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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단은 건강보험 재정의 선량한 관리자로 흡연을 예방하고 재정 누수를 방지할 책무가 있다.'

공단검진 안내 팸플릿에서 본 건강보험공단의 담배소송을 홍보하는 문구이다. 재정 누수를 방지할 책무. 왠지 낯설지 않는 이 문구는 얼마 전 참석하였던 업무상질병판정위원회에서 들었던 말을 떠올리게 하였다.

흔히들 '질판위'라 줄여서 말하는 업무상질병 판정위원회는 근로복지공단에서 2008년 7월부터 설치한 업무상 질병에 대한 심의 및 판정위원회를 말한다. 직업환경의학 전공의인 나는 얼마 전 업무상 질병 판정위원인 선생님을 따라 서울지역 업무상 질병판정위원회에 배석하여 참관할 기회가 있었다.

질판위의 산재 불인정 이유, 의사인 내가 보기엔...

 10여건을 짧은 시간 내에 처리하려니 후반부엔 아주 짧은 논의만 하고 바로 표결로 이루어져, 나중에는 위원회가 거수기에 불과하다는 느낌마저 들었다.
10여건을 짧은 시간 내에 처리하려니 후반부엔 아주 짧은 논의만 하고 바로 표결로 이루어져, 나중에는 위원회가 거수기에 불과하다는 느낌마저 들었다. ⓒ freeimages

질병판정위원회가 열리는 회의실에 들어서니 위원장을 비롯한 6인의 업무상 질병 판정위원이 회의용 원탁의자에 앉아 있었다. 나의 자리인 참관석에 앉으니 오늘 심의할 안건 자료가 올려져 있다. 10여건의 심의안건이 상정되어 있고, 상병명을 보니 오늘은 근골격계질환만 심의하는 것으로 보인다.

첫 안건은 양쪽 수지(손가락)의 레이노증후군이다. 진동 폭로력이 확인되었고, 레이노 스캔에서도 양성으로 나타나 어렵지 않게 산재승인을 받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레이노 스캔을 한쪽만 했으니, 한쪽 손에 대해서만 산재를 인정해야 한다는 이야기가 나왔고, 결국 표결에서 한쪽에 대해서만 '부분인정'하는 것으로 결정이 되었다.

레이노증후군은 대개 양쪽으로 오는 질환으로, 실제 임상진료에서도 양쪽 다 증상이 있더라도 한쪽만 레이노 스캔을 해서 양쪽 레이노증후군으로 진단하는 프로토콜(one-hand protocol)을 따른다. 그런데 진료를 보는 것이 아니라 보상을 위한 것이니 누가 봐도 인정할 수 있는 객관적인 자료에 토대를 해야 한다며 '부분인정'이라 했다.

계속하여 상정된 안건들의 심의과정을 참관하였지만, 논의와 결과가 충분히 연계되지 못하여 과연 전문성이 있는 결론을 내는 것인지 하는 의문이 있었다. 업무관련성이 확실하여 '인정'된 안건도 있었으나, 불인정되는 사례도 적지 않았다.

불인정되는 사례 중 논의 과정에서 반대의견이 없었지만, 표결에 붙인 결과 '불인정'되는 경우도 있었고, 업무관련성은 인정되나 상병명이 업무내용과 달라 '불인정'되는 경우, 심지어는 상병명을 잘못 적어서 '불인정' 되는 경우도 있었다.

10여건을 짧은 시간 내에 처리하려니 후반부엔 아주 짧은 논의만 하고 바로 표결을 진행해 나중에는 위원회가 거수기에 불과하다는 느낌마저 들었다. 안건들이 다 처리된 이후 위원장은 "우리는 의학적이고 과학적·객관적으로 판단하여 산재보험 재정이 부당하게 누수 되는 것을 막을 책무가 있다"는 발언으로 마무리 하였다.

그 말을 지금에 와서 다시 떠올리니 담배소송 홍보문구처럼 '질병판정위원회는 산재보험 재정의 선량한 관리자로 근로자의 도덕적 해이를 예방하고 재정 누수를 방지할 책무가 있다'는 말로 들린다.

산재노동자의 선량한 건강관리자의 역할을 기대하며

앞서 얘기했듯이 업무상질병 판정위원회는 업무상질병에 대한 판정의 공정성 및 전문성을 높이기 위한 개선책으로 신설된 판정위원회이다. 하지만 업무상 질병판정위원회가 신설된 이후 2008년 이후 근골격계질환 및 뇌심혈관질환의 업무상질병 산재승인율이 급격히 감소하였다.

물론 단순히 업무상질병판정위원회 때문에 산재 승인율이 감소하였다고 얘기하는 것에는 무리가 있을 수 있다. 오히려 업무상질병 인정기준의 변화, 업무상 질병 신청의 증가 등이 산재 승인율 감소의 주된 원인일 수 있다.

하지만 객관성과 전문성이라는 말을 사용하지만, 일관되지 않고 통상 의학 및 과학적인 기준보다 보수적으로, 그리고 표결에 의한 불인정, 불승인을 계속하는 것은 산재 신청인 당사자들에게는 개선책이 아니라, 오히려 개악책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런 판정위원회가 산재를 신청한 노동자들에게 필요한 기구일까? 업무상질병 판정위원회가 산재보험 재정의 선량한 관리자가 아닌, 산재노동자의 선량한 건강관리자의 역할을 기대하는 것은 힘든 것일까? 질병판정위원회를 빠져나오면서 우리의 과제에 대해 다시금 생각하게 되었다.

덧붙이는 글 | - 글쓴이 곽경민은 한림대학교 직업환경의학전공의입니다.
- 이 글은 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 월간 <일터>에 실린 기사를 다듬은 것입니다.



#직업환경의학의#업무상 질병#질판위#산업재해#노동안전보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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