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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든 것은 실체가 없으니, 영원의 그림자에 불과하리라.
모든 것은 실체가 없으니, 영원의 그림자에 불과하리라. ⓒ 김종길

밤 10시 30분. 허름한 사무실 안, 어두컴컴한 방에서 자고 있던 사내가 부스스 일어났다.

 

"영원사까진 1만 8천 원입니다."

 

나중에 도마마을로 내려올 거라고 하자 도마마을에서 영원사까지는 2만 2천 원이란다. 앞선 그를 따라 도마마을에 일단 차를 세워두고, 마천을 통틀어 세 대뿐인 택시 중의 한 대인 그의 택시를 타고 영원사에 올랐다. 이곳 토박이인 그는 옛 군자사 절터와 하정, 음정, 양정마을에 대해 이야기했다. 마침 길 공사가 한창이라 하필 바쁠 때 일하는 군청에 대해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이기는 했지만 그는 이 고장에 대해 설명하는 걸 잊지 않았다.

 

"좋은 산행 되세요."

 

3만 원을 건네자 그가 내민 거스름돈은 6천 원이었다. 아까 2만 2천 원이라고 하지 않았냐고 되물었더니 거스름돈이 없다는 것이었다. 다음에 만나게 되면 2천 원을 주겠다며 대수롭지 않다는 듯 건성으로 말했다. 대개 거스름돈이 없으면 '다음에 만나면 주세요'라고 하는 게 도리인 듯한데 사내는 언제 만날지 알 수 없는 이방의 손님에게 다음에 받아가라는 특이한 셈법을 구사했던 것이다.


예나 지금이나 지리산 속 제일의 절

 

영원사는 해발 900미터가 넘는 곳에 있다. 입구는 호로병의 목처럼 좁지만 안으로 들어서는 순간 탁 트인 공간과 마주치게 된다. 뒤로는 산이 푸근하고 앞으로는 산봉우리가 멀찌감치 감싸주는 양지바른 곳이다.

 

전망 좋고 햇빛이 넘치는 고요한 땅, 수행처로는 이만한 곳이 없겠다 싶다. 오래도록 머물고 싶은 공간이다. 일제강점기에만 해도 100여 칸이 넘는 아홉 채의 건물이 있었던 제법 큰 사찰이었지만 지금은 전각 몇 채가 전부다. 그래도 풍경만큼은 넉넉하고 평온하다. 이곳을 찾은 옛 선현들의 눈에도 영원사는 산중의 깊고 고요한 암자였던 것 같다.


 영원사 툇마루에서 보면 앞의 봉우리가 병풍을 두른 것 같이 암자를 에워싸고 있다.
영원사 툇마루에서 보면 앞의 봉우리가 병풍을 두른 것 같이 암자를 에워싸고 있다. ⓒ 김종길

지리산을 유람하고 <유두류산록>을 남긴 유몽인은 1611년(광해 3) 4월 2일에 갈월령을 넘어 영원사(영원암)에 이르게 된다. 지금의 영원사를 이야기하고 있는 게 아닌가 여길 정도로 그는 당시의 영원사를 세밀하게 묘사하고 있다.

 

"다시 지친 걸음을 옮겨 영원암에 이르렀다. 영원암은 고요한 곳이다. 높은 터에 시원하게 탁 트인 곳이어서, 눈앞에 펼쳐진 나무숲을 내려다보았다. 왕대나무를 잘라다 샘물을 끌어왔는데, 졸졸졸 옥 구르는 소리를 내며 나무통 속으로 흘러내렸다. 물이 청량하여 갈증을 풀 수 있었다. 암자는 자그마하여 기둥이 서너 개도 되지 않았다. 그러나 깨끗하고 외진 것은 사랑할 만하였다. 이곳은 남쪽으로는 마이봉을 마주하고, 동쪽으로는 천왕봉을 바라보고, 북쪽으로는 상무주암을 등지고 있다."


