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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건강연대는 2013년 산재를 입고 치료 재활중인 노동자들, 치료가 끝나고 생업으로 돌아간 노동자들의 생활실태를 조사하는 사업을 진행했습니다. 산재 노동자들은 몸과 마음에 입은 상처를 충분히 치료받지 못한 채 힘겨워하고 있었습니다. 어떤 개인의 질병도 사회구조와 떨어져서 볼 수 없기에 의료인들이 노동자를 진료할 때 더 많은 질문을 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이 가이드를 만들었습니다. [편집자말]
어제(8일) 일입니다. 사무실 전화벨이 울렸습니다. "캄보디아에서 온 20대 초반, 남성, 한국 온 지 3개월, 용접불똥, 실명, 중환자실, 한국말을 못해서…" 맞은 편에 앉은 동료활동가가 통화하는 내용이 들립니다.

한국말을 못하는데 어떻게 공장에 배치되었을까요. 고용허가제로 한국에 들어오는 이주노동자들은 기초적인 한국말을 배우고 들어온다 해도, 정작 공장에서 일할 때 필요한 한국말은 모르는 채로 일을 시작합니다.

저렇게 큰 사고를 당하기까지 백일 가까운 시간 동안 무엇이 위험한지, 어떻게 피해야 하는지 한국인 동료나 사장에게 들은 적이 없었을 것입니다. 물어보고 싶어도 입이 떨어지지 않았겠지요. 고향의 말로 생각을 하고 또 했을까요.

'힘들다. 집에 가고 싶다. 가족이 보고 싶다….'

근로복지공단 5조 원 흑자가 말해주는 것들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사고로 다치거나 사망하는 일이 날마다 보도되고 있습니다. 산재사고의 80~90%가 비정규직, 하청 같은 불안정한 일자리의 노동자들에게 일어납니다. 저 캄보디아 노동자처럼 말이 통하지 않습니다. 옆자리 일하는 사람이 다른 업체 사람이라 서먹한데, 월급도 짜서 의욕도 없는데, 오래 일한 선배 노동자는 정규직이라 서로 말도 안 섞는데…. 어디가 위험한지, 무엇을 조심해야 하는지 정보도 교육도 없습니다.

 언제든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공장.
언제든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공장. ⓒ freeimages

비정규직이 아프거나 사고라도 나면 계약해지를 해버리거나 하청업체를 바꾸어버리니, 출구 없는 회전문 같은 악순환을 어디서부터 끊어야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대기업의 하청으로 일하는 노동자가 다쳐서 원청기업 진료실에 갔더니 항생제 하나 발라주지 않더라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입니다. 기록에 남으면 산재사고로 잡히니 응급 처치도 못하고 공장 문 밖의 병원을 찾아 나서게 됩니다.

이렇게 인터넷 기사로 올리고 노동조합에서 고발하고 데모를 해도 노동부와 근로복지공단은 속 편하게 '산재 감소세', '미래경영 선포식' 같은 홍보사업에 열심입니다. 정부가 왜 이러는지, 어떻게 해야 고칠 수 있는지 곰곰이 생각해봅니다. 다음에 말씀드릴 기회를 만들도록 하겠습니다.

그렇지만 오늘 꼭 하나 짚고 넘어갈 것은, 한국 뿐 아니라 세계적으로도 임금인상율이 줄어들고 소득 격차는 커지는 이유가 경제불황 등의 요인도 있겠지만, 사회보장이 후퇴하는 것도 원인 중 하나라고 합니다. 노동자의 임금이 줄어들면 당연히 내수경기가 침체되는 것이고요.

근로복지공단이 5조 원의 돈을 곳간에 쌓아놓고 뿌듯하게 여긴다는 것은, 노동자들에게 돌아가야 할 돈, 사회보장비로 가야 할 돈을 쥐고 있다는 얘깁니다. 힘들고 위험한 일을 하면서도 더 많이 아프고 다치고 생명을 잃고 있는 비정규노동자들, 하청, 알바 노동자들에게 갈 돈이 안 가고 있다는 얘깁니다. 이는 거꾸로 보면 산재보험 같은 사회보장정책이 소득의 불평등을 조금이나마 완화하고, 평등과 정의를 촉진하는 역할을 할 수 있다는 걸  말해 줍니다.

