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세월호 참사 관련 기사들을 보면서 이런 장면이 떠올라 쓴웃음을 짓곤 한다. 유가족과 실종자 가족들의 슬픔, 그리고 실종자 수색작업, 참사의 원인 규명보다는 박근혜 대통령의 사과가 온통 뉴스의 중심을 차지해 버렸다. 이게 정상적인 일인가? 세월호 참사라는 거대한 비극을 당한 나라에서 대통령의 사과 시기와 방식이 뉴스의 핵심이 된다는 게 과연 정상적인 일인가?
박근혜 대통령의 사과는 분명 잘못됐다. 팽목항을 두 번이나 직접 방문했지만 유가족과 실종자 가족들 앞에서 "사과한다"고 말하지 않았다. 충직한 부하들과 함께 한 국무회의장에서 은근슬쩍 사과의 뜻을 내비쳤을 뿐이다. 비판이 거세지자 조계사 법요식을 찾아 넌즈시 공식 사과에 대한 기대감을 불어넣었다.
그러자 보수언론은 물론 야당과 진보세력은 일제히 '잘못된 사과'를 놓고 그야말로 난리법석을 떨고 있다. 안철수 새정치민주연합 공동대표는 "통렬한 사과"가 필요하다고 날을 세웠다. 각 언론과 방송들은 대통령이 언제, 어떤 방식으로 대국민 사과를 공식적으로 할 지 퍼즐게임을 하듯 추측하기 시작했다. 주목할 것은, 조중동과 종편 등 보수언론들이 대통령의 사과에 대한 기사를 양산하고 있다는 점이다. 세월호 참사의 슬픔보다는 대통령의 입이 관심의 초점이 돼 버렸다.
박근혜 대통령의 '사과 릴레이', 난리법석 야당과 언론 세월호 참사 속에 대통령 사과가 뭐 그리 중요한가. 사과는 사실 가장 값싼 대처방식 아닌가. 일반인 사이에 갈등과 충돌이 일어났을 때 사과는 소송, 배상 혹은 보상, 구속, 징역 등을 피할 수 있는 방책이 되기도 한다.
'말 한마디에 천냥 빚 갚는다'고 진정성 있는 사과는 많은 것을 덮기도 한다. 하지만 세월호 참사와 대통령의 사과는 그런 관계에 놓여 있지 않다. 한 쪽에 수많은 아이들의 처참한 희생이 있고, 다른 쪽에 국가와 정부를 대표하는 책임자인 대통령이 서 있다. "정말 죄송하다"는 사과 한 마디로 해결될 사안이 아니라는 얘기다.
더욱 중요한 건, 사과를 하는 것과 그것을 진심으로 반성하고 고치려는 자세를 갖는 것은 완전히 별개의 일이라는 점이다. 여전히 "이게 왜 내 탓이야. 말을 했는데도 제대로 일을 하지 못한 저 놈들 때문이지"라는 생각을 하고 있으면서도 얼마든지 짐짓 눈물을 흘리며 사과할 수 있다.
보다 우려스러운 것은, 세월호 참사에 대한 대통령의 '사과 릴레이'를 보면 치밀하게 계산된 정치적 행위라는 느낌이 든다는 점이다. 사과를 늦추면 늦출수록 비난여론이 거세진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사과에 대한 기대감도 커질 대로 커진다. 그 다음은? 그렇다. 그냥 사과하면 된다. 아주 진지하게, 통렬한 형식을 빌려. "통렬한 사과"를 요구했던 야당은 뻘줌해지고 보수언론은 늦었지만 대통령이 용단을 내렸다며 또다시 난리법석을 떨 것이다.
이미 박근혜 대통령은 사과라는 문제에 있어 최고 수준의 '정치적 미학(美學)'을 선보인 바 있다. 2012년 7월 박 대통령은 5.16 군사군데타에 대한 한 여론조사에서 찬성이 50%를 넘었다며 아버지 박정희 전 대통령을 옹호하는 발언을 했다. 당연히 야당과 언론에서 일제히 들고 일어나 비판을 쏟아부었고, 급기야 여당의 분위기도 흉흉해졌다. 하지만 박근혜 당시 새누리당 대선 후보는 요지부동이었다. 12월 대선을 코 앞에 둔 상황에서도 박 후보자는 끈질지게 버텼고, 무려 두 달만에 "5.16과 유신이 헌법가치를 훼손했다"고 공식 사과했다.