유몽인보다 앞선 1580년(선조 13) 4월 6일에 영원암을 찾은 변사정도 <유두류록>에서 "산이 깊어 세속과는 단절되었는데, 푸른 회나무와 초록 단풍이 비단을 펼친 듯 사람을 가로막고 있었다"고 하였다.

 

그보다 한참 뒤인 1910년 3월 18일에 영원암에 오른 배성호는 <유두류록>에서  "한 줄기 조계(漕溪)는 아홉 굽이 계곡을 울리고, 골짜기를 가득 메운 등나무 그늘은 빽빽하여 마치 푸른 연기 같았다. (…) 뒷산은 날개를 펴서 에워싼 듯하고, 앞의 봉우리는 병풍을 두른 것 같아 조용하고 밝았다. 난간에 기대어 바라보았는데, 방호산 만 겹의 봉우리들이 한 손에 잡을 수 있을 듯하였으니, 과연 산 속 제일의 절이었다"고 영원사를 묘사하고 있다.


 영원사는 외진 곳이지만 깨끗하여 예나 지금이나 사랑할 만한 곳이다.
영원사는 외진 곳이지만 깨끗하여 예나 지금이나 사랑할 만한 곳이다. ⓒ 김종길
이중환은 <택리지>에서 영원동, 둔자사, 유점촌을 남사고(조선 중기의 학자로 풍수학에 조예가 깊었다)가 '복지'라 하였다고 적고 있다. 이렇듯 영원사는 풍수적으로 빼어난 땅으로 수행하기에 좋은 절이었음을 알 수 있다. 예나 지금이나 지리산 속 제일의 절이었다.


그럼에도 이 높은 곳까지 오르기는 쉽지 않았던 모양이다. 지금도 양정마을에서 한 시간 남짓 가파른 산길을 오르거나 차 한 대 겨우 지날 급경사의 길을 한참이나 올라서야 영원사에 이를 수 있다.

 

1869년 2월에 지리산을 유람한 송병선은 <지리산북록기>에서 아직 눈이 쌓여 있는 상봉을 보며 깊은 곳에 자리하고 있는 영원암을 찾아가 볼 수 없음을 탄식했다. 1902년 40일간 지리산을 유람한 송병선의 아우 송병순은 <유방장록>에서 다리의 힘이 소진되어 매우 그윽하고 깊숙한 영원암을 갈 수 없는 아쉬운 심정을 토로했다.


 영원사는 깊고 그윽하여 예부터 고승들의 수행처로 이름나 있었다.
영원사는 깊고 그윽하여 예부터 고승들의 수행처로 이름나 있었다. ⓒ 김종길

담박하고 고요한 기풍 이어진 고승들의 수행처

 

법당을 찾았다. 인기척이 없다. 늦은 봄날의 나른함이 법당 깊숙이 들어왔다. 영원, 이것의 실체는 무엇인가. 절 이름이 어째서 영원사일까. 모든 것은 실체가 없고 실체가 없으니 나 또한 없는데, 영원이라는 것은 대체 무엇인가? 여기에 실마리를 준 분이 있으니 경암 응윤 스님(1743~1804)이다.


"나는 이와 같이 보았다. 영원암의 담박하고 고요한 기풍이 예로부터 지금까지 길이 이어진 것을. 티끌 세상에 묻혀 살던 중생들, 메마른 마음이 모두 소생하리라. 이 문 안으로 들어온 자는 마땅히 번뇌를 내려놓고 평안히 수양하리니, 어찌 굳이 서방정토로 왕생할 필요가 있으랴. 이 법당으로 들어온 자는 곧 여래를 친견하리니, 어찌 굳이 다른 부처를 별도로 염불하리. 오랜 세월 이루어지고 사라진 것들, 얽히고 얽힌 공적과 허물, 모두 영원(靈源)의 그림자에 불과하리. 미혹되는 허상과 묵은 자취는 모두 이 영원 속에 있는 사람과 상관없는 일, 그러므로 '모든 상(相)은 실제의 상이 아니다.'라고 한 것이다. 눈으로 보고 소리로 구하는 것은 모두 삿된 행위이다."