교육 하루 만에 작업 투입, 빼앗긴 손 하나

오늘 이야기를 들려주실 박OO님은 삼십대 후반의 젊은 노동자입니다. 스물 세 살에 250톤의 프레스가 손을  빼앗아갔습니다. 사장이 하라고 해서 하루 일 배우고 다음날 아침 사고가 났습니다. 나중에 보니 사장은 서류에 박OO 본인 잘못이라고 써 놓았습니다. 민사손해배상을 안주거나 덜 주려고 한 것이죠.

박OO님은 손이 기계에 끼이던 봄날의 시간, 분까지 자꾸만 얘기합니다. 잊을 수 없는 시간이고 잊히지 않는 시간입니다. 주치의가 수술을 해준 후 잠시 외국에 간 사이 손은 염증이 생겼고, 손목을 살리기 위하여 서른 번의 수술을 하며 버텼습니다. 근로복지공단은 손을 잃은 노동자에게 재활방안 같은 건 귀띔도 안 해 줬습니다. 어제 알게 된 전화기 너머의 캄보디아 노동자가 많이 걱정되는 시간입니다.  

내 이름은 박OO, 1976년 3월 출생. 전라북도 완주서 10살까지 살다 86년에 서울로 올라와 사당동에서 살았어요. 초등학교 6학년 때부터 레슬링을 했는데, 전국체전 나가서 우승한 적도 있어요. 공고에 가서도 운동을 계속 했는데, 자동차 정비하는 게 재미있어 보였어요. 기계과 선생님이 그랬어요, 뭘 하든 기계정비를 할 줄 알아야 한다고.

그래서 용접, 선반 자격증을 따기 시작했어요. 2시 반에 학교 마치고 운동 끝나면 6시, 그때부터 자격증 공부하고, 하다 보니 재미있어서 자격증 8개를 땄어요. 그때 내 꿈은 자동차. 자동차 만드는 거였어요. 맞는 게 싫어서 레슬링은 그만뒀어요.

고등학교 졸업하고 군대 기다리는 사이에 일을 시작했는데, 첫 번째는 부평에 있는 자동자 라인 공장이었어요. 조립하는 일인데, 문짝에 나사를 3개씩 박는…. 하루 종일 볼트 작업만 하려니 힘들어서 한 달 만에 그만두었어요.

그 전에 학교 때 실습한 공장이 안산에 있었어요. 지게차의 캡(운전석 뚜껑) 만드는 곳이었는데 거기로 가서 1년 반 일했어요. 사장이 차별이 심해서, 임금도 차이가 크고. 나는 월급이 60만 원 정도였어요. 일반 대학 나온 애들은 180만 원 받는데 나는 60만 원. 임금 올려 달라고 하니까 나가라고 하더라고요.

다른 데서 85만 원 준다길래 그리로 갔어요. 7개월 있다가 회사가 어렵고 임금도 체불되어서 나왔어요. 네 번째 직장이 대기업 하청공장에서 자동차지그(자동라인 설치작업)를 했어요. 그러다가 방위산업체에 들어갔어요. 거기서 사고를 당하게 되었어요.

방위산업체에서의 사고, 몇 시 몇 분까지 잊히지 않아

98년 4월, 인천남동공단 업체에 밀링(회전축에 고정한 커터로 공작물을 절삭하는 공작 기계)으로 들어갔어요, 프레스기계 10대가 있었는데 나더러 프레스로 가라는 거예요, 사장이. 난생 처음 프레스를 다루게 되었는데, 첫날은 공장장이 하는 거 어깨 너머로 보고 배우고, 다음날 혼자 기계를 잡았는데 250톤짜리 프레스기계예요. 누르는 힘이 250톤. 탱크를 만드는 공장이니까.

베이스가 너무 커서 금형틀이 저 안쪽에 있어요. 제품 꺼내려면 손이 안 닿으니까 몸이 들어가고 머리 들어가서 손으로 끄집어내야 하거든요. 원래는 양손버튼으로 하는 작업인데 9시부터 작업해서 9시 57분, 화장실이 급해서 갈까 말까 하다가 마저 찍어야지 하고 찍었어요.

