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동네에 아주 고수 농사꾼이 있는데 못 다루는 기계가 없고 용접에다 미장은 물론 배관과 전기까지 만능 일꾼이다. 매년 여름날 동네사람들이 다 모여 길가 풀을 깎는날이 있는데 이 양반이 지팡이를 짚고 발목 깁스를 하고서 나타났다. 안전장구를 다 했었지만 예초기 작업 하다가 돌멩이에 날이 부러지면서 정통으로 발목으로 날아들어 크게 다치신 것이다. 그래서 접었던 꿈 하나를 다시 펼쳐들기 시작했다. 바로 예초기를 대체하는 대형 낫이다.
서서 쓰는 필리핀의 반달 낫오죽하면 버스를 세워서 유심히 살펴보았을까. 필리핀 북주지역인 바기오지방에 전통농업 견학을 갔다가 차창 밖으로 보니 뻣뻣하게 서서 도로변 풀을 깎는 모습을 보고서다. 낫으로 쪼그리고 앉아서 풀을 베는 걸로 알다가 서서 풀을 베는데 일하기도 편하고 능률도 우리하고는 비할 바가 아니었다.
옛 소련 국기에 나오는 반달형 대형 낫인데 끝 부분이 안쪽으로 살짝 휘어져 있어서 지면에는 낫이 수평으로 닿았다. 잠시 양해를 구하고 직접 해 보니 두 손으로 하는 작업이라 힘도 덜 들었다.
귀국을 하자마자 혹시나 하고 철물점에 가서 물어보았지만 역시나였다. 쇼핑몰을 뒤져도 없었고 농기구 전문 매장도 마찬가지였다. 예초기는 가장 고약한 것이 매캐한 매연이다. 배터리로 돌아가는 예초기도 있지만 여전히 맘에 들지 않는 것은 그 귀한(?) 풀들이 고속으로 돌아가는 예초기 날에 완전 박살이 나서 풀을 밭에 깔아줄 수가 없이 그냥 버려야 한다는 점이다. 가장 안전하다는 나일론 끈 예초기도 그런 면에서는 똑 같았다. 예초기는 진동과 소음도 몸을 괴롭혀서 1시간 이상 일을 할 수가 없다.
필리핀에는 있는데 대 대한민국에 왜 없을쏘냐, 싶어서 백방으로 수소문을 했지만 우리나라는 너무 발전(?)한 나라라는 게 문제다. 모든 것들이 자동 아니면 전동공구여서 수작업 농기구는 종적을 감춘 지 오랜 상태다. 쇼핑몰에 나온 대형 낫은 수초를 베는 것이거나 가면무도회에 쓰는 장난감 플라스틱 낫이 전부였다. 풀과 나무 잔가지까지 쳐 내려는 내 용도에는 맞지 않았다.
사이드(Scythe)를 만나다'반달형 대형 낫'을 포기하고 있었는데 예초기에 다친 동네사람을 보고는 다시 수색에 나섰다. 웬만하면 석유를 쓰지 않는 농사를 지어야겠다는 다짐과도 맞아 떨어지는 그 농기구를 구하고야 말겠다는 오기도 생겼다.
지성이면 감천인가. 작년 가을에 그 낫이 나타났다. '한겨레21'에 연재하는 강명구 교수의 칼럼에서 본 것이다. 이름은 달랐지만 내가 바라는 바로 그 낫이었다. 이름이 '사이드(Scythe)'라고 하는데 강 교수는 도깨비 낫이라고 불렀다.
얼른 쇼핑몰에서 사이드라 치고 검색을 했더니 아뿔싸. 너무 비쌌다. 국내제품은 없고 외국에서 수입하는 것인데 20~30만 원 대였다. 궁리를 하다가 인터넷에서 사진을 몇 장 뽑아서 동네 대장간을 찾았다. 장날에만 문을 여는 대장간에 갔는데 아쉽게도 그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대장간은 폐쇄되고 없었다. 다른 지역 장날에 맞춰 대장간을 찾아가서 사진을 보여드리고는 손짓발짓 해 가며 그림까지 그려서 보여줬다.
대장장이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한참을 궁리하다가 못 만들겠다는 것이다. 이유는 뻔했다. 비싸게 치여서 못 만든다는 것이라 돈은 얼마든지 드릴테니 염려 말라고 했다. 슬그머니 겁이 났지만 흥정을 해서라도 만들고 싶어서 얼마 드리면 만들겠냐고 했더니 내 예상보다 적은 금액이 그의 입에서 나왔다. 이런 횡재가.
그렇게 해서 열흘 뒤에 찾으러 갔더니 내가 그린 그림보다도 훨씬 기계공학적이고 신체구조적인 낫을 내 놓으셨다. 낫 길이가 40센티에 달하고 약간 묵직해서 힘도 잘 받게 만들었다. 맘에 꼭 들어서 5천원을 더 드리자 대장장이 아저씨는 긴 자루까지 하나 끼워 주셨다. 반달형이 되면 낫에 감기는 풀 양이 너무 많아 힘들다고 하면서 직각을 조금 넘는 각도로 만드셨고 낫의 목을 안쪽으로 살짝 휘어서 허리를 안 굽혀도 낫의 날이 지면에 수평을 유지하도록 한 기막힌 작품이었다.
드디어 매연도 진동도 없는 수동 예초기집에 오기가 바쁘게 휴대용 금강석 숫돌을 옆에 차고 밭으로 올라갔다. 낫을 잘 갈아서 그동안 엄두를 못 내던 묵은 밭에 가서 풀을 베 보았다. 풀은 물론 밭두렁 찔레가시랑 조팝나무까지 단숨에 날아갔다. 점차 요령도 생겼다. 허리에 반동을 줘 가며 상체를 돌리면 2-3미터까지 풀들이 나란히 쓰러졌다. 팔뚝을 찔려가며 기어 들어가 낫으로 베던 찔레가시는 낫을 살짝 걸고 당기기만 하면 내 몸에 생채기 하나 안 내고 속절없이 잘려났다.
풀들은 고스란히 걷어서 감자밭과 고추밭에 덮으니 일석이조, 일석삼조였다. 매연도 소음도 없고 지형에 따라 낫질 반경을 조절할 수 있고 장애물이 있으면 마음대로 피해갈 수도 있으니 엔진 예초기는 이제 무덤으로 가야 할 처지가 된 것이다.
휴가 나온 아들에게 낫을 보여주고 일을 시켰더니 신기해하면서 군말 없이 일을 했다. 농사꾼은 연장이 좋아야 하지만 연장이 재미있으면 금상첨화다. 작년 가을에 싶었던 호밀도 순식간에 다 베어내고 호박을 심었다.
밀양 송전탑을 강행하면서 할머니들이 경찰들에게 들려나오는 장면을 보고 낫 이름을 바꾸어도 될 것 같았다. 탈핵 낫!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한살림연합 발행 <살림이야기> 7월호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