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준이 쓴 <동의보감>에 닭은 허약해진 기운을 보충해주고 정신을 맑게 한다고 했다. 하지만 우리가 닭을 보고, 손으로 잡고, 입으로 뜯을 때 느끼는 감정은 맑은 정신보다는 차라리 욕망의 폭풍에 가깝다.
하악하악! 세상에 치킨보다 맛있는 게 또 있을까. 그러고 보면 기독교, 이슬람교, 힌두교 중 닭을 금기로 하는 종교는 없다. 어쩌면 다른 건 다 포기해도 닭만은 안 된다는 인류의 거센 항의에 신들마저도 금기의 내용을 바꿨는지 모른다. 그 지독한 사랑 덕에
미국에서만 한 해 약 72억 마리의 닭이 인류를 위해 몸을 바친다.
한국 역시 닭을 향한 사랑을 멈추지 않는다. 국내 1인당 닭고기 소비량은 2000년 6.9kg을 기록한 이후 꾸준히 증가해 2012년에는 11.6kg를 기록했다. 작년 한 해에만 7억 6천여 마리의 닭이 도축돼 한 많은 이승을 등졌다. 이쯤 해서 드는 못된 생각! 내셔널지오그래픽에서 방영한 <인류 재앙 가상 시나리오: 석유가 사라진다면>, 그리고 지금 쓰고 있는 <인류 재앙 가상 시나리오: 닭이 사라진다면> 중에서 어떤 삶이 더 지옥 같을까. 사람들은 문명적 편의의 상실과 맛의 상실 중 어느 것을 최악으로 택할까.
그래서 무작정 써보기로 했다. 가정에 돈이 드는 것은 아니니까. 다만 그에 따른 부작용은 각오해야 한다. 이 글을 읽고 감정 이입이 심해질 경우 동반될 신체적 정신적 고통은 그 누구도 책임지지 않는다. 글을 읽는 내내 현기증이 지속된다면 빨리 백스페이스를 누르고 지체없이 가까운 치킨집에 전화를 걸어라.
[오전 4시] 닭들이 사라졌다, 흔적도 없이
초복인 2014년 7월 18일 새벽, 닭이 사라졌다. 그들의 움직임에는 그 어떤 흔적도 없었다. 양계장에도, 도축장에도 닭은 없었다. 텅텅 비어 버린 닭의 빈자리에는 '너희 때문에 더 이상 못 살겠다'는 느낌적인 느낌만이 남아 있었다. 닭의 의도를 파악하는 건 나중 일이었다. 가장 먼저 타격을 입은 것은 도축장과 물류센터였다.
닭이 사라지자 전국에 닭고기를 공급하는 집하장 직원들의 일거리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집하장은 불이 꺼진 채 을씨년스러웠다. 탑차들이 시동이 꺼진 채 길게 늘어서 있었다. 운전기사들이 차에서 나와 담배를 피워댔다. 운전기사들은 그날 기름 값을 허공에 날렸고 닭을 받지 못한 가공 공장들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됐다. 닭고기 유통물량의 약 85%를 책임지는 대기업 계열화 업체(자회사) 종사자들이 순식간에 거리로 나앉을 위기에 놓였다.
[오전 9시] 곤경에 처한 음식점들, 텅 빈 집하장피해는 파도처럼 밀려왔다. 점심준비를 못한 음식점들이 곤경에 처했다. 복날을 대비해 전날 대량으로 발주한 물량에 닭이 송두리째 빠져 있자 닭을 취급하는 음식점들은 반 휴점 상태가 됐다. 각 교육청과 군부대, 관공서는 긴급회의를 소집해 부랴부랴 식단수정에 나섰다.