오작동이 발생해서 제품을 넣고 있는데 프레스가 내려온 거예요. 머리는 빠졌는데 손이 안 빠져나와요. 250톤의 힘으로 누르면 두께가 2mm가 되요. 거기에 손이 껴있는 거예요. 머리는 빠졌으니 살았다, 생각했는데, 손이 안 빠지는 거예요. 옆 사람한테 기계 멈춰 달라고 했는데, 프레스 기계가 올라가는데 손이 기계에 달라붙어서 따라 올라가는 거예요. 막 소리 지르고….

 2, 3, 4, 5번 손가락이 뿌리 부분은 뭉개지고 손가락 끝 반만 남아있는데 뼈에 철사를 붙여서 손을 일단 다 살렸어요. 그런데...
2, 3, 4, 5번 손가락이 뿌리 부분은 뭉개지고 손가락 끝 반만 남아있는데 뼈에 철사를 붙여서 손을 일단 다 살렸어요. 그런데... ⓒ sxc

일단 공단 안에 작은 병원으로 갔는데, 장갑을 낀 상태였고 손이 안 보이는데 그대로 갔어요. 병원 가기 전에 공장장이 사장에게 보고하는 30분 동안을 기다렸어요. 기다리라고 하니까... 나는 주저앉아 기다렸어요.

의사가 처치 시작하면서 나더러 손 보지 말라고, 고개를 돌려라 했는데, 그래도 나는 봤어요. 장갑을 잘라서 열었는데 피가 두 통이 쏟아졌어요. 내가 눈으로 보니 손이 닭발처럼 보였어요. 뼈가 보이고 힘줄이 보이고. 수술하러 큰 병원으로 갔어요.

동인천 길병원으로 갔는데 전신마취하고 나서 부모님이 왔어요. 부모님이 왔는데 의사가 손목 절단해야 한다고 하고, 부모님이 절대 반대해서, 그때 아버지가 광명성애병원을 알고 수지접합을 잘 한다길래 구급차로 그쪽 병원으로 이송되었어요. 그때 나는 마취상태였어요.

오후 7시 50분, 광명성애병원 도착해서 수술을 바로 들어가서 새벽까지 7시간 반을 수술했어요. 손목은 절단하지 않고 수술하는데 국소마취만 하고 있어서 나는 정신이 있었어요. '나를 믿을 수 있냐'고 의사가 나한테 물었어요. 잘못되면 손목까지 절단하는 상황일 수 있는데 내가 한번 해 보겠다 동의했더니 손을 다 살렸어요. 너무 신기했어요.

2, 3, 4, 5번 손가락이 뿌리 부분은 뭉개지고 손가락 끝 반만 남아있는데 뼈에 철사를 붙여서 손을 일단 다 살렸어요. 회복되면 손이 다 움직일 거라 했는데 결국 골수염이 생겨서 뼈를 하나씩 뽑아내기 시작했어요. 지속되면 손목까지 올라가서 심하면 손목을 잘라야 하는 상황이 된다고요.

그때 주치의가 미국에 며칠 가고 인턴들이 치료를 해주는데 염증이 느껴졌어요. 손가락 수술 부위가 간질간질하고 느낌이 이상했어요. 그래서 처치해주는 인턴에게 말했는데 인턴은 괜찮다고 소독만 해주는 거예요. 그렇게 2주를 보내고 주치의가 돌아왔는데 와서 보더니 "미안하다. 골수염이 생겼는데 잡았어야 했는데 치료를 못했다, 수술실 가서 수술하자" 그래요.

30번 정도의 재수술... 희망없는 나를 살게 한 건

이때 많이 좌절했어요. 수술 끝나고 나왔는데 손가락이 안에 뼈가 없어 텅 비어있는 게 느껴졌어요. 그걸 보면서 죽고 싶다는 생각을 처음 했어요. 의료 사고라고 싸우기도 그렇고. 의사가 손목을 살린 것이 고마웠고 손목 살아있는 게 감사했고 그래서 그냥 가만 있었어요. 뼈를 빼내니까 그러면서 관절까지 뽑으니까 그때부터 손가락에 강직이 오기 시작했어요.

