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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척동 석불입상
내척동 석불입상 ⓒ 이상기

아침에 일어나니 날씨가 한결 좋아졌다. 우리는 내척동 미동 마을에 있는 석불을 찾아간다. 미동은 남원의 서북쪽 내척천변에 있는 자연 마을이다. 마을 입구에는 느티나무가 있고, 마을 안길을 지나 언덕 쪽으로 올라가면 석불입상이 보인다. 이 불상을 마을 사람들은 미륵불로 여기고 있으며, 그 때문인지 이곳을 미륵골이라 부르기도 한다.

평면적인 돌에 불상을 돋을새김으로 조각하고 그것을 대좌 위에 세웠다. 팔 중간부분에 구멍이 나있는 것으로 보아 팔은 별도로 제작해 붙인 것 같다. 얼굴은 마모가 심한 편이지만 눈, 코, 입은 분명히 확인할 수 있다. 나발과 육계도 보이지만 역시 형태만 보인다. 법의는 통견이며, 가슴 아래로 U자형이 뚜렷하게 보인다. 전체적으로 예술성은 상당히 떨어진다.

 석불입상 옆 꽃밭
석불입상 옆 꽃밭 ⓒ 이상기

이 불상의 유래를 아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불상을 향해 왼쪽에 명문이 있어 조성시기와 역사를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다. 명문은 '숭덕구년 갑신 시월 일 갱립(崇德九年 甲申 十月 日 更立)'이라고 썼다. 이를 통해 이 불상이 1644년 10월에 이곳에 다시 세워졌음을 알 수 있다.

불상을 보고 나오면서 우리는 민가 정원에서 무스카리 등 아름다운 꽃들을 볼 수 있었다. 인위적으로 꽃밭을 조성해 이곳에 오는 사람들을 즐겁게 해주고 있었다. 우리는 차를 타고 다음 목적지인 수지면으로 간다. 둑적골에 있는 또 다른 석불입상을 보기 위해서다. 그런데 김현식 남원문화원 사무국장이 잠깐 호곡리에 들러 몽심재(夢心齋)를 보고 가잔다.   

죽산 박씨 세거지에는 박문수 부조묘가 있다

 몽심재
몽심재 ⓒ 이상기

몽심재는 조선 후기 죽산 박씨 박동식(1753~1830)이 지은 집으로 현재는 그의 7대손인 박인기(朴仁基)가 살고 있다. 양반가의 전형적인 주택으로, 산자락의 경사면을 따라 건물을 배치했다. 아래서부터 위로 대문채, 행랑채, 사랑채, 안채가 위치하고 있다. 그러나 문이 걸려 있어 담장 너머로 내부를 살펴볼 수 밖에는 없었다. 그렇지만 주변경관과 건물, 그리고 마당이 잘 어우러져 있음을 알 수 있다.

나는 몽심재를 오른쪽으로 돌아 죽산박씨 종가로 향한다. 호곡리에 사는 죽산박씨는 고려말 두문동에 은거한 박문수(朴門壽)의 후손들이다. 박문수는 1342년 출생해 중추원사 도평의사 찬성사를 지냈으며, 이색 정몽주 등과 교류했다고 한다. 그가 정몽주에게 보낸 시 중 '격동유면원량몽 등산미토백이심(隔洞柳眠元亮夢 登山微吐伯夷心)'이라는 시구가 전해진다.

 죽산박씨 종가 안채
죽산박씨 종가 안채 ⓒ 이상기

"마을 앞 버드나무 늘어진 게 도연명의 꿈을 꾸는 듯하고, 산에 오르니 고사리는 백이의 마음을 토하는 것 같구나."

박동식은 이 문구의 끝자 '꿈과 마음'을 따서 몽심재라는 당호를 지었다. 박문수의 후손은 그 후 이곳 남원땅 호곡리로 낙향해 집성촌을 이루고 살았다. 이곳 후곡리는 산골치고는 땅이 넓고 비옥해 부촌을 이뤘고, 그 때문에 구례와 순천 등에서 서울로 올라가는 과객들이 죽산박씨 신세를 많이 졌다고 한다.

죽산박씨 종가 역시 조선 후기에 지어졌다. 안채와 사랑채, 사당으로 이루어져 있다. ㄷ자형의 안채는 1841년(헌종 7년)에 지어졌다. 사랑채는 그보다 앞선 1758년경 ㄱ자형으로 지어졌다. 사당에는 두문동 72현 중 한 사람인 충현공(忠顯公) 박문수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 죽산박씨 종가는 전북 유형문화재 제180호로 지정되어 있다. 

수지면 유암리 둑적골 석불입상 이야기

 유암리 석불입상
유암리 석불입상 ⓒ 이상기

수지면 고평리에는 견두산 마애여래입상(전북 유형문화재 제199호)이 있다. 이것이 문화재적 가치는 더 있지만, 본 사람이 많아 이번에 우리는 유암리 산 58번지에 있는 둑적골 석불입상을 찾아보기로 했다. 차를 신유암저수지 제방 옆에 세우고 계곡을 따라 산을 올라가야 한다. 이 길은 남원 수지에서 구례 산동으로 넘어가는 둔산치로 이어진다. 그런데 그 길을 다니는 사람이 없어 이제는 길이 거의 없어졌다.