방송 매체들은 실시간으로 닭의 멸종을 속보로 내보냈다. 두 시간 뒤인 오전 11시 반, 정부는 행정안전부, 농림축산식품부 재난대책본부의 브리핑을 통해 닭이 지구상에서 사라졌음을 공식화했다. 유럽연합에서, 미국에서, 호주에서도 닭이 없어졌다는 소식도 함께 전파를 탔다. 국내 닭 수입 물량의 약 절반을 대고 있던 태국이 교역국 중 제일 먼저 수출금지 조치를 발동했다. 유럽연합도 수출 금지 조치를 공식화했다. 1인당 63.8kg와 44.6kg의 닭고기를 소비하는 아랍에미리트연합과 미국은 일찌감치 국가 비상사태를 선포했다. 오바마 미 대통령은 국가안보긴급회의를 소집해 대체재인 칠면조 재고를 최대한 확보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오전 11시] 제과 제빵업의 유동성 위기 사태 2차로 타격을 입은 곳은 제과, 제빵 업계였다. 더 이상 주어진 생산량에 맞게 달걀을 공급할 수 없었다. 대체재인 메추리알을 부랴부랴 공수해 봤지만 역부족이었다. 약 3조 2천억 원 규모의 제과제빵 산업이 순식간에 도산 위기에 놓였다. 생산라인 가동이 전부 일시 중단됐고, 기업들은 계란의 대체재를 다각도에서 확보하기 위해 비상이 걸렸다. 코스피, 코스닥에 상장된 치킨 프랜차이즈 업체들의 주식은 순식간에 휴지 조각이 됐다. 관련 중소기업들은 순식간에 찾아온 유동성 위기를 견디지 못하고 부도 위기에 처했다.
상황이 겉잡을 수 없이 커지자 청와대가 성명을 발표했다. 국가 비상사태라는 대통령의 담화가 서울역 로비를 울렸다. 곧바로 시장의 충격을 막기 위한 경제부처장관급 회의가 긴급 소집됐다. 국무총리실은 각급 공무원들에게 가공육 재고 소진을 최대한 억제하기 위해 닭고기 소비를 전면 금지할 것을 지침으로 하달했다. 카페에선 와플이, 빵집에선 모든 종류의 빵이, 냉면집에선 삶은 계란이 자취를 감췄다. 분식집에서도 더 이상 라면에 계란을 풀어주지 않았다. 닭고기와 계란은 더 이상 지구상에서 찾을 수 없는 식재료가 돼가고 있었다.
[오후 6시] 끝내 찾아오고만 '치킨 쇼크' 오후 6시, 제대로 주문을 받을 수 없는 전국의 치킨집과 닭 요릿집이 문 닫을 위기에 놓였다. 영세자영업의 대명사인 치킨집은 2011년 통계청 기준으로 2만9095곳이다. 인구 1682명당 한 집 꼴이다. 여기에 닭을 취급하는 한식집 일부와 전체 음식점의 10.1%를 차지하는 호프집 6만793곳의 매출 피해까지 감안하면 닭의 멸종으로 인한 피해 규모는 추산 자체가 어려울 정도다. 전국의 업주들이 폐업을 막기 위해서 할 수 있는 일이란 닭이 다시 돌아오길 기도하는 것뿐이었다. 하지만 끝내 '치느님'은 답하지 않았다. '치맥'은 이제 세상에 없는 음식이 됐다. 맥주의 소비량도 덩달아 격감했다.
이제는 모두가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닭은 멸종했다. 공짜 닭을 그리며 모아온 고객들의 쿠폰과 치킨집 사장님의 노후는 함께 휴지 조각이 될 처지에 놓였다. 한국금융연구원에 따르면 50대 이상의 고령 자영업자는 전제 자영업자의 34%에 달한다. 여기에 가계부채 중 자영업자 가구가 차지하는 비율은 43.6%다. 시중 은행들은 가계부채 부실화 우려를 현실로 받아들여야 하는 상황을 맞았다. 한국은행 내부에선 가계부채 리스크 폭발이 현실화 되는 것이 아니냐는 우려가 대두됐다. 각 언론사에선 현재의 상황을 '치킨 쇼크'로 규정했다.
