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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고등학교 시절, 형편 없는 시험 성적 때문에 교탁 앞으로 줄줄이 끌려나온 친구들과 매 타작을 당하곤 했다. 서슬 퍼렇던 1980년대 중후반의 중․고등학교에서는 흔한 풍경이었다. 대한민국 '학교 잔혹사'의 대표 주자로 내세워도 결코 꿀리지 않는다.

초등학교 때였다. 복도에서 뛰어놀다 담임 선생님에게 걸려 뺨을 맞은 적이 있다. 신나게 노는 아이를 흡족하게 바라보지는 못할망정 '싸대기질'이라니. 하지만 바야흐로 그 시대는 1980년대 초반이었다. 정치 군인들이 총칼로 권력을 잡고, 무고한 시민들을 학살하던, 온 나라에 폭력이 일상화해 있던 시절이었다.

그런 시대 분위기 탓이었을까. 매 맞는 순간에도 맞을 짓 했다는 생각이 든 것 같기도 하다. '정숙'이라는 표지판이 학교 복도 천장마다 주렁주렁 매달려 있던 때가 아니던가. 그런 곳에서 불경스럽게 뛰어놀다니 될 말인가. 시대의 야만성은 그렇게 순진한 어린이들조차 폭력에 둔감해지게 만들었다.

초·중·고등학교 12년을 다니면서 매께나 좋이 만났다. 재료도 다양했다. 평범하게 생긴 매는 선생님들의 필수품이었다. 그들은 마른 탱자나무나 대나무 등으로 한껏 멋을 부린 나무 매를 즐겨 휘둘렀다. 대나무 뿌리나 쇠자 등 강력한 힘과 개성을 뽐내는 매들도 있었다. 가끔 이벤트성 매질을 할 때는 야구 방망이가 동원되기도 했다.

선생님들 매에는 의외로 '사랑의 매'라는 흔해 빠진 이름이 적혀 있곤 했다. 여기에 약간의 진정성이 있었다면, '사랑의 매'는 그들의 매질이 결코 '사랑'에 의한 것이 아님을 말해주는 마지막 한 가닥 양심의 증거이지 않았을까. 매에 자신만의 고유한 이름을 붙여 놓은 분들도 있었다. '아나코'('아나콘다'를 딴 이름이겠다.)나 '코브라' 같은 이름이 생각난다. 이 분들에게서는 솔직히 사디스트적인 냄새가 풀풀 난다.

학교에서 이런저런 말도 안 되는 이유로 제법 맞았다. 일종의 '연좌 체벌'로 반 전체가 매 타작을 당하는 경우도 많았다. 직접 맞은 것 이상으로 훨씬 더 자주 친구들이 맞는 것을 보았다. 아이들이 등교하는 교문이나 일과 중 교무실, 수업 중인 교실 등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았다. 운동장에서 하는 팔굽혀펴기나 선착순 달리기는 애교에 불과했다. 그야말로 체벌의, 체벌에 의한, 체벌을 위한 시절이고 학교였다.

매질을 포함한 체벌은 군대에서도 줄기차게 만났다. 곡괭이 자루와 야전삽 등 사물 매에서부터 도끼로 쪼개 놓은 장작이나 권투 글로브 등 기상천외한 매들이 내 앞에 새로 등장했다. 일제 시대로부터 이어지는 유서 깊은 군대 내 체벌은 상상을 초월했다. 솔직히 나를 때리고 내 몸에 고통을 가하는 이들에게 총 한 방 갈겨버리고 탈영해 버릴까라는 생각을 할 때도 있었다.

그래도 꾹 참은 건 한결같은 믿음으로 나를 돌봐주신 부모님 덕분이었던 듯하다. 어린 시절 부모님께서는 내 몸 어느 한 곳에 가볍게라도 손찌검 하신 적이 없다. 험악한 말로 가슴에 상처 한 번 주지 않으셨다. 그런 두 분의 한결같은 사랑이 있었기에 학교와 군대에서 만난 수많은 폭력을 이겨낼 수 있었던 것 같다.

매질이든 신체 벌이든 아이 몸에 손을 대고 고통을 가하는 선생님들이 이구동성으로 하는 말이 있다.

