상이 해찰인 삶을 살고 있습니다. 전남도청에서 홍보 업무를 맡고 있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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