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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월호 침몰 사고 희생자 고 임세희양의 아버지 임종호씨는 진도를 떠난 지 일주일 만인 1일 다시 돌아왔다. 인터뷰 내내 차분한 목소리로 이야기 하던 그는 딸의 이야기를 할 때면 눈물이 고였다.
세월호 침몰 사고 희생자 고 임세희양의 아버지 임종호씨는 진도를 떠난 지 일주일 만인 1일 다시 돌아왔다. 인터뷰 내내 차분한 목소리로 이야기 하던 그는 딸의 이야기를 할 때면 눈물이 고였다. ⓒ 남소연

그에게 딸은 분신과 같았다. 아빠의 흰머리를 염색해주고, 건조하다며 얼굴에 크림도 발라주던, 주말이면 엄마아빠에게 커피 한 잔을 타서 내밀 던 딸이다. 그의 딸, 안산 단원고등학교 2학년 9반 임세희양은 지난달 15일 수학여행을 떠났다가 돌아오지 못했다. 그가 딸을 다시 만나기까지는 꼬박 열흘이 걸렸다. 169번째 희생자였다. 그의 딸은 침몰한 배와 함께 차가운 바다에서 세상을 떠났고, 그는 분신을 잃었다.

지난 1일, 세월호 침몰 사고 희생자 고 임세희양의 아버지 임종호씨는 진도를 떠난 지 일주일 만에 다시 돌아왔다. 그가 돌아봐야 할 특별한 사람들이 있었다. 아직 가족을 찾지 못해 진도에 남아 있는 다른 실종자 가족들이다. 임씨는 이날 다른 단원고 유가족 170여 명과 함께 이날 진도 팽목항을 찾았다. 실종자 가족을 위로하고 구조작업 진행을 촉구하기 위해서다(관련기사 : "정부는 살인자... 아들, 딸 살려내라!").

몇몇 유가족들은 며칠 더 실종자 가족들 곁을 지키기로 했다. 임씨 역시 체육관에 남았다. 딸을 애타게 기다리며 잠도 제대로 잘 수 없었던 그곳에서 다시 생활하기로 한 것이다. <오마이뉴스>는 체육관 주변에 설치된 자원봉사단 급식소에서 그를 만났다.

"대통령 사진 지우다 딸 사진 날렸다"

안씨는 딸 세희양의 장례를 치른 지 채 일주일이 되지 않았고, 먼 길을 이동해 피곤한 모습이었다. 눈은 살짝 충혈됐고, 아랫입술은 퉁퉁 부어 있었다. 인터뷰 내내 차분한 목소리로 이야기 하던 그는 딸의 이야기를 할 때면 눈물이 고였다. 그러면서도 입에는 살짝 미소가 보였다. 그게 딸과의 기억을 떠올리며 흐뭇해하는 웃음인지, 아니면 울음을 참으려고 입술을 앙다물며 생겨난 표정인지는 알 수 없었다.

- 첫 질문을 무엇으로 드려야 할 지 고민이 많았습니다. 따님 이야기를 먼저 들어야 할 거 같습니다. 임세희양은 아버님께 어떤 딸이었습니까?
"세희는 저에게 정말 분신과도 같은 딸이었습니다. 어려서부터 속 한 번 썩인 적 없었어요. 너무 착했어요. 투정도 부리고 해달라는 거라도 있었으면 덜 가슴 아팠을 거예요. 뭐 가지고 싶다는 얘기를 안 했어요. 다른 애들이 인라인스케이트 타고 할 때도 사달라고 말을 전혀 안 했어요. 그래서 제가 스케이트 사준다고 해서 같이 타러 가니까 그제 탔어요. 넉넉한 형편이 아니었고, 그런 점을 생각했던 효녀였습니다.

살가운 성격은 아니었지만 제 염색도 항상 세희가 해줬어요. 또 아빠 얼굴 상한다고 얼굴에 팩도 해주고, 건조하다고 크림도 발라주는, 정말 소중한 딸이었습니다. 사진 찍는 건 싫어했어요. 아이들이 비행기를 한 번도 못 타서 지난 설 연휴에 일본으로 가족여행을 갔다 왔어요. 거기서 찍은 사진이 많았는데, 다 지워졌습니다. 사진 700여 장이 있었는데... 박근혜 대통령이 왔을 때 찍은 사진 지우려다 실수로 일본 가서 찍은 사진도 다 날렸어요. 지금 사진 복구를 맡긴 상탠데, 가슴이 아파요. 빨리 복구가 잘 됐으면 좋겠어요."

