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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포작도 항공 사진 대포작도-소포작도-어의도 순으로 보인다. (신안군청 제공)
대포작도 항공 사진대포작도-소포작도-어의도 순으로 보인다. (신안군청 제공) ⓒ 신안군청

대포작도 개요

'포작도'라는 이름이 생소하다. 섬의 생김새가 해산물을 보자기에 싸는 모양이라 하여 보작도, 또는 '포작도(包作島)'라 했다고 한다. 또 하나의 유래는 두 개의 섬이 나란히 위치하여 섬의 형태가 포알처럼 뾰족뾰족 나와 있어 그 중 큰 섬을 '대포작도', 작은 섬을 '소포작도'라 부르게 되었다고도 전해온다.

포작도는 육지인 지도읍 참도 선착장에서 약 500미터 떨어진 섬으로 면적 0.8㎢, 해안선 길이 3.2㎞, 인구는 10가구 17명이다. 이 섬에 처음 들어온 사람은 인동 장씨로 영광에 거주하다 조선의 연산군때 이곳으로 이주해오고, 수원 백씨가 철종 때에 들어와 마을이 형성되었다고 한다.

포작도 해변 포작도 이장님과 주민이 해변가를 산책하고 있다.
포작도 해변포작도 이장님과 주민이 해변가를 산책하고 있다. ⓒ 이재언

대포작도 둘러보기

지도읍 참도 선착장에서 바라본 대포작도는 높지 않고 나지막한 편안한 섬이다. 선착장을 중심으로 오른쪽에 길게 이어진 방조제가 보인다. 지도읍 참도와는 나룻배로 왕래한다. 좌우로 길게 형성된 갯벌. 선착장 가운데에 유난히 빛나는 하얀 집이 한 채 있다. 붉은 벽돌에 삼각형의 지붕만 하얀색인 대합실. 그 뒤로 철탑이 있고 여기서 길은 좌우로 갈린다.

참도에서 보는 섬의 전면 오른쪽으로 길게 방조제가 이어지고 그 안에는 농경지가 조성된 도로 옆에 저수지가 있다. 논에 공급되는 농경수가 갖춰져 있는 섬이다. 언덕 아래에 하얀 학교 건물이 보인다. 학교 운동장에는 잡초들이 무성하여 발 디딜 틈도 없고 교사는 화단의 향나무들로 가려져 있다. '지도북초등학교 포작분교장'인 이 학교는 1995년에 폐교되었다. 포작분교장의 모교인 '지도북초등학교'도 지금은 폐교된 상태다. 화단을 넘어가는 계단에는 오랜 인적의 끊어짐 때문인지 거미줄이 막고 있었다.

다른 섬들도 사정은 마찬가지겠지만 이 섬 역시 젊은이들이 하나같이 섬을 등지고 도시로 떠났다. 마을과 좀 떨어져 있는 언덕 위 폐교는 대포작도의 쓸쓸함을 더하는 것 같다. 다 망가진 창문을 통해 안을 들여다 보면 양쪽에 칠판과 게시판은 그대로인데 바닥은 다 헤집어져 있다. 천장도 무너질 듯한 상황. 교사 옆 사택건물 역시 폐가. 온갖 잡동사니로 가득하다.

안타까움이 밀려오는 폐교를 벗어나 마을로 가기 위해 언덕을 넘으니 개활지가 보인다. 그다지 높지 않은 언덕이라 넘어가는 길은 그리 험하지는 않다. 언덕을 넘어가면 바로 밭이고, 밭 사이는 마을로 가는 길이다. 이 섬에는 모두 10가구가 살고 있다. 사람이 사는 집보다 폐가가 더 많은 것은 다른 섬들과 사정이 다르지 않다. 빈 집에 쓸쓸히 익어가는 감나무, 무화과, 탱자가 외로이 집을 지키고 있었다. 올해도 저 과일들은 까치밥이 되고 말 것이다.

마을길은 오르막길이다. 경운기 한 대 정도 다닐 수 있는 시멘트길이 언덕 너머로 이어진다. 언덕을 넘어서면 저 멀리 또 다른 섬, 바로 소포작도가 보인다.

소포작도와 대포작도의 로둣길  이곳은 경운기가 자가용이다.
소포작도와 대포작도의 로둣길 이곳은 경운기가 자가용이다. ⓒ 이재언

이곳에서 바라본 소포작도의 북쪽지점은 논과 밭이 제법 많다. 섬의 면적이 0.76㎢인데 이 중 경지면적이 총면적의 40%인 0.3km²로 1가구가 농사에 종사하고 있다. 주요 농산물은 쌀, 보리, 콩, 마늘 등이다.

