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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가는 이 길이 어디로 가는지, 어디로 날 데려가는지…."

가수 g.o.d의 <길>을 흥얼거려 본다. 노래 가사를 들을 때마다 마음이 무겁다. 무거우면서도 자꾸 찾아서 듣게 된다. 아직도 잘 모르겠다. 내가 지금 맞는 길을 가고 있는 것인지. 졸업을 눈 앞에 둔 4학년 취업준비생의 방학은 아직도 방황으로 가득하다.

주변을 돌아보면 다들 참 열심히도 산다. 누구는 휴학을 하고 기업체 인턴을 시작했다. 어떤 친구는 미국으로 교환학생을 떠났고, 다른 친구는 공모전에 도전하며 수상 실적을 쌓고 있다. 학년이 올라갈수록, 졸업이 가까워질수록 마음은 더 불안해졌다.

4학년 취업준비생의 방학, 깊어지는 고민

고등학생 때는 대학만 진학하면 근심걱정과 이별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지금 돌아보니 헤어지지도, 떠나가지도 못하고 있다. 근심과 걱정은 끈적거리는 액체마냥 나에게 달라붙어 있다. 고등학교는 밑그림이 그려진 종이에 열심히 색만 입히면 되는 색칠공부같은 거였다.

대학교는 텅 비어 있는 도화지같다. 대학생들은 하얀 도화지에 저마다의 개성을 담뿍 넣어 그림을 그려야한다. 그래서 오히려 막막하다. 나는 이 도화지에 어떤 그림을 그리고 싶은 것일까, 어떤 색을 입히고 싶은 것일까.

지난 6월, 4학년 1학기 기말고사가 다가왔을 때도 매학기 그랬던 것처럼 괜히 마음이 조급해졌다. '한 학기가 또 끝나가고 있구나' 하는 느낌이 들었다. 차라리 학교에 가는 게 방학보다 낫다. 학기 중에는 그저 정해진 수업 시간에 들어가서 강의를 듣고, 과제를 하고, 시험을 보면 된다. 하지만 방학은 나에게 온전히 주어진 빈 시간이다. 그 빈 시간은 가능성의 시간이라기보다 선택하기 두려운 압박의 시간이 된다.

우물쭈물대다가 지나버린 1학년의 방학이 후회됐다. 뭐라도 해야겠다는 생각에 2학년 때부터 이것저것 시도했다. 특히 방학 기간을 이용해 스펙을 쌓기 위해 고생했다. 해외봉사를 갔다오고 멘토링 캠프를 다녀왔다. 방학으로 모자라 휴학을 한 적도 있다. 4학년으로서 맞이하는 여름방학은 또 어떻게 보내야할지 고민이 깊어간다.

고민 끝에 컴퓨터를 켜고 들어가 본 취업 관련 사이트. 각종 활동들이 나를 유혹하고 있다. 저 활동만 하면 이번 방학을 알차게 채울 수 있을 것만 같다. 설레는 마음으로 수많은 대외활동 모집 공고를 뒤적인다. 하지만 설렘은 이내 한숨으로 바뀐다. 대체 무엇을 해야 할까. 남은 대학 생활을 후회 없이 해낼 수 있는 활동은 무엇일까. 이 활동을 하면 나는 방학을 '잘' 지냈다고 할 수 있을까.

기업과 기생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했던 그 시절

대부분의 대학생들이 그렇듯이, 나도 조급한 마음에 대외활동을 시작하게 됐다. 2학년이 됐을 때부터 이것저것 달려들기 시작했다. 뭐라도 한 번 해보는 것이 안 하는 것보다야 취업할 때 도움이 될 것이라는 '불순'한 마음이 동기였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직접 자기소개서를 써 보기도 하고, 면접을 보기 위해 낯선 장소를 찾아가보기도 했다. 왜 1학년 때부터 하지 않았나 후회한 적도 있었다.

처음에는 복잡하고 어려웠던 대외활동 지원도 계속 하다 보니 노하우가 생겼다. 어떻게 하면 매력적으로 자소설(자기소개서+소설)을 쓸 수 있는지, 어떻게 나를 '팔기 위해' 홍보해야 합격할 수 있는지 알게 됐다. 이제 합격하기로 마음먹은 웬만한 대외활동은 손쉽게 붙었다.

