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위 명문대로 불리는 연세대학교 내에 '학벌 카스트'가 존재한다는 <한겨레21> 1018호 <"감히 연세대 동문 동문 거리는 놈들…">기사가 온라인에서 연일 화제다. 기사에 따르면 입시 전형과 성적, 소속캠퍼스와 단과대에 따라 같은 연세대학교 내에서도 일종의 계급이 정해진다고 한다. 온라인 상에서는 다수의 누리꾼들이 기사가 연세대학교의 온라인 커뮤니티 내의 문제를 과도하게 부풀리고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
그러나 비상식적 차별주의자가 존재하는 현실 자체를 '부정'해서는 안 된다. 분명 적극적 차별주의자들은 소수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현실에는 소극적 분리를 조장하는 상대적 다수도 있다. 이 다수는 언제든지 적극적 차별을 주장하는 이들로 변할 수 있다.
비록 기사에 나온 만큼 적나라한 수위의 언어는 아니지만 '조려대'(고려대학교 조치원 캠퍼스), '원세대'(연세대학교 원주 캠퍼스) 등의 '차별적' 어휘는 현실에서도 비일비재하게 쓰인다. 이런 어휘 사용에 별다른 문제의식을 제기하지 않고 방조하는 이들도 있다. 내가 소속되어 있는 고려대학교 내에서도 비슷한 종류의 차별을 볼 수 있다. '조려대 애하고 같이 팀플(팀 프로젝트)를 했는데 X 같더라', '분교 캠퍼스 애들은 왜 이중으로 학력을 세탁하려 하느냐' 등의 이야기가 심심치 않게 들린다.
차별적 인식을 바탕으로 한 어휘 사용은 소속 캠퍼스에만 국한된 얘기가 아니다. 편입생이나 외국인 학생과 함께 팀 프로젝트를 하기 싫다고 말하는 학생을 찾기는 어렵지 않다. 소속 단과대가 어디인지, 어떤 전형으로 입학했는지, 어느 고등학교를 졸업했는지에 따라서도 상대를 구분 짓고 차별화하려는 인식이 종종 발견된다. '상식'적인 '다수'의 학생들 사이에서 두드러지게 활개치지는 못해도, 고려대학교 온라인 커뮤니티 고파스에서, 고려대학교 대나무숲 페이스북 페이지에서, 술자리 뒷담화에서 숨어 있던 담론들이 조금씩 새어 나오고 있다.
이 현상에서 중요한 점은 차별적 어휘를 쓰는 이들이 제한된 공간에 갇힌 소수의 '악마'가 아니라는 것이다. 이러한 인식과 담론은 이제 특정 누군가에게 국한된 문제가 아니다. 적지 않은 숫자의 '평범한' 학생들에게까지 조금씩 하지만 확실히 번지고 있다.
개인의 계급을 구분하고 계급에 따라 차별그런 점에서 <한겨레21>의 기사가 "'20대 개새끼론'을 재생산한다"거나 "무고한 대학생을 악으로 규정한다"고 무작정 비판하는 것은 옳지 않다. 세연넷 익명 게시판에 카스트론을 쓴 학생만큼은 아니지만 분명 학내에서 차별적 언행을 하는 사람은 많다. 옅은 층위의 분리 의식을 가진 학생은 분명히 무시해도 좋을 만한 소수가 아니다.
세연넷 익게의 유저들은 비뚤어진 시대의 자화상이다. 그들을 낳은 시대는 우리가 같이 살고 있는 현대 한국 사회이다. 현재 우리 사회는 생산 수단의 소유만으로 차별하는 사회가 아니다. 온갖 기준으로 개인의 계급을 구분하고 계급에 따라 차별한다.
이러한 세태 속에서 개인의 학력 역시 순수한 무풍지대로 남을 수 없다. 동일한 노동을 해도 고졸이 대졸보다 돈을 덜 버는 것은 당연한 일이며, 대학은 'SKY'를 들어가야만 한다. 고등학교조차도 특정 외고를가지 않고서는 실패한 인생으로 낙인 찍힌다. 이러한 인식이 대학 내부를 침범하고 학생들의 인식에 이끼처럼 스며들고 있다.