- 세희양 꿈은 뭐였나요?
"최근에 세희가 서울대 가서 화학과 강의도 듣고 왔어요. 나중에 화학과에 진학해 조향사(향수나 화장품 등에 들어가는 향료를 다루는 전문가)가 되고 싶어 했어요. 그래서 열심히 공부를 했어요. 학교, 집을 오가며 공부만 했죠. 형편이 넉넉지 않았는데, 안 해줘서 공부 못했다는 소리 듣기 싫어서, 하고 싶은 것은 다 해주겠다고 했어요. 과외도 해줬죠. 과외가 끝나면 밤 12시 반에 집에 와요. 학교와 집만 왔다 갔다 하며 공부만 했던 게 가장 가슴이 아픕니다. 놀고 싶어 했을 텐데..."

- 친구가 많았나요? 보통 고등학교 2학년이면 부모님과도 많이 싸울 나이 아닌가요?
"성격이 내성적이어서 친구들 많지는 않았습니다. 몇몇의 친구들도 이번에 다 사고를 당했어요. 세희가 다녔던 2학년 9반에서 생존한 친구가 2명밖에 없어요. 중학교 친구들이 있었는데, 장례식 때도 왔죠. 끝까지 있다가 울고 갔습니다. 그리고 세희는 특별한 사춘기가 없었어요. 철이 일찍 든 아이였죠. 부모에게 싫은 소리 해본 적 없었습니다."

물에 젖었을까 딸의 옷도 챙겨갔지만...

 세월호 침몰 사고 희생자 고 임세희양의 아버지 임종호씨가 1일 저녁 전남 진도 체육관 인근에서 <오마이뉴스>와 인터뷰를 마친뒤 돌아서고 있다. 아직 가족을 찾지 못해 진도에 남아 있는 다른 실종자 가족들을 돌보기 위해서다.
세월호 침몰 사고 희생자 고 임세희양의 아버지 임종호씨가 1일 저녁 전남 진도 체육관 인근에서 <오마이뉴스>와 인터뷰를 마친뒤 돌아서고 있다. 아직 가족을 찾지 못해 진도에 남아 있는 다른 실종자 가족들을 돌보기 위해서다. ⓒ 남소연

임씨는 사고가 발생한 지난 16일부터 지금까지의 일을 상세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그는 "미쳐버릴 것 같은 심정이었다"라며 처음 소식을 접했을 때의 상황을 자세히 설명했다. 또 "현장에는 아무 책임자가 없었다"라며 정부의 초동대처에 대한 불만을 강하게 제시하기도 했다.

- 따님과 마지막으로 통화나 문자를 한 건 언젠가요?
"이번에 수학여행 간다고 해서 걱정이 많이 됐어요. 배를 장시간 탄다고 하니까 걱정이 됐는데, 그래도 큰 배 타는 것도 경험이라고 했습니다. 사고 전날 문자가 왔어요. '아빠 못 갈지도 모른다'고, '왜?'라고 물었더니 '배가 안 떠난다'고, 조금 뒤에 다시 문자가 와서 출발한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잘 다녀오라'고 하니까 '예'라고 대답한 게 마지막 문자였습니다. 다음날 아침에 전화를 했는데 안 받더라고요."

- 사고가 발생한 16일에 연락은 어떻게 받으셨나요?  
"회사에서 일하고 있었는데 아내한테 전화가 왔어요. 회사에서 나와 학교에 갔습니다. 가는 도중에 라디오에서 구조된 화물트럭 운전수 인터뷰가 나왔어요. 사고 해역이 수심이 낮아서 기울어져도 가라앉지 않을 것이라고 해서 안심이 됐어요. 그나마 다행이라고 생각하면서 학교에 갔습니다. 오전 11시가 됐나. 전원 구조됐다고 얘기가 나오는 거예요. 그래도 어떻게 그렇게 빨리 파악이 될까 해서 재차 확인을 했습니다.

그 사이에 일단 진도로 가기로 해 버스를 타려고 했습니다. 옷이 젖었겠다고 생각해서 집에 들러 세희 옷도 챙겨왔어요. 그 사이에 완전 뒤바뀐 것입니다. 학교에 게시된 생존자 명단이 체크되는데 더 이상 체크가 안 되는 거예요. 버스를 타고 내려가는데 인터넷에서 370여 명이 구조됐다고 나왔습니다. 그것도 오보였습니다. 버스에서 점점 암울해졌어요. 진도에 오니까 저녁 7시가 됐는데, 생존자 수가 달라지지 않았어요.