응윤 스님은 <경암집-영원암 설회 사적기>에서 영원암은 1722년 화재로 소실되어 고찰할 수 있는 사적이 없다고 했다. 그러면서 절의 유래를 옛날 조사 영원이 이 암자에 주석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도 하고, 만수동 가장 깊은 근원에 있다 하여 '영원암'이라 하였다고 밝히고 있다. 만력연간(1573~1619)에 부용 영관, 청허 휴정, 청매 인오 세 분 조사께서 서로 이어 주석하며 득도했다고 덧붙이며 이로 인해 영원암의 이름이 더욱 드러났다고 했다. 


 영원사는 신라 경문왕 때 영원조사가 창건했다고 전해지나, 여러 기록으로 보아 조선 중기에 창건된 것으로 보인다.
영원사는 신라 경문왕 때 영원조사가 창건했다고 전해지나, 여러 기록으로 보아 조선 중기에 창건된 것으로 보인다. ⓒ 김종길

 영원사 오른쪽 능선 솔숲에 있는 청매조사 승탑. 청매조사 인오는 휴정 서산대사의 법제자로 선풍을 날린 스님으로 유명하다. 인근 도솔암을 창건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영원사 오른쪽 능선 솔숲에 있는 청매조사 승탑. 청매조사 인오는 휴정 서산대사의 법제자로 선풍을 날린 스님으로 유명하다. 인근 도솔암을 창건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 김종길

한편 영원사는 신라 경문왕 때 영원조사가 창건하였다는 이야기가 전해지나 이를 뒷받침할 문헌과 유물도 없을 뿐더러 영원조사는 경상도 함양 사람으로 조선 중기의 스님이다. 10세 때 범어사에서 출가하여 재물에 욕심이 많은 스승을 떠나 금강산 영원동에서 정진하여 깨달음을 얻었으며 만년에 지리산으로 들어와 이곳 영원사를 창건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여러 기록으로 보아 영원사는 조선시대에 창건된 것으로 보는 것이 옳겠다.


1610년(광해 2)에 박명부, 정경운 등과 지리산을 유람한 박여량은 <두류산일록>에서 "서쪽으로 1백여 리쯤 되는 곳을 바라보니 새로 지은 두 절이 있는데, 무주암 서쪽에 있는 절을 '영원암(靈源庵)'이라 하고, 직령 서쪽에 있는 절을 '도솔암(兜率菴)'이라 하였다. (…) 사찰로서 말한다면 금대암, 무주암, 두류암 외에 영원암, 도솔암, 상류암, 대승암 등은 예전에 없었던 절이다"라고 했다. 이보다 앞선 1580년(선조 13) 4월 6일에 변사정이 영원암을 찾았다는 기록이 <유두류록>에 있는 걸로 보아 이때쯤 영원암(영원사)이 지어진 것으로 보인다.


영원사에 보관되어 있는 고승들의 방명록이라 할 수 있는 <조실안록(祖室案錄)>에는 부용 영관, 청허 휴정, 사명 유정, 청매 인오 스님 등 109명의 고승들의 이름이 등재되어 있다. 일제강점기에만 해도 100칸이 넘는 아홉 채의 전각이 있었던 영원사는 1948년 여순사건 때 소실되었다가 1971년 상무주암에 머물던 김대일 스님이 복원하였다고 한다.