생각도 못 해봤는데 힘들어서, 자살 생각 많이 했어요. 사고 나고 손가락 모양들이 만들어지고 그래서 희망적이었는데, 손가락 뼈 뽑혀 나가는 거 보면서 너무 힘들었거든요. 아예 처음부터 절단했다면 희망이 없었을 텐데, 장애는 남겠지만 움직일 수 있다, 컵을 잡을 수 있다고 의사가 그랬는데 그런 희망이 사라지니까.

자동차 일 못하지, 장애 왔지, 밖에 나가서 부모님 볼 낯이 없고, 제일 힘들었던 게 여자친구, 헤어졌어요. 그전에는 잘 지냈고 집에도 놀러 다니고 수술할 때까지도 괜찮았는데, 헤어지게 되었어요. 그게 23살 때예요.

30번 정도 수술을 할 동안 병원 생활을 6개월 했어요. 10월까지 병원에 있었는데 8월에 산재노동자협의회에서 병원 방문을 왔어요. 2, 3명이 왔어요. 나도 상담을 받았어요. 그때 서류를 꼭 확인하라고 해서 그제야 봤더니, 다 내 잘못으로 작성되어 있는 거예요. 내용 다 바로잡고, 휴업급여 신청하고. 그게 나중에 민사할 때 도움이 컸어요.

10월에 퇴원해서 산재노협 사무실에 갔어요. 처음 산재노협 사무실 간 날, 그때 사무실은 구로 동부슈퍼 지하에 있었어요. 사무실 입구에 컴퓨터가 있는데 어떤 사람이 두 손으로 마우스를 잡고 움직이고 있는 거예요. '왜 저러고 있지?' 하면서 지나쳐 들어갔는데 나중에 보니까 양쪽 손이 없는 사람이, 마우스를 두 손으로 잡고 게임을 하고 있는 거예요. 너무 잘하는 거예요. 진짜 빨라요. 나보다 손이 더 장애가 심한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 상담해주고 그러더라고요. 고마운 조직이라는 생각을 많이 했어요.

나에게 재활은 산업재해노동자협의회(산재노협)예요. 사고 나고 나서 재활 얘기는 어떠한 얘기도 못 들었어요. 근로복지공단 직원한테 재활 얘기를 들어본 적이 없어요. 병원 다니면서 다른 노동자들 보면서 알게 된 것 뿐이에요. 형들이 '공단에 이런 거 신청해라' 알려줬어요. 운전면허, 대부사업 같은 것들. 공단에 전화해보면 '연초에 끝났습니다'라고 답 뿐이에요.

집이 2002년부터 2003년까지 고깃집을 했어요. 고깃집이었어요. 그때쯤 아버지가 보증을 잘못 서서 집안이 망하게 되었어요. 의왕에 내 사고 보상금으로 산 아파트가 있었는데 팔았어요. 아버지는 빚쟁이에게 받은 스트레스로 지병에 당뇨에 겹쳐서 2005년 돌아가셨어요.

지금도 엄마는 나한테 미안하니까 아파도 병원 안 가려고 해요. 엄마의 병원비만 작년 한 해 엄청 나갔어요. 누나와 남동생은 약간씩 용돈 보태는 정도예요. 집안 경제문제는 나 혼자 하려니까 힘든 부분이에요.

방위산업체에서 일할 때 68만 원씩 받았는데 사고 후 공단에서 휴업급여가 70% 나온 게 48만 원이었어요. 그때 최저보상액이 2만2500원인데 나는 1만1000원 받은 거죠. 최저보상액도 안 되는 돈이었어요. 48만 원 받으니 미쳐버릴 것 같았어요. 그건 교통비 겨우 될 수준, 엄청 불만이었어요. 임금을 100% 줘도 살기 힘든데 말이죠.

지금은 산재보험에서 연금을 받아야 할 게 있어서 근로복지공단에 심사청구를 해놓았어요. 일년 전에 청구를 해놓았지만 공단은 서류만 받아놓고 연락이 없네요."


#산재보험#노동인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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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정규직, 하청, 일용직, 여성, 청소년 이주 노동자들과 함께 건강하고 평등한 노동을 꿈꿉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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