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3월, 명함을 주고받았다. 독특했다. '인천아트플랫폼 입주작가'라는 타이틀이 있는 앞면을 뒤집어 뒷면을 보니 작가의 사진이 있었는데, 벽에 붙어 목만 빼꼼히 내밀고 염탐하는 자세 같았다. 세상에 대한 궁금증을 가득 담은 눈망울로. 두 달 후 그가 입주해 있는 인천아트플랫폼(중구 해안동)에서 지난 20일 만났다. 바로 이설야(47·사진) 시인이다.
인천문화재단이 운영하는 인천아트플랫폼은 다양한 장르의 예술가와 연구자들이 창작과 연구 활동에 전념할 수 있게 공간을 제공하는 한편 다양한 지원으로 예술 창작의 인큐베이팅 역할을 한다. 이설야 시인은 지난해 말 공모에 선정돼 올해 3월, 이곳에 왔고 내년 2월까지 머무를 예정이다. 이곳에 오기 전, 연희문학창작촌과 강원도 원주시 '토지문학관'에도 있었다.
글쓰기 공포서 벗어나게 한 편지
이설야 시인은 어릴 때 얘기를 하고 싶어 하지 않았다. 작품 속에 편린으로 녹아있긴 하지만 일부러 꺼내놓으려고 하지 않았다. 좋은 기억이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무의식의 세계에 침잠해있는 자신의 얘기를 비껴갈 순 없었다.
"중학교 때 힘든 시기를 보냈어요. 담임선생님이 저를 아끼셔서 희망을 주려고 편지를 썼는데, 그 때 쓰기 싫은 답장을 억지로 썼죠."어릴 땐 그림 그리기를 좋아했다. 물감 살 돈도 없었지만 그림대회에 나가서 상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글을 쓴다는 것은 공포였다. 넉넉지 않은 집안 사정으로 책과 글은 공포의 대상이었다. 선생님께 답장을 쓰면서 그 공포가 무너지기 시작했다.
"고등학교 때 교회에 다녔는데 사람들이 문학소녀 같다고 했어요. 분위기도 그렇고 이름도 특이하니까요. 감수성이 예민한 때에 미술동아리와 문학동아리를 같이 했어요. 거기서 글을 조금씩 쓰기 시작했죠."고교 졸업 후 회사에 취직했지만 문예창작과에 가고 싶은 열망을 누를 수 없었다. 지역 청년회 가운데 문예창작을 할 수 있는 단체에 가입했고, 그때 시민사회단체 사람들을 만난 것이 이른바 '민중시' 계열이 바탕인 그의 작품세계에 영향을 줬다.
'끼'와 '열정'이 예술로 만나다쓰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았으나, 어떻게 써야할지 몰랐다. 지역에 노동자문학회가 있다는 소리를 듣긴 했지만 찾지 못했다. 그러다 인천민중교회운동연합에서 하는 풍물강습을 들었다.
"제가 잘 빠져요. 다른 말로 잘 미쳐요(웃음). 시에도, 음악에도, 춤에도…. 그때는 풍물에 미쳤죠."풍물패 강사였던 지금의 남편을 그때 만났다. 하지만, 풍물을 하다가도 문학에 미련이 남아 마음이 허전했다. 그 무렵, 노동자문학회에서 주관하는 문학교실을 발견했다. 노동자문학회에서 시를 쓰면서도, 주체할 수 없는 '끼'는 그림에 발동을 걸었다. 당시 노동자문학회에서 걸개그림을 많이 그렸다. 세상에 호기심이 많은 그였지만, 결론은 문학이었다.
"결국엔 도움이 되죠. 그런 끼들이. 지금은 문학이 제일 좋아요. 시에 집중하면서 필요할 때 다른 장르를 접목하죠. 저는 최고의 예술은 시라고 생각해요."시에는 모든 예술이 다 있다고 그는 말했다. 그래서 퇴고를 많이 하고, 너무 많이 고쳐 싸우는 경우도 많다고 했다. '고치는 게 나의 작법'이라고 말하는 그는 마음에 들 때까지 고친다고 했다.
"합평(=합동 평가)하는 자리에서 어떤 언니한테 고치라고 했다가 싸울 뻔하기도 했어요. 내 눈에는 고쳐야 하는데, 예술가는 장인정신을 가져야된다고 생각하거든요."인천은 내 작품의 고향동구 화평동 140번지에서 태어나 동구와 중구에서 유년시절을 보낸 이 시인은 그 동네에서 쫓겨 다니다시피 스무 번 넘게 이사 다닌 것 같다고 회고했다.
"제가 자랐던 곳이 작품에 형상화돼 드러나곤 해요. 제 기억이 있는 장소와 민중들의 삶을 문학적으로 어떻게 드러낼 것인가가 최고의 과제죠. 내 얘기와 민중의 얘기에 장소성(=인간이 장소를 경험하면서 특정 의미를 갖거나 환경을 인식하는 장소적 특징)은 혼의 얘기라고 생각해요. 작품은 신한테 제사를 지내는 것이고요. 여기 아트플랫폼에 들어온 것도 작품 쓸 때 이곳에 정주해있으면 좋을 것 같아서였어요."그는 중구 신흥동, 용동, 전동과 화평동 등에서 오랫동안 살았다고 했다. 특히 지금은 사라진 화평동 수문통시장에 대한 기억이 강렬하게 남아있다고 했다.