 7, 8년 전에 있었던 다람쥐를 위한 보시그릇이 오늘 와 보니 없어졌다. 끼니때마다 밥을 주던 보살님도, 맛나게 먹던 다람쥐도 보이지 않는다. 어디로 갔을까.
7, 8년 전에 있었던 다람쥐를 위한 보시그릇이 오늘 와 보니 없어졌다. 끼니때마다 밥을 주던 보살님도, 맛나게 먹던 다람쥐도 보이지 않는다. 어디로 갔을까. ⓒ 김종길

해우소 옆의 고목은 그대로였다. 수년 전에 봤던 널찍한 바위도 그대로 있었다. 다만 평평한 바위에 올려놓았던 그릇이 없었다. 다람쥐가 절간을 드나들며 시나브로 먹었던 넙데데한 밥그릇. 어디로 갔을까. 그때의 보살님도 보이지 않는다. 더 이상 절에 나오시지 않는 걸까. 절간은 너무나 고요했다. 마음씨 좋은 보살님이 산짐승과 다람쥐를 위해 매 끼니때마다 내놨던 보시 그릇이 지금은 없어졌다.

 

여행자가 다가가도 먹는 데에만 집중했던 다람쥐는 전혀 놀라지도 않았었다. 다람쥐의 눈에는 낯선 사람도 자신에게 밥을 주는 보살님처럼 선한 존재로 보였으리라. 깨우침을 얻고자 하는 수행자의 육바라밀을 굳이 말하지 않더라도 보살님은 몸으로 행하고 있었다. 절의 오랜 역사와 이곳을 거쳐 간 고승들의 행적도 대단하지만 이 작은 보시그릇이 주는 울림은 컸다. 보살님도, 다람쥐도, 밥그릇도 보이지 않는 오늘, 빈 바람만 절 기둥에 기댄 스님의 지팡이를 흔든다. 

 

졸졸졸 물소리가 났다. 상무주암 가는 길로 들어섰다.

 암자는 고요하여 인적은 없고, 빈 바람만 절 기둥에 기댄 스님의 지팡이를 흔든다.
암자는 고요하여 인적은 없고, 빈 바람만 절 기둥에 기댄 스님의 지팡이를 흔든다. ⓒ 김종길

 상무주암 가는 길. 영원사는 칠암자 순례길의 베이스캠프 같은 역할을 한다.
상무주암 가는 길. 영원사는 칠암자 순례길의 베이스캠프 같은 역할을 한다. ⓒ 김종길
칠암자 순례길

지리산에서도 오지 중의 오지였던 마천면 삼정리 일대는 최근 들어 찾는 이들이 부쩍 늘고 있다. 인근 백무동의 명성에 가려 있다가 지리산자연휴양림이 생기고 벽소령으로 오르는 산길로 많은 사람들이 찾게 되면서부터다. 삼정리를 대표하는 것은 '칠암자 순례길'이라 부르는 산길이다. 지리산 중북부능선 자락에 도솔암, 영원사, 상무주암, 문수암, 삼불사, 약수암, 실상사 등 일곱 개의 암자와 사찰을 잇는 산길이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영원사는 이 '칠암자 순례길'의 베이스캠프 같은 역할을 한다. 도솔암이 출입금지 구역인 탓도 있지만 대개의 산행 코스는 영원사에서 출발하여 상무주암, 문수암, 삼불사를 거쳐 도마마을로 하산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도솔암에서 실상사까지의 일곱 암자를 모두 순례하는 당일 코스는 건각이 아니라면 힘들기 때문이다. 하루 만에 이 일곱 개의 암자와 절을 둘러볼 수는 있겠으나 자신을 찾아가는 사색과 순례가 목적인 이 길에서 굳이 속도를 다투는 세속의 시간으로 무리할 필요는 없다. 지금은 영원사에서 삼불사, 삼불사에서 약수암까지 산길이 개방되어 가파른 견성골을 내려가서 다시 약수암을 오르는 번거로움은 없어졌다.


#영원사#칠암자순례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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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의 미식가이자 인문여행자. 여행 에세이 <지리산 암자 기행>, <남도여행법> 등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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