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꽃 구경을 떠나야 하는 때가 왔습니다. 7월 하순 연꽃 만개를 놓치면 1년을 기다려야 합니다. 대구경북에서 가볼 만한 연꽃 만개 연못을 미리 소개해 드립니다. 공갈못, 벼락지, 유호연지에서는 특히 역사 공부도 할 수 있습니다. - 기자말
연꽃을 바라보노라면 주돈이가 <애련설>에서 그 꽃을 '꽃의 군자'로 상찬한 까닭이 저절로 헤아려진다. 아마도 그것은 주돈이가 연꽃의 본질을 두고 '진흙에서 나왔으면서도 진흙에 물들지 않고, 맑은 물에 씻기면서도 요염하지 아니한 꽃'이라고 정의한 데에 내심 동의하기 때문일 것이다.
'향은 멀수록 더욱 맑고 당당하며, 고결하게 서 있으며, 멀리서 볼 수는 있어도 함부로 가지고 놀 수는 없는' 연꽃을 보려면 어디로 가야할까. 대구에서 가장 가까운 곳은 물론 반야월의 연꽃테마파크이다.
동구 대림동 728번지 일대의 너른 들판에 가득 연꽃을 키우고 있는 연꽃테마파크는 이미 이름이 널리 알려진 유명 답사지로 해마다 7월 말이면 말 그대로 무수한 인파로 넘쳐난다. (2013년 8월 12일자 오마이뉴스
"아직도 대구 가서 사과를 찾습니까?" 참조)
역사가 서린 연꽃 만발 연못은 어디?단순히 연꽃만 보는 것이 아니라 그곳에서 인간의 역사를 함께 보려면 어디를 찾는 것이 좋을까? 대구경북에서는 상주 공검면 공갈못, 의성 단북면 벼락지, 청도 화양읍 유호연지가 연꽃과 역사를 동시에 보여주는 대표적 답사지로 추천할 만하다.
공갈못과 벼락지가 둘레 대부분을 논으로 내놓으면서 아득한 과거의 명성을 많이 잃어 너무나 아쉽지만, 그래도 연꽃 만발의 아름다운 풍경은 여전한 장관을 보여주고 있으므로 이번 여름에는 꼭 찾아보시라고 권하고 싶다.
7~8월에 피는 연꽃은 절정기가 7월 하순이다. 특히 유의할 일은 연꽃이 아침에 피었다가 정오 이전에 꽃봉오리를 닫아버린다는 사실이다. 즉, 오후에 현장을 찾으면 꽃이 활짝 피어나 있는 절경을 볼 수가 없다. 집에서 벼락지, 공갈못, 유호연지까지의 이동 시간을 감안하여 출발해야 한다는 말이다.
의성군 안계면 안계고등학교 담장 옆에 가면 '대제지 유허비'가 세워져 있다. 삼한 시대부터 이곳에 거대한 인공 호수가 있었다는 사실을 기려 주민들이 건립한 기념비이다. 물론 비석 주위는 현재 경상북도에서 가장 넓은 들판인 안계평야를 이루고 있고, 호수의 흔적은 찾아보기 어렵다.
대제지는 큰 둑으로 에워싸인 연못이라는 뜻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흔히 안계평야의 동북쪽 끝 지점에 남아 있는 벼락지를 대제지의 일부로 본다. 대제지가 식민지 시대, 또 해방 이후 주변에 개천지 등 거대 연못이 조성되면서 메워져 농토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물론 대제지 유허비를 본 후 벼락지로 가서 연꽃을 감상하는 순서로 여정을 잡는 것이 올바른 교육과정이라 하겠다.
상주 공갈못은 김제 벽골제, 밀양 수산제, 제천 의림지와 더불어 삼한 시대에 축조된 거대 인공 호수의 하나로 평가받는 역사의 현장이다. 처음에는 <동국문헌비고>의 '남방의 못 가운데 최대'라는 표현이 증언해주는 것처럼 둘레가 8.68km나 되는 거대한 호수였다. 하지만 지금은 그 크기가 대략 1/300로 줄어들어 둘레가 약 400m밖에 안 된다.
고종 때 둘레가 논으로 바뀌면서 지금 규모의 2배 정도로 못이 축소되었고, 1950년 오태저수지가 완공되면서 더욱 작아져 현재의 크기가 되었다. (오마이뉴스 2013년 9월 20일자
"연밥 내가 따줄 테니 내 품에 안겨다오" 참조)
사화의 혈흔이 남아 있는 청도 유호연지고성이씨의 청도 입향조(入鄕祖)는 모헌공 이육 선생이다. 입향조는 청도에 처음 들어와서 살기 시작한 선조라는 뜻이다. 무오사화와 갑자사화 때 피해를 입어 선친이 죽고, 또 부관참시되고, 백형과 중형이 유배를 가는 참사를 당한 뒤 그는 벼슬살이에 염증을 느끼고 귀향하여 안동에 살면서 거제와 진도에서 각각 귀양살이 중인 두 형을 만나러 종종 청도를 지났다.
그는 오가는 길에 '산수가 수려하고 생리(生利)가 넉넉한 이곳 유곡리'(현지 안내판의 해설)에서 최자순의 딸과 혼인을 하기에 이르렀고, 그 이후 눌러 살게 되었다. 그런데 유곡리에는 본래 이름이 신라지(新羅池)인 연못이 있었다. 이육은 이 신라지를 깊이 2m, 둘레 700m, 넓이 7만여 평으로 키운 뒤 연꽃을 심었다. 그리고는 신라지라는 이름을 유호연지(柳湖蓮池)로 바꾸었다.
유호연지 안에는 정자가 한 채 지어져 있다. 현지 안내판은 이육 선생이 '1531년 호상(湖上)에 4간 겹집으로 방 2간, 마루 10간인 특이한 구조의 모헌정사를 지어 선비들을 만나고 후학을 가르쳤다'고 해설하고 있다. 1531년이라면 지금부터 480년 이상 전이다. 하지만 이곳 군자정은 중앙정부나 지방정부가 지정한 문화재는 아니다.
100년 이상 전의 것으로서 가치가 인정되는 옛것은 문화재로 지정이 되는데 군자정 안내판에는 그에 대한 언급이 없다. 즉, 현재의 군자정 건물은 모헌정사 건물이 낡아 없어진 뒤 그 자리에 새롭게 지어진 것이다.
다만 '1919년 이 정자에서 400여 인의 향내 유림을 주축으로 하여 군자정 강학계(講學契)를 창계하여 매년 음력 8월 18일에 모여 경전을 강송하고 시를 지어 읊기를 한 해도 거르지 않고 선생을 추모하여 오고 있다'는 안내판의 내용으로 보아 1919년 혹은 그 이전에 정자가 지어졌고, 이름도 군자정으로 정해진 것으로 추정된다.
물론 정자에 군자정이라는 이름이 붙은 것은 주돈이의 <애련설>에서 영향을 받은 결과이다. 아니나 다를까, 현지 안내판도 '선생이 벼슬을 버리고 이곳에 연을 심고 정자를 지어 은둔 생활을 하게 된 것은 군자의 삶을 살고 싶었기 때문'이라고 해설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