여기서 서쪽으로 보이는 섬이 '신풍도'와 '솔섬'이라는 무인도. 어느 정도 가면 방조제는 끝나고 시멘트로 포장된 해안도로가 이어진다. 섬 안에 3개의 방조제가 있는데 이곳 간척지에서 농사를 짓고 있다.

보릿고개를 넘기 어려웠던 시절에 대포작도 섬사람들의 생명을 지켜주었던 것은 갯벌뿐이었다. 갯벌을 막아서 농사를 지었고, 또 갯벌에서 소금을 얻으면서 삶을 영위했던 것이다. 지금도 대포작도 사람들은 그 갯벌을 간척한 농지에서 농사를 지어 쌀과 양파, 마늘을 수확하며 살고 있다.

1960년대 식량부족으로 허덕였던 이곳 주민들에게는 한 평의 땅이라도 만들어 농사를 지어야 살아나갈 수 있었던 절박한 상황에서 이곳의 간석지는 식량증산에 커다란 도움을 준 고마운 땅이었다. 대포작도는 모두 농사를 지으며 살아가는 작은 섬이지만, 경운기가 집집마다 두 대씩 있을 정도로 주민들이 농사에 전념하며 살고 있다.

물 때문에 고생이 많은 섬 최근에 바다를 통해 상수도가 들어왔다는 표지석
물 때문에 고생이 많은 섬최근에 바다를 통해 상수도가 들어왔다는 표지석 ⓒ 이재언

대포작도는 비록 육지와 가깝지만 모든 세상과 격리된 듯 문화적인 해택을 받지 못하고 있었다. 마을마다 있는 회관이나 경로당이 없어 너무 안쓰러웠다. 그리고 물 문제로 오랫동안 고통을 겪어왔다. 면적이 작은 섬일수록 지하수가 부족하고 또 저수지를 조성할 만한 여건을 갖추지 못한 곳이 섬이다. 이러한 환경으로 인해 도서주민들은 예로부터 빗물을 모아 생활용수로 사용하였으나, 최근에는 간이 상수도 보급과 해수 담수화 시설로 빗물이용은 점차 감소하고 있다. 

대포작도, 소포작도, 어의도는 소규모 도서로 해마다 물이 부족하여 큰 고생을 하는 섬에 속하였다. 집집마다 지붕에서 집수한 빗물을 지상 콘크리트 탱크에 저장하여 식수와 생활용수로 이용하고 있었다.

다행인 것은 2011년 12월에 지도읍 참도에서 대포작도, 소포작도, 어의도간 1.6㎞에 송수관을 연결하여 이제는 물 기근을 피할 수 있게 되었다는 점이다. 이 작은 섬주민들의 기본적인 삶을 보장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기 때문에 마을회관이나 경로당보다 우선순위로 물 문제를 해결해 준 것이다. 인구가 너무 적고 낙후된 섬마을이기 때문에 별다른 문화적인 혜택을 누리지 못하고 살아가는 이곳 섬주민에게 상수도 다음으로 회관 겸 경로당을 하나 지어주면 좋겠다는 바람이 절로 생겨나는 것이었다.

고기를 잡으러 가는 주민  이 분을 따라 갔다가 고기는 잡지 못하고 허탕만 치다.
고기를 잡으러 가는 주민 이 분을 따라 갔다가 고기는 잡지 못하고 허탕만 치다. ⓒ 이재언

오른쪽 해안에는 크지는 않지만 독살어업의 흔적이 보인다. 대포작도 앞바다에서 새우를 잡던 시절이 있었는데, 마을 앞터에서는 온통 새우를 말리는 데 정신이 없었다 한다. 당시에는 말린 새우 인기가 좋아서 염장을 하지 않고 말려서 목포에 내다 팔았다. 그때는 객선이 낙월도에서 출발하여 포작도를 거처 임자도 진리와 수도 그리고 내양, 자동, 선도, 고이도를 거쳐 목포에 도착하였다. 이 배로 목포의 도매상에 물건을 보냈다.

이곳 사람들이 아쉬워한 것은 지도와 무안 해제 사이에 흐르는 임치수로를 막아버린 것이었다. 그래서 거대한 탄도만은 오직 선도쪽으로만 물이 드나든다. 포작도와 가장 가까이 있는 이 수로에서 10여 척의 꽁댕이배가 새우와 각종 고기를 잡았다. 5톤 정도의 작은 배로 선장과 선원 두 명이 경제적으로 새우어장을 했는데, 그마저도 1980년쯤에 사라지고 말았다.  