카스트 제도를 주장하는 이들은 '학력 자본'에 따른 계급 의식을 수용한 이들이다. 우리는 이들을 '학벌의식에 찌든 20대', '대학 사회를 더럽히는 더러운 미꾸라지' 정도로 치부하면 안 된다. 우리는 이미 일베의 사례를 알고 있다. 그들의 존재를 악마로 규정하며 사건을 끝낼 것이 아니라 사회가 이 정도로 심각하게 오염되고 있다는 '지표'로 여겨야 한다.
일베가 대한민국은 아니지만 일베를 낳은 것은 대한민국이다. 일베의 문제는 대한민국의 문제이기도 하다. 학벌 카스트의 문제를 일부만의 문제로 한정 짓는 순간, 이 문제가 끊임없이 확대·재생산되어 눈 앞의 현실로 실체화할 여지가 생긴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을 가리켜 우리와 전혀 다른 악, 일부의 일탈로 규정하는 행동은 비생산적이다. 이를 공론장으로 꺼낸 기자를 선민의식을 가진 누군가로 몰아가는 것은 정당한 비판이 아니다.
우리는 대학교 입학 성적이 인생은커녕 대학 내에서의 삶 조차도 규정하지 못한다는 점을 이야기해야 한다. 그들이 스스로 사용하는 어휘와 주장이 얼마나 차별적이고 폭력적인지를 지적해야만 한다.
그들을 낳고 방조한 우리는 책임이 없는가건설적으로 <한겨레21>의 기사를 소화하고 이 문제를 해결하려면, 차별을 조장하는 이들이 우리 사회의 구성원이라는 점을 인정해야 한다. 현재의 사회 구조 그리고 이를 방조하는 우리가 그 구성원들을 양산하는 데 일조하고 있다는 점을 뚜렷하게 인지해야 한다. 브레히트의 말처럼 "좋았던 옛 시절이 아니라 나쁜 현재로부터 시작'해야만 한다. 현재의 인지뿐만 아니라 현재의 문제가 가져다 줄 미래의 영향까지 예상해야 한다.
현재는 소수의 분란인 것처럼 보이지만 그러한 차별을 소수의 문제로 치부하고 무시한다면, 언젠가는 우리의 눈 앞에 커다란 폭력으로 실체화될 수 있다. 평화헌법을 개정하자던 일본의 '넷우익'이 '아베 정권'을 낳고, '지역 차별'을 정의로 삼는 '일베'가 광장으로 나오려는 것처럼 말이다. 극우세력들이 프랑스 사회에서 저렇게 활개칠 줄 누가 예상이나 했을까.
차별을 조장하는 악마성은 누구에게나 발현될 수 있다. 갑과 을의 횡포가 한국 사회를 뜨겁게 달굴 때, 이 횡포에서 우리는 '갑' 개인이 유별난 악마가 아니라는 점을 알고 있다. 악마는 '갑'과 '을'을 만드는 구조, '을'이 '갑'에게 복종할 수밖에 없게 만드는 구조다. 비단 갑과 을뿐만 아니라 차별과 분리를 조장하는 권력 구조가 한국 사회를 지배하고 있다.
일부의 악행을 개인의 악마성에 귀결시키는 것은 정답이 아니다. 그 일부를 단죄한다고 하더라도 또 다른 일부가 계속해서 재생산된다. 이 구조를 바꾸지 않는 이상 그들은 끝없이 탄생한다. 그들을 우리와 아무런 관계가 없는 타자로 설정하는 것은 우리의 책임감을 잠시 덜 수는 있어도, 문제를 해결하지는 못한다.
구조의 문제를 외면하고 유병언이 세월호의 모든 원인인 것처럼 몰아가는 것은 최선책이 아니다. 평범한 다수 개인들의 악마성이 발현되지 않는 사회 구조를 만드는 것이 이 문제의 해결책이다. 문제의 일부를 낳고 그 존재를 묵인한 대학교 그리고 우리는 아무런 책임이 없을까. 우리는 어쩌면 <한겨레21>의 때 이른 경고에 감사해야 할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