2학년 때부터 지금까지 서포터즈, 마케터, 홍보대사, 기자단 등 다양한 분야의 다양한 스펙을 쌓아 왔다. 기업체에서 나에게 주는 미션을 수행했다. 회사 제품을 홍보하기 위한 글을 '생산'했다. 기획안을 제출하거나 직접 행사를 진행해보기도 했다. 그렇게 정신없이 바쁘게 치이다 보면 나름 알차게 대학 생활을 보내고 있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지나고 보면 허탈한 경험이 많았다. 이력서에 쓸 수 있는 한 줄의 경력이 나에게 남은 전부였다. 한 장의 수료증과 한 장의 단체 사진 정도만이 내가 무언가를 했음을 증명하고 있었다. 재미나 보람, 순수한 호기심이나 열의보다 써 먹기 좋은 경력에 매진하다보니 성취감이나 만족감은 먼 나라 얘기였다. 기업은 나를 써 먹고, 나도 기업을 써 먹는다. 우리는 서로에게 기생해서 서로를 필요로 하는 정도의 관계였다.

국토대장정에 도전하는 대학생들의 동기는 다양할 것이다. 하지만 나에게는 처음으로 순수한 의도로 도전한 활동이었다.
▲ 국토대장정 국토대장정에 도전하는 대학생들의 동기는 다양할 것이다. 하지만 나에게는 처음으로 순수한 의도로 도전한 활동이었다.
ⓒ 채상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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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스펙을 먹고 마셔도 그 허기와 갈증은 해결되지 않았다. 그럴 때마다 내가 되돌아보는 경험이 있다. 지난 2012년에 떠났던 국토대장정이다. '젊어서 고생은 사서 한다'는 말은 속담이 아니라 취업시장의 전제다. 나 스스로 고생했음을 보여줘야만 취업의 문턱을 뚫을 수 있다. 하지만 처음으로 정말 고생을 한 번 해보고 싶었다. 스스로에게 자극을 주고 싶어서 객기를 부려봤다. '청춘'이라는 말이 더 이상 두근거리지 않았지만, 이번에는 그 두 글자에 설렜다.

덕분에 작열하는 태양빛에 검게 그을리고, 양 발은 물집으로 뒤덮여 낑낑댔다. 625km를 온전한 내 두 발로 걸었던 23일은 잊을 수 없는 기억이었다. 내가 지금 걷고 있는 행동이 나중에 써 먹기 좋은 스펙이 될 것이라 생각하지 않았다. 내가 가야할 인생의 길을 알지 못하고 있었고, 아직도 내 도화지에 어울리는 색을 찾지 못했기에 무작정 걷고 싶었다.

국토대장정이 끝났을 때, 수료증이나 단체사진이 담아내지 못하는 무언가가 가슴에 남았다. 뭐라고 설명하기는 어렵다. 국토대장정 이후의 내 삶이 드라마틱하게 바뀐 것도 아니다. 여전히 나는 방학이 두렵고, 무작정 달리고 있는 주변 친구들과 나를 비교하며 스스로를 옥죄고 있다. 하지만 그러는 가운데에도 그 때의 추억, 그 때의 뿌듯함이 나를 버티게 해주는 힘이다.

나만의 씨앗이 싹을 틔울 그날을 위해

어떤 활동으로 이번 방학을 색칠할지 여전히 고민이다. 여전히 길에 대한 확신은 없다. 내가 칠해온 색깔들이 괜찮은 선택이었는지도 알 수 없다. 그래도 이제는 이득이 되는 일을 찾기보다는 경험이 되는 일을 찾으려고 노력한다. 학생으로서 할 수 있는 다양한 활동을 하고 싶다. 국토대장정 이후 내 마음 속에 하나의 씨앗이 생겼다. 꿈·설렘·도전·열정·청춘의 씨앗이다. 앞으로 도화지에 칠할 색을 고르는 데 도움이 될 씨앗이다. 이 씨앗으로부터 새로운 색을 뽑아낼 테다.

헛된 희망에 자신을 팔아넘기지 않는 것.
진정한 자신을 찾아 뿌리를 내리는 것.
그대, 씨앗만은 팔지 마라
- 박노해 <그대, 씨앗만은 팔지 마라> 중에서

고민하는 나에게 선배가 보내준 글귀였다. 사실 공감은 잘 되지 않았다. 헛된 희망을 향해 도전해보는 것도 청춘 아닐까. 청춘은 실패해도 된다고 하지 않았던가. 그 흔한 말을 마음 깊이 받아들고, 실천을 결심하기까지는 어려웠다. 그래도 씨앗만은 팔지 말라는 말이 어떤 의미인지는 알 것 같았다. 내가 팔지 않을 씨앗은, 잃어버려서는 안 되는 그때의 경험, 그 때의 설렘이다.

마음 속으로 씨앗을 품은 채 학기보다 어렵지만, 학기보다 알찬 방학 생활을 꿈꿔본다. 오늘도 내 마음 속에는 두려움이 크게 자리 잡고 있다. 하지만 이를 이겨내려고 발버둥치는 약간의 설렘도 있다. 나에게는 씨앗이 있으니까. 씨앗을 품은 채 취업 관련 사이트에 접속해본다.


태그:#대학생, #방학, #학기, #스펙, #인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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