"다 너(희)를 위한 거야."

기괴하다. 아이를 위하는 일에 어찌 아이를 아프고 고통스럽게 하는 매질이 포함될 수 있단 말인가. 어떻게 혀를 내빼물게 하는 힘든 신체 벌을 어린 아이들에게 가한단 말인가. 아이에게 관심이 있고 아이를 사랑하니까 체벌한다는 말도 있다. 할 말을 잃게 만드는 궤변이다. 이렇게 말하는 걸 용서하시라. 그들은 중증의 '변태적인' 사디스트가 아닌가!

얼마 전, 박근혜 대통령이 사회부총리 겸 교육부장관 내정자로 한국교육학회 회장 김명수 씨를 지명했다. 김 내정자는 유수한 국립 교원 양성 기관인 한국교원대학교의 명예교수이기도 하다. 원로 교육학자 축에 끼어도 부족하지 않은 '스펙'이다.

그 김 내정자 문제로 교육계가 시끄럽다. 많은 이가 과거 그가 쓴 칼럼 글을 문제시한다. 이른바 진보 교육감들이 의욕적으로 추진한 무상급식 정책이나 학생인권조례 등에 비방성 딴지를 건 게 아니냐면서 말이다. 합법적인 교원노조인 전교조에 대해 노골적으로 적대감을 드러내는 점도 입길에 올랐다. 요며칠 사이에는 제자의 석사논문을 표절한 의혹에 휩싸여 있다.

내가 보기에, 최근 불거진 김 내정자 관련 의혹 중 가장 압권은 체벌에 대한 김 내정자의 태도 문제다. 그는 올해 초 <문화일보>와의 인터뷰(2014년 1월 14일 자)에서 "체벌은 없애야 한다고 생각한다"라고 밝혔다. 평교사 시절 체벌을 한 적이 있지만, 자신의 아이를 낳고 나니 남의 아이들에게 체벌을 가하기 어려워졌다는 이유를 댔다.

'체벌을 가하기 어려워졌다'는 말에 주목하자. 이는 체벌을 원천적으로 하지 않는다는 말이 아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체벌을 할 수도 있다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근거 없는 무리한 억측으로 몰아세우지 말기 바란다. 증거가 있다.

언론 보도에 따르면, 김 내정자는 2010년 9월 13일 우리나라 최대 교원단체인 한국교원단체총연합회(한국교총) 기관지 <한국교육신문>에 실은 칼럼에서 체벌이 단기적으로 다른 학생의 보호나 수업 분위기 확보에 도움을 주는 점을 부정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인권조례를 통해 체벌만을 금지하는 것은 학교 현장을 너무도 모르는 처사라고 비판하면서, 교사들이 단순히 상담과 타이름, 벌점만으로 비행의 정도가 심한 학생을 통제하는 데는 무리가 있다고도 말했다.

인터넷에 공개된 프로필을 보면, 김 내정자는 1975년부터 서울 강서중학교에서 교사로 근무했다. 한국교원대 조교수는 1993년부터였다. 당시에는 조교수 이전에 전임강사라는 직급이 있었다. 전임강사에서 조교수로 승진하는 데 최소 2년이 걸리니 그가 학교 현장에 몸을 담은 기간은 15년 내외다. 짧은 시간은 아니다.

그렇다고 김 내정자가 칼럼에 쓴 '학교 현장'에 대한 의구심이 쉬이 사라지는 건 아니다. 김 내정자가 학교 현장에 있었던 기간은 1970~1980년대였다. 그가 칼럼에서 언급한 학교 현장은 2000년대 중반 이후로 봐야 한다. 그가 실제로 경험한 학교 현장과 현재의 학교 현장은 엄연히 서로 다른 시대에 속하는 것이다. 그가 과거의 경험으로 현재의 상황을 재단하고 있는 건 아닌지 의구심이 드는 이유다.