길을 아는 사람이라곤 김현식 남원문화원 사무국장 밖에는 없다. 그렇지만 그도 역시 어느 지점까지만 알지 그 이상은 자신 없어 한다. 그도 근처에 가서는 주변을 찾을 것을 부탁한다. 우리는 저수지를 떠난 지 사오십분 후 석불입상을 찾을 수 있었다. 골짜기에서 조금 벗어난 언덕 풀숲을 지나자 이끼가 끼고 머리 부분이 조금 깨진 불상이 보인다.

 유암리 석불입상
유암리 석불입상 ⓒ 이상기

불상은 천마산에서 멀지 않은 해발 300m쯤 되는 둑적골에 위치하고 있다. 고려 초기 불상으로 보고 있으며, 높이 2m, 어깨폭 68㎝, 가슴둘레 176㎝다. 가까이 가 보니 목이 부러졌다. 그렇지만 몸체 위에 잘 올려놓았다. 얼굴은 마모가 심한 편이다. 특히 코가 거의 평면이지만, 눈과 입의 윤곽은 분명히 확인할 수 있다. 법의는 통견이며 선으로 양각을 표현했다. 옷자락의 표현이 불상의 뒷부분까지 되어 있는 특징이 있다.

두 손은 허리와 가슴 사이에 위치하고 있으며, 왼손에는 지물이 있다. 이것이 약합인지, 보주인지, 연봉인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발이 표현되었는지를 확인하기 위해 바닥을 조금 파보니 발과 대좌부분이 나타난다. 이 불상은 2012년 2월 처음 발견되었기 때문에, 앞으로 형식과 친연성 등에 대한 연구가 이루어져야할 것 같다. 옷자락의 표현이 만복사지 석조여래입상과 유사하다는 주장도 있다.

연봉 그리고 당간지주

 논 가운데 연봉석(蓮峰石)
논 가운데 연봉석(蓮峰石) ⓒ 이상기

둑적골 석불입상을 보고 우리는 대강면에 있는 당간지주로 향한다. 중간에 남창리를 지나는데, 그곳 논 가운데서 연꽃이 피어나는 형상의 돌을 볼 수 있다. 가장자리로 연꽃이 벌어지고, 그 가운데 아직 피지 않은 봉오리가 하늘을 향하고 있다. 마을 사람들은 이 연봉이 복을 가져다주는 것으로 생각해 신성시한다고 한다. 여기서 송동면 세전리를 지나면 섬진강을 따라 상류로 길이 이어진다.

섬진강은 이곳 세전리에서 요천과 합쳐져 곡성 구례로 흘러간다. 대강(帶江)이라는 지명도 강을 띠처럼 두르고 있다고 해서 생겨났다. 대강면의 불교문화재로는 사석리 마애불좌상과 방동리 당간지주가 있다. 우리는 그 중 방동리 당간지주를 보러 간다. 당간지주는 대강초등학교에서 멀지 않은 길가 논두렁에 있다. 두 기가 길의 이쪽과 저쪽에 있다. 그런데 이 두 기의 모양이 조금 다르다.

 당간지주 1
당간지주 1 ⓒ 이상기
 당간지주 2
당간지주 2 ⓒ 이상기

이 지역의 위치로 보아 절이 있었다고 보기는 어렵고, 어떤 이유에서 당간지주가 이곳으로 옮겨진 것 같다. 함께 한 김현식 국장과 임병기 선생은 이 당간지주가 풍수비보 차원과 실용적인 차원에서 이곳에 오게 되었다고 말한다. 풍수비보 차원에서 도끼머리 이야기가 있다. 당간지주가 있는 이곳을 도끼머리라고 하는데, 도끼가 장터거리를 해치는 형국이란다. 그래서 그 도끼의 기운을 누르기 위해 도끼의 날에 해당하는 이곳에 비보 차원에서 돌을 세우게 되었다는 것이다.

실용적인 차원에서는 선두(船頭)거리 이야기가 있다. 옛날 섬진강에 배가 다닐 때 이곳 방들(방동)이 선착장으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그러므로 뱃머리를 묶어두는 말뚝이나 기둥이 필요했고, 그 때문에 당간지주가 이곳으로 옮겨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나름대로 일리가 있는 주장이다. 그렇지만 이들 주장 모두 당간지주의 본질을 이야기해주지는 못한다. 당간지주의 원래 위치는 어디였을까? 


#내척동 석불입상#몽심재#죽산박씨 종가#유암리 석불입상#방동리 당간지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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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심분야는 문화입니다. 유럽의 문화와 예술, 국내외 여행기, 우리의 전통문화 등 기사를 올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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