수문통시장 앞에 똥바다가 있었다. 시장과 연결된 개천에 화장실의 분비물을 다 버리곤 했다. 심지어 다른 자료엔, 종종 탯줄이나 사산아(死産兒)를 싼 시멘트 포대가 둥둥 떠다니기도 했다고 한다. 여름이면 악취가 코를 찌르는 '똥바다'였다.
"장마철이면 똥바다의 물이 넘쳐 동네로 넘어오는데, 바가지로 물을 퍼낸 기억이 나요. 마루와 방까지 물이 찼거든요."자기가 살아온 것만큼 시를 쓴다는 그는 기존 리얼리즘의 식상한 방식이 아니라 낯설고 새로운 방식의 리얼리즘을 시도하고 있다.
갈증은 또 다른 추동력
노동자문학회에 들어가서도 공부에 대한 갈증은 계속됐다. 전 재산인 전세보증금 800만원으로 대학에 가려니 용기가 안 났다. 방송통신대학교 국문과에 입학한 후 인하대에서 석사·박사과정을 수료했다. 그래도 창작에 대한 갈증은 사라지지 않았다.
"한국어 강사로 중국에 6개월 동안 갈 기회가 생겼어요.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라 많이 힘들었는데, 작품을 안 쓸 수가 없었어요. 작품이 나한테 오더라고요."도망치듯 중국을 갔다. 6개월 계획이었지만 그 길로 2년간 체류했다. 그곳에서 등단할 계획으로 습작을 많이 했다. 그러나 번번이 최종심에서 떨어졌다.
민중시 계열이 바탕인 그는 당시 주류를 이룬 '미래파' 젊은 시인들의 세련되고 모던한 시를 따라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러다 '내일을 여는 작가'의 공모전을 통해 드디어 등단을 했다. 2011년이었다.
"응모하고 나서 꿈을 꿨어요. 나만한 크기의 흰 새떼들이 막 달려오는 거예요. 거기에 어떤 할아버지가 등장했는데 대문호 같은 분위기였어요. 그 할아버지가 새 이름도 가르쳐줬는데 지금은 잊어버렸죠."원고를 접수하고 학교에 가는 길에 실제로 새가 그의 앞으로 날라 왔다고 한다. 2013년에는 21회 대산창작기금에 선정돼 적지 않은 기금을 받기도 했다.
설야(雪夜)는 낭만파설야(雪夜). 눈 내리는 밤이라는 예쁜 이름이다. 상상의 나래를 끝없이 펼쳐도 모든 것이 용서되는 순간이다. 그래서일까? 그의 기질은 이름을 닮았다.
"감수성이 풍부해 고교 친구들이 저에게 '낭만파'라는 별명을 지어줬어요. 흥분을 잘해요. 노을을 봐도 흥분, 바다 봐도 흥분했거든요. 어릴 때는 책을 접하지 못해서 그런 세계를 몰랐는데 자라면서 '나한테 이런 게 있구나'를 발견한 거죠. 하지만 글이 아닐 수도 있었겠죠. 다른 장르일 수도 있었겠지만 어떻게든 표현했겠죠. 그냥은 못 살았을 테니까요."이 시인은 1996년 노벨문학상을 받은 폴란드 시인 비슬라바 쉼보르스카를 좋아한다. 이 폴란드 시인은 2012년 2월 향년 88세로 사망하기 전까지도 창작활동을 계속했다.
"1923년에 태어난 쉼보르스카는 일찍 등단해 계속 썼어요. 저도 오래 쓰고 싶어요. 새로운 세계를 끊임없이 개척하고 싶어요. 다른 장르와 결합도 시도해보고요. 하지만 본령은 시죠."호기심도 많고 예술이라는 것에 열정이 많은 그는 실험정신으로 쉬지 않고 도전을 감행한다. 안이하게 작품 활동을 하는 사람들에 대한 반감이라고도 했다.
"시가 기본예술이라는 생각에 머물면 안 될 것 같아요. 나만의 다른 방식과 내용을 계속 고민하는 거죠."시는 삶이고 운명이다
이 시인은 지금 첫 시집을 준비하고 있다.
"잘 내고 싶어요. 첫 시집이 굉장히 중요하거든요. 작가를 평가할 때 첫 시집이 좌지우지하기도 해요. 그래서 많은 작가들이 첫 시집에 많은 것을 쏟아 붓습니다."빠르면 올 해 일수도, 길면 2년이 걸릴 수도 있다는 그는 시집에도 운명이 있다고 생각해 운명을 기다리겠다고 했다.
이 시인에게 시란 최고의 예술이다. 시에는 철학이 있고 사유가 있고 그리고 우주가 들어있단다.
"시 안에는 그림이 있고 영상과 소설도 지나다녀요. 제 시는 서사가 많다고들 하죠. 소설 한 편 쓸 때 힘들다고 하는데, 저는 시 한 편 쓰고 나면 힘이 들어요. 공력을 많이 들이거든요. 시는 삶이고 운명이니까요."그러나 그는, 아직도 시가 뭔지 모르고 평생 모를 수도 있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