이를 두고 언론은 일제히 "박 후보자가 아버지의 역사적 과오를 인정한 것은 전향적인 입장 변화"라며 크게 반겼다. 문재인 당시 민주통합당 대선 후보는 "아주 힘든 얘기였을 텐데 참 잘 하셨다"고 평했고 안철수 무소속 후보도 "정말 쉽지 않은 일인데 어려운 결단을 했다. 진정성이 있다고 본다"고 추켜세웠다.
하지만 과연 그날 박 후보자의 사과는 진정성을 담은 것이었을까. 대통령이 된 뒤의 행보를 보자. 지난해부터 계속되고 있는 5.18 광주민중항쟁 기념행사 파행과 '임을 위한 행진곡' 논란, 교학사 교과서 검정 파동 등을 보면 답이 나온다. 역사 인식과 관련한 일련의 조치 및 행보를 보면, 그의 사과가 진정성이 있었을까 하는 의문이 든다.
결국 박 후보자의 그날 사과는 대선을 두 달도 남기지 않은 가운데 나온 '신의 한수'였다고 볼 수 있다. 오래 끌어온 만큼 심사숙고했을 것이란 평가와 아버지에 대한 자신의 신념, 애정, 자부심을 스스로 부정하는 게 어려울 것이란 인정(人情)이 맞물리며 오히려 지지율 상승으로 이어졌다. 그날의 사과는 박 후보자 입장에서 대통령으로 올라서기 위한 마지막 승부처였을 것이다.
대통령의 사과와 세월호 참사의 해결은 별개의 문제 일상생활의 다툼에서 상대방이 사과했다고 그 진정성을 곧이곧대로 믿는 건 다소 순진한 생각이다. 다만, 그렇게 하겠다는 의사 표현을 받아줄 뿐이다.
일상에서도 그런데 하물며 숱한 생명을 한꺼번에 수장시킨 국가와 정부 시스템의 문제야 두말할 필요가 있겠는가. 참사에 대한 사과는 그냥 사과일 뿐이다. 대통령이 사과한다는 것도 당연하다. 이번 참사는 사고를 불러온 국가와 정부 시스템, 한심한 관료들과 구조 관련 기관들의 만행이 한데 뭉쳐 일어났으니 그 총 책임자인 대통령이 사과하는 건 너무나도 당연하다.
사과는 다만 세월호 참사를 수습하고 해결하는 작업의 시작일 뿐이다. 대통령이 직접 나서 "이 모든 게 내 탓"이라며 책임을 스스로 떠안아 원인 규명, 책임자 문책, 전국가적 재난구호시스템 혁신 등을 추진하겠다는 다짐인 것이다.
누가 대통령의 사과에 연연하는가세월호 선장과 유병언 전 세모그룹 회장 일가에 대한 처벌은 거대한 암덩어리의 아주 작은 일부분에 불과하다. 지금까지 드러난 것만 봐도 세월호 참사는 한국 사회가 안고 있는 온갖 구조적 모순이 빚은 대참사다.
유병언 일가와 그 하수인들은 탐욕자본의 민낯을 그대로 드러냈다. 조금이라도 기회가 있으면 온갖 방법을 동원해 한톨이라도 더 걷어들여 잇속을 챙겼다. 사람 목숨조차 뒷전이었으니 선원들의 경고를 듣기나 했을까. 해경과 해수부의 관료들은 '돈의, 돈에 의한, 돈을 위한' 자들이었다. 바꿔 말하면 '유병언의, 유병언에 의한, 유병언을 위한' 자들이었다. 온갖 불법·탈법 행위를 눈감아줬는데 그 뒤에는 '유병언 장학생'들이 도사리고 있었다.
이제 우리는 이것들을 박 대통령이 어떻게 걷어내는지 두 눈 똑바로 뜨고 지켜봐야 한다. 세월호 참사를 직·간접적으로 초래한 이들을 철저하게 색출해서 처벌하는지 감시해야 한다. 숱한 아이들의 목숨을 앗아간 자들에게 응분의 대가를 치르게 해야 한다. 이것은 분풀이가 아니며 유가족과 실종자 가족들이 갖는, 매우 정당한 요구이자 권리다.
이제 더이상 대통령의 사과는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철저한 원인규명과 책임자 처벌, 잘못된 제도적·법적·행정적 시스템의 혁신을 추진해야 한다. 그래서 다시는 이 땅에 이같은 슬픈 일이 거듭되지 않도록 가능한한 최고 수준의 안전정치를 마련해야 한다. 이것이 세월호 유가족들의 슬픔을 어루만지는 가장 큰 위로가 될 것이고, 밤마다 이 땅의 수많은 부모들이 잠들어 있는 자식의 등을 쓰다듬으며 가슴 저리지 않게 하는 길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