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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행기는 빠르고, 자동차는 편하다. 택시는 비싸고, 자전거는 힘들다. 그럼 기차는? 일단 기차 바퀴가 레일 위에서 움직이기 시작하면 정차구간을 제외하고는 목적지까지 일정한 속도로 달려간다. 가는 동안 비행기처럼 조마조마할 필요도, 택시처럼 미터기에 집중할 필요도 없다. 우리가 할 일은 조용히 창밖 풍경을 바라보거나 창안에 비친 내 모습을 바라보거나 혹은 둘 다일수도.

 혜화동 L씨가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고 공포물이 아닌지 반문한 그 포스터.
 혜화동 L씨가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고 공포물이 아닌지 반문한 그 포스터.
ⓒ 극단 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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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안화차'가 6년 만에 다시 출발하는 만큼, 이 우울한 행복감을 혼자 맛보기엔 아깝다고 판단했다. 불편하긴 해도 혼자보단 둘이 재미있으니. 동행자 섭외 끝에 결국 혜화동 L씨가 당첨됐다. 그는 대학로에 거주하는 본인의 친구다. 흥미로운 건 대학로에 살면서 그 숱한 포스터들과 호객행위에도 아랑곳없이 이제껏 본 연극이라곤 <라이어> 그것도 오직 1탄에 머무르고 있다는 점이다. 등잔 밑이 어두워도 이리 어두울까 싶지만, 혜화동에 산다고 모두 연극을 좋아해야하는 건 아니니까.

사실 그래서 더 궁금했다. 어디까지나 개인의 취향이 고스란히 반영된 의견이지만, 기대보다 늘 한발 앞선 (세 네발 앞설 때도 부지기수) 충격으로 호기심 본능을 자극하는 한태숙 연출의 작품을 '라이어 1탄' 관람이 전부인 그가 어떻게 볼지 말이다.

공연장 입구에서 만나 포스터를 본 그의 첫마디는 "이 당혹스러운 포스터는 뭐야? 혹시 공포물?" 역시 포스터조차 극장 입구에서 처음 본다는 예상했던 반응에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은 채 '서안화차'에 올라탔다.

짙은 어둠이 깔린 창밖을 응시하는 상곤, 가로등 불빛에 반사된 창문 위로 그의 옆모습이 조용히 흔들리고 있다. 서안 여산 진시황릉으로 향하는 기차 안에서 상곤은 지하궁전에서 최후를 맞은 인부들과 노예들이 느꼈을 공포감을 헤아리다 과거의 기억을 떠올린다. 달리는 창밖으로 차라리 던져버리고픈 기억들은 이내 한 사람, 찬승을 그려낸다.

 배우 박지일은 상곤의 과거와 현재를 오가며 상반된 연기를 보여준다. 서안으로 가는 기차에서는 담담하고 차분하게, 찬승으로부터 자신의 존재를 인정받기위해 필사적으로 매달리고 위협하는 장면에서는 통제의 끈을 놓아버린 채 광기에 휩싸인 상곤의 불안과 슬픔에 몸을 던진다.
 배우 박지일은 상곤의 과거와 현재를 오가며 상반된 연기를 보여준다. 서안으로 가는 기차에서는 담담하고 차분하게, 찬승으로부터 자신의 존재를 인정받기위해 필사적으로 매달리고 위협하는 장면에서는 통제의 끈을 놓아버린 채 광기에 휩싸인 상곤의 불안과 슬픔에 몸을 던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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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 박지일은 상곤의 과거와 현재를 오가며 상반된 연기를 보여준다. 서안으로 가는 기차에서는 담담하고 차분하게 고백 형식의 내레이션을 이어가는 한편, 찬승으로부터 자신의 존재를 인정받기 위해 필사적으로 매달리고 위협하는 장면에서는 통제의 끈을 놓아버린 채 광기에 휩싸인 상곤의 불안과 슬픔에 몸을 던진다. 혜화동 L씨는 드라마에서 본 배우의 연기를 무대에서 직접 보는 게 신기하다며 마냥 들뜸도 잠시, 시간이 흐르면서 극에 심취한 듯 몸을 의자 등받이에서 분리했다.

물론 "그게 뭐 어때서?" 의아해할 수 있으나 이 상황은 그리 단순하게 치부해버리고 넘어갈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 오랜 임상 경험상(?) 관객의 몸이 등받이에서 떨어져 무대 앞쪽으로 기울어진다는 것은 극에 그만큼 집중하고 있다는 증거이자 보다 가까이 다가가고 싶은 관객의 심리가 반영된 행동으로 해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역시 한태숙 연출의 작품은 혜화동 L씨도 움직이게 한다!

혜화동 L씨는 객석을 빠져나오며 "이거 참 이상하게 재밌다. 드라마 보는 거랑은 또 다르구나. 근데 이거 보니까 나도 기차타고 싶다"고 말하는 게 아닌가. 이상하면 이상한 거고, 재밌으면 재밌는 거지 이상하게 재밌는 건 대체 어떤 재미인가. '이상한 재미'라는 더 이상한 표현을 통해 그가 이 작품을 어떻게 봤는지는 더 이상 물을 필요도 없어 보였다. 나는 이 이상한 재미를 좀 안다.

잠깐 설명하면, 모름지기 '이상한 재미'란 드라마처럼 노골적이거나 예능처럼 친절한 매력(자막 혹은 포인트를 짚어주는 과잉 친절한 화살표 등으로 보는 동안 웃는 거 말곤 달리 할 게 없어 그저 웃고마는)은 부족해도 그 나름의 적당한 '불친절함'으로 상상의 문을 열어주고, 나아가서는 마음 속 깊은 곳에 숨어있는 물음표들까지 톡톡 건드려 안부를 전한다는 점에서 연극이 갖는 매력 중 하나다. 이 매력에 눈뜨기 전까지는 개인에 따라 시간이 좀 걸릴 수 있으나 일단 뜨고 나면 치명적일 수 있다.

 ‘서안화차’는 욕망으로의 긴 여로다.
 ‘서안화차’는 욕망으로의 긴 여로다.
ⓒ 극단 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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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듯 이상한 재미를 가진 '서안화차'는 욕망으로의 긴 여로다. 찬승을 향한 상곤의 욕망은 절대 권력과 영생에 집착한 진시황의 욕망과 만난다. 이 두 개의 욕망이 만나는 지점은 거울이 되어 다시 우리의 욕망을 비춘다. 긴 여로 끝에 우린 지금 '서안화차'의 종착역인 '욕망삼거리'에 와있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문화공감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연극 서안화차#정지선의 공연樂서#문화공감#한태숙 연출#박지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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