덤장에서 고기를 잡는 주민  고기가 잘 잡히지 않지만 그래도 날마다 두번씩 가 본다
덤장에서 고기를 잡는 주민 고기가 잘 잡히지 않지만 그래도 날마다 두번씩 가 본다 ⓒ 이재언

마을 앞 덤장 포작도의 유일한 해산물이 나오는 덤장
마을 앞 덤장포작도의 유일한 해산물이 나오는 덤장 ⓒ 이재언

대포작도를 돌아보고 나오는 길에 신안군 농업협동조합장을 역임한 장환기(64) 선생을 만났다. 그 분은 조그만 이 섬에 최고 42호까지 살았던 시절을 회고하였다. 논 22.5h, 밭 15h 이지만, 이 근처 바다는 황금어장이어서 무동력선이 10여 척 있었다. 낙지, 새우, 부서, 오징어, 숭어 등이 많이 잡혀 어려웠던 60~70년대에도 대부분의 자녀들을 도시로 유학을 보낼 수 있어 다른 섬에 비해 대학 출신들이 많았다.

그러나 어족자원이 줄고, 어류 남획과 김양식을 하면서 과다하게 염산을 유출시켜 갯벌이 죽고, 낚지와 파래 생산량이 현저히 떨어지면서 1975년도부터 이도 현상이 두드러졌다고 한다. 특히 1974년 8월15일 문세광이 육영수 여사를 저격한 그날 저녁 해일로 말미암마 대포작도는 물론 신안군 전체의 간척지 둑이 무너지는 바람에 이도 현상을 부채질했다고 한다.

봄을 맞이하여 밭에서 풀을 매고 있는 할머니  하얀 고무신을 신고 밭에서 일하시는 전형적인 시골의 우리 어머니 모습
봄을 맞이하여 밭에서 풀을 매고 있는 할머니 하얀 고무신을 신고 밭에서 일하시는 전형적인 시골의 우리 어머니 모습 ⓒ 이재언

 달래를 채취하는 주민  서울에 가지고 갈 싱싱한 달래를 캐고 있는 모습
달래를 채취하는 주민 서울에 가지고 갈 싱싱한 달래를 캐고 있는 모습 ⓒ 이재언

더욱 안타까운 일은 물사정이 워낙 열악하여 각 가정에 빗물을 담는 시멘트 물 탱크를 정부에서 만들어 주기도 하였다. 우물 물을 페트병에 담아보면 3일 후에는 노르스름하게 변색되고, 염분의 유입으로 간간하다고 한다. 물이 수명과 어떠한 관계가 있어서인지 이곳 사람들은 보통 60세 전후에 세상을 떠났다. 즉 물 사정과 과중한 일, 술, 스트레스 등이 아닌가 한다. 대포작도는 이래저래 사연이 많은 섬이었다. 이 섬은 인물사와 생활사를 연구해 볼 만한 가치가 있는 역사적인 섬임이 틀림없다.

대포작도 지리

대포작도는 전라남도 신안군 지도읍에 딸린 섬으로 동경 126°12′, 북위 35°06′에 위치하며, 연 평균기온 14.1, 강수량 1,172mm. 면적 0.8㎢, 해안선 길이 3.2㎞, 10가구 17명이 거주한다. 목포에서 북서쪽으로 62㎞ 떨어진 해상에 있다. 남쪽으로 지도, 북쪽으로 소포작도․어의도와 마주한다.

대포작도 가는 길

참도에서 대포작도까지는 정기 나룻배가 하루 세 번씩 운행한다. 시간은 아침 9시, 오후 1시40분, 4시. 그 외에 차도선이 두 번 다닌다.

염소막  처음에는 소를 기르다가 소값 폭락으로 염소가 그 집을 차지하고 있다.
염소막 처음에는 소를 기르다가 소값 폭락으로 염소가 그 집을 차지하고 있다. ⓒ 이재언



#포작도 #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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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포대학교 도서문화연구원 연구원으로 2019년까지 10년간 활동, 2021년 10월 광운대학교 해양섬정보연구소 소장, 무인항공기 드론으로 섬을 촬영중이며 포털사이트 네이버의 재정 후원으로 전국의 유인 도서 총 447개를 세 번 순회 ‘한국의 섬’ 시리즈 13권을 집필했음, 네이버 지식백과에 이 내용이 들어있음, 지금은 '북한의 섬' 책 2권을 집필중

이 기자의 최신기사책 '북한의 섬'을 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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