[오후 11시] 닭의 맛을 떠올리며 괴로워하는 사람들
더 큰 문제는 맛이었다. 사람들은 닭의 맛을 아직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구름 같이 폭신폭신한 동물성 생크림의 맛. 포크로 조심스럽게 떠먹던 서교동 치즈케이크의 느낌. 부드러운 상수동 베이커리의 초코 에클레어. 다진 마늘즙을 슬쩍 묻혀 내는 문래동 치킨의 자태. 충청도 왕천시장 순살 파닭의 환상적인 육즙. 두류산 치맥페스티벌에서 먹었던 프라이드 치킨의 여유. 찬 물에 발을 담그며 먹었던 뜨끈한 한탄강 백숙의 추억. 에펠탑처럼 쌓인 닭 뼈를 보며 포만감을 느끼던 순간순간들.
닭의 살결이 혀에 닿던 기억이 떠오를 때마다 사람들은 괴로워했다. 닭이 지구를 떠난 지 20시간이 지났지만 인간들은 아직 닭이 지구에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았다. 어제 자정에 먹다 남은 치킨 조각과 예비군 PX에서 사온 슈넬 치킨이 그 사실을 부정하게끔 만들었다. 사람들은 24시간 전까지만 해도 언제든 느낄 수 있는 맛을 송두리째 잃어 버렸다. 모두가 억울하고 답답해서 좀처럼 잠을 잘 수 없었다.
다시 현실, 닭이 언제나 지구에 머물거라는 착각 이제 현실로 돌아오자. 예나 지금이나 닭은 곡물 다음으로 인류가 가장 의존하는 식재료다. 변한 것은 닭에 대한 인간의 의존성이다. 이전에는 욕심을 버리면 그만이었지만, 이제 닭이 들어가지 않은 음식을 찾는 게 더 어려워졌다. 의존성이 더 강하게, 오래 지속될수록 자본주의 산업구조의 확장을 이끈다. 이 과정에서 생물에게는 유전적 단일화라는 작업이 선행된다. 이유는 간단하다. 더 많이 팔아야 하니까.
문제는 이런 방식의 품종개량이 유전적 취약성을 낳는다는 데 있다. 지난 20년간 다국적 과일 회사들은 바나나의 생산성 극대화를 위해 수출용인 캐번디시 종만을 집중 개발해 대량 생산을 시도했다. 바나나의 재래종들은 이 과정에서 상당수가 멸종했다. 그 결과 재배된 바나나들은 전염병 하나에 멸종 위기설이 돌 만큼 종의 존립이 위협받고 있다. 맛을 위해 유전적으로 단일화된 닭 역시 독감 바이러스에 쉽게 폐사하는 나약한 특성을 갖게 됐다. 조류독감이 국내에 처음 발생한 2003년부터 살처분된 닭과 오리는 총 2430만 마리에 달한다.
생물 다양성 훼손으로 인한 가축들의 유전적 취약성은 시간이 갈수록 커지고 있다. 세계식량농업기구(FAO)의 2000년 연례보고서에 따르면 지난 100년간 전 세계에서 1000여 종의 토종 가축이 품종 계량화 사업을 거치며 멸종했다. 사실상 멸종했던 한국의 토종닭이 유전자 복원에 성공한 건 2008년 밖에 되지 않았다. 재래종들과의 교류가 단절된 사육종들은 시간이 갈수록 전염병에 취약해진다. 아마 먼 미래에는 전염병으로 지구를 떠나려는 닭과 그걸 막기 위한 인류의 노력이 본격적으로 충돌하는 날이 올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이 모든 얘기들은 결국 '당신이 치킨을 감사하게 먹어야 하는 이유'쯤 되겠다. 이런 끔찍한 환경 속에서 닭이 언제까지 지구에 있어줄지 모르니까. 그들이 목숨을 던지는 모습이 지금은 당연해 보이지만, 제때 치킨을 먹지 않으면 현기증이 나는 인류의 금단증상을 언젠가 닭들이 역이용하는 날이 올지도 모르는 거다. 닭 없는 세상! 치킨의 종말! 베이커리의 멸망! 이건 진심 석유가 사라진 세상만큼이나 끔찍하다.
아아, 갑자기 현기증이 밀려온다. 빠, 빨리 가까운 치킨집에 전화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