폭력이 일상화한 현실 속에서 교사 생활을 한 그가 체벌의 불가피성이나 정당성을 설파하는 건 어찌 보면 자연스럽다. 하지만 그런 시대가 분명 지났음에도 체벌의 의미나 가치를 강조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시대착오적인 사고에 물들어 있다는 의심을 갖게 하기 때문이다. 그런 것이 아니라면 그는 사적으로 들은 체벌 관련 사례를 이른바 진보교육감들의 학생인권조례를 '까기' 위해 부풀린 것으로 비판받을 수도 있다.

나에게는 "체벌은 없애야 한다고 생각한다"라는 그의 최근 체벌관이 거짓으로 보인다. 그는 체벌 철폐론의 근거로 자신의 아이들을 들었다. 아이들 때문에 다른 아이에게 손을 댈 수 없게 됐다면서 말이다. 그렇다면 학교 현장을 거론하며 체벌의 불가피성을 강조한 2010년 전후의 시점에는 그에게 자녀들이 없었다는 말인가. 교사들을 상대로 한 글과 일반 국민을 상대로 한 글에서 체벌에 대해 모순적인 주장을 펼쳐 놓은 것이다. 어느 한쪽 말이 거짓말일 수밖에 없는 이유다.

학생인권조례를 통해 체벌을 금지하는 학교들이 많다. 그럼에도 많은 교사가 아이들에게 공공연히 체벌을 가한다. 지각 때문에 아이들에게 오리걸음을 시키고, 수업 시간에 수업을 방해했다고 손바닥을 때리기도 한다. 무지막지한 학생부 교사로부터 모욕적인 체벌을 당하는 경우도 적지 않을 것이다. '조례'라는 법이 있는데도 이 모양이다. 여기에 체벌의 불가피성을 은연중에 갖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이 교육부 수장이 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김 내정자는 비행 정도가 심한 학생을 통제하는 데 상담과 타이름, 벌점만으로는 무리가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비행 정도가 중하든 경미하든 체벌은 학생 행동 교정에 결코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는 '장기적'이라는 걸 전제로 말했지만 '단기적'으로 봐도 그렇다. 매질이나 신체 벌로 학생을 교화할 수 있다는 논리는 시대착오적인 식민주의나 군국주의 체제하에서나 어울린다. 학생을 체벌로 바꾼다는 발상 자체가 비교육적임은 두 말 할 필요가 없다.

나는 올해부터 160명이 넘는 '괴물' 중2과 함께 지내고 있다. 한 학기가 다 돼가는 지금까지 아이들에게 한 번도 매를 들지 않았다. 오리걸음이나 앉았다 일어서기, 팔굽혀 펴기 등 그 어떤 신체 벌도 가한 적이 없다.

그렇다고 아이들이 늘 내 말에 고분고분하기만 한 것은 아니다.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나를 쏘아보고, 수업 시간에 쉼 없이 재잘거리며 수업을 방해하는 아이들이 있다. 삐딱한 말투와 행동으로 가슴에 불을 지르는 아이들도 없지 않다.

그런 아이들을 대하면 교사는 아주 강력한 체벌로 아이들을 억누르고 싶은 유혹에 빠진다. 그럴 때 학교 관리자인 교장이 체벌에 관대하면 교사가 좀 더 쉽게 매를 드는 게 지금 우리나라 학교 현장의 안타까운 현실이다. 하물며 교육부와 같은 최상급 기관 수장이 체벌을 유연하게 바라보는 상황임에랴. 대단히 의심스러운 '체벌관'을 가진 김 내정자가 교육부 장관으로 입각해서는 안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매질을 비롯한 체벌에 자주 노출된 아이들은 다른 아이들이 당하는 체벌에 둔감하다. 친구가 무슨 잘못을 하면 거리낌 없이 선생님에게 그 친구를 때려야 한다고 말하는 아이들이 적지 않다. 어떤 식으로든 체벌이 있어서는 안 된다. 체벌에 관대한 교육부 장관은 더욱 그렇다. 누구 말마따나 '국제 교육학계의 금기사항'인 체벌을 대한민국 교육부의 트레이드 마크로 만들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덧붙이는 글 | 제 오마이뉴스 블로그(blog.ohmynews.com/saesil)에도 실릴 예정입니다.



#김명수 교육부장관 내정자#체벌#매질#박근혜 대통령#진보교육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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