세희 이름이 생존자 명단에 있기를 바랐는데, 없는 거예요. 체육관에서 울고 쓰러지기도 했죠. 그 후에 팽목항으로 갔습니다. 세희 이름이 있기를 바랐는데 없는 거예요. 여기 책임자가 누구냐 했더니, 파출소장이 와 있었어요. 그 사람은 아무것도 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현장 책임자가 없었어요. 그런 상황에서 하루가 흘렀습니다. 계속 들려오는 얘기는 구조대가 들어가지 않고 있다, 민간 잠수사들이 와서 들어가려고 해도 해경이 막고 있다는 얘기가 나오는 겁니다. 부모 입장에서는 답답하잖아요. 빨리 들어가서 살려내야 하는데..."

- 세희양은 며칠 만에 발견됐나요?
"24일에 찾았어요. 이미 전날 169번으로 인상착의가 나왔었는데, 처음에는 몰랐습니다. 인상착의가 달랐어요. 집 사람이 챙겨준 옷과도 달랐고, 덧니 얘기가 없어서 확인해 볼 생각을 안했어요. 다음날 DNA 검사 결과가 나왔습니다. 앞에서 9반에 임세희 학부모 나와 달라고 해 신원확인소에서 확인을 했어요. 시신을 보니까 눈물부터 나와서 제대로 보지를 못하겠더라고요. 나중에 장례식장에서 보니까 확실히 제 딸이었습니다."

"네가 이루지 못한 것들 네 동생이 다 이루길"

▲ "박 대통령, 사과하려면 초동조치 안 됐을 때 했어야" 지난 1일 전남 진도 체육관 인근에서 <오마이뉴스>와 인터뷰한 세월호 침몰사고 피해자 임세희양의 아버지 임종호씨
ⓒ 남소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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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씨에게는 세희양 아래 아들이 하나 더 있다. 이제 중학교 3학년인 그의 아들의 안부를 묻는 질문에 "누나가 했던 일을 제가 하려고 한다"라며 "누나의 빈자리를 채우고 싶어 하는 것 같다"라고 말했다. 그는 "일 하는 시간을 제외하고 매 순간마다 (세희가) 생각 날 것"이라고 말해 딸을 잃은 아픔이 쉽게 사라지지 않을 것임을 내비쳤다. 그는 자신보다 먼저 떠난 딸에게 "엄마아빠 힘들지 않게 일찍 와줘서 고마워"라며 마지막 작별의 말을 남겼다.

- 아드님이 계시다고 들었습니다. 그 친구도 많이 힘들어 했을 거 같은데요. 지금은 괜찮은 가요?
"네. 첫날부터 많이 울었어요. 누나가 동생을 잘 챙겨줬거든요. 동생은 누나한테 많이 의지했고, 누나는 귀찮아하면서도 많이 챙겼어요. 아들이 조금 달라진 것도 같아요. 누나가 했던 일을 자기가 하려고 해요. 엄마아빠 쉬는 날이면 딸이 커피 한 잔 마시자며 타주곤 했었는데, 이제 아들이 하려고 해요. 제가 어제 아들이 타준 커피를 처음 마셔봤어요. 됐다고 하는데도 타주더라고요. 누나의 빈자리를 채우고 싶어 하는 것 같아요."

- 솔직히 취재하면서 가족들이 슬퍼하는 모습을 보면 많이 힘들었습니다. 또 주제넘은 소리지만, 앞으로 이 아픔을 어떻게 이겨낼까 걱정도 됐습니다.
"일을 하는 시간을 제외하고 매 순간순간마다 생각나겠죠. 집에 딸의 흔적이 정말 많아요.  딸 방에 들어가거나 그런 흔적들 볼 때마다 생각나겠죠. 집사람이 더 힘들어 할 거 같아요. 같이 직장생활을 하다보니까 많이 못 챙겨줘서 미안해해요."

- 들을 수 없겠지만, 세희양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으시면 남겨주실 수 있을까요?
"딸한테 미안한 마음밖에 없죠. 아빠가 많은 걸, 좋은 걸 못해줘서 미안하고 좋은 세상에 가서 아픈 것 없이 행복하게 살았으면 좋겠다. 그리고 아빠 힘내라고 많이 응원해줬으면 좋겠다. 네 동생이 네가 못했던 것을 다 이뤘으면 좋겠다. 엄마아빠 힘들지 않게 일찍 와줘서 고마워." 

☞ [인터뷰②]로 이어집니다.


#세월호#세월호침몰#진도#해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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