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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어머니 김봉준 작. 이소선 여사 추모 그림
▲ 위대한 어머니 김봉준 작. 이소선 여사 추모 그림
ⓒ 김봉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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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찰서 유치장에 갇힌 이소선과 노조 간부들은 답답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서둘러 노조 일을 해야 하는데 이렇게 갇혀 있어서 일을 할 수가 없으니 이 얼마나 답답한 노릇인가. 이소선이나 간부들은 미칠 지경이었다. 이소선은 답답함을 이기지 못하고 경찰서 문짝을 발로 차면서 일을 할 수 있을 때까지 여론을 불러일으키기로 했다.

"이놈들아 노동조합 활동을 보장해준다고 해놓고 노동조합은 철저하게 막으면서 사람만 잡아 가두니 우리는 죽기로 다시 싸울 수밖에 없다."

이소선 일행은 경찰서 안에서 발작적으로 외쳤다. 드디어 기자들이 찾아오고 취재를 해가더니 이 일이 신문에 보도가 되었다.

경찰서에 잡혀간 지 사흘째 되던 날 노총 사무총장이 찾아왔다.

"이 여사, 이렇게 때려 부순다고 해서 무슨 일이 되겠어요? 일단 참으시고 우리말을 들으세요."

사무총장은 이소선을 달래려는 눈치였다.

"노동조합가입 방해를 안 한다는 보장 없이는 우리는 이 자리에서 죽든가 말든가 결판을 내야겠소."

이소선 등은 단호하게 말했다. 어차피 죽기로 각오한 몸들이었기 때문에 두려울 게 없다는 마음이었다.

"노총에서 책임지고 노조가입 방해를 중지시키고 조합원들을 사무실에 올라갈 수 있도록 하겠소."

결국, 노총 사무총장의 약속을 받고서야 경찰서를 나와 밥을 먹고 사무실로 갔다.

경찰서에서 싸움을 한 뒤에 사용주나 경찰의 노골적인 방해는 일단 줄어들었다. 그러나 아직까지도 노동자들은 노조사무실에 오는 것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이소선은 노동자들을 못 보니 반갑기 그지 없었다. 조합원이 있어야 노조를 꾸려나갈 수 있는 것이지 자기들끼리 사무실에 죽치고 있는 다고해서 노조가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어린노동자들이 너무도 그립고 안타까운 마음은 가슴을 타들어가게 만들었다.

행여나 어린 노동자들이 노조 문을 두드릴까 해서 목을 빼고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던 중에 어린 시다 몇 명이 1원짜리 떡을 사가지고 왔다.

"오빠들, 이것 드세요. 우리가 돈 거두어가지고 사 왔어요."

그 애들은 수줍은 듯 쭈뼛거리며 떡 봉지를 책상에 내려놓았다. 이소선은 이들이 얼마나 반갑고 고마운지 눈물이 뺨 위로 흘러내렸다. 그 어린 시다들이 돈이 어디 있어서 떡을 사 왔겠는가! 노조간부들은 그 시다들을 보고 큰 힘과 용기를 얻었다.

"우리가 반성하자. 지금 당장 어렵다고 좌절에 빠져 회의만 해서는 안 된다. 우리가 최선을 다 할 때 많은 사람들이 우리의 참맘을 알 수 있지 않겠냐. 우리는 죽지 말고 살아서 이 노동조합을 지켜야 한다."

이들 노조간부들은 어린 시다들이 사다 준 떡을 먹으면서 눈물로 맹세했다.

12월 25일. 사람들은 크리스마스라고 들떠 있었지만 이들은 끼니도 때우지 못하고 굶고 있었다.

이때 사무실 문이 열리더니 얌전하게 생긴 아가씨가 조심스럽게 들어왔다. 그 아가씨는 크리스마스카드를 만들어 판매한 돈이라면서 만 원을 내놓았다. 엄청 큰 액수였다. 이들은 그 돈을 보고 너무 놀라서 멍하니 서 있었다. 아가씨는 이들의 표정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팔을 걷어붙였다. 조합 간부들이 21일 밤에 싸움을 해서 사무실은 엉망진창이었다. 아가씨는 침착하게 깨진 화분들을 하나하나 정리했다. 살릴 수 있는 꽃은 따로 가려내어 화분을 사다가 심어놓고 깨끗이 청소까지 했다.

'노동자의 마음은 이렇게 착하고 아름다운데 가진 자들은 자신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 사람을 황폐하게 만드는구나. 왜 그들도 똑같은 사람인데 그럴까.'

이소선은 아가씨의 아름다운 행동을 보고 새삼스럽게 가진 자에 대한 생각을 다시 해보았다.

그 착하고 예쁜 아가씨는 미싱사로서 이름은 유정숙이다. 그 어려운 시절에 이런 마음으로 처음부터 박명옥, 유정숙, 임영란, 이정은 등 여성 조합원들이 참여했다. 이들이 노조에 참여함으로써 노조에 새로운 활기를 불어넣어 주었다. 삼동회를 비롯한 남자들만 노조활동을 해왔기 때문에 사용주들이 깡패집단이라고 악선전해대는 것을 이제는 피할 수가 있게 되었다. 참으로 중요한 시기에 참여한 사람들이다.

이렇게 여러 사람들이 노조에 참여하게 되니 차츰차츰 힘이 생겼다. 그러나 현실은 냉정했다. 돈이 없으니 굶는 것은 언제나 마찬가지였다. 이소선을 비롯 노조 간부들은 재정문제를 가지고 고민을 하다가 밤늦게야 집에 갔다. 집에 간다고 돈이 생기나, 무슨 뾰족한 수가 생기나 마음만 답답했다. 이소선은 장바닥에서 무 하나를 구해와 주워온 우거지를 비지하고 보리쌀로 죽을 끓여서 사람들을 주면 전태일 친구들이 어찌나 잘 먹든지·······그것을 바라보는 이소선의 속은 애간장이 다 끓었다.

이소선의 큰딸 전순옥은 낮에 시장 언저리에 가서 우거지를 주워 오는 것이 하루의 일과가 되어버렸다. 전순옥이 우거지를 주어다가 삶아놓으면 이소선은 저녁에 와서 죽을 끓였다. 운이 좋은 날은 보리쌀하고 밀까지 사다가 밥을 하곤 했다.

"오늘은 재수가 되게 좋은 날인데? 밥까지 다 먹고."

전태일 친구들은 밥을 떠먹으며 좋아들 했다.

그들은 온종일 사업장을 설치고 다니면 양말이 금새 다 떨어졌다. 이소선은 식구대로 양말을 다 벗게 해서 양말을 빨아 연탄불에 말려서 딸과 함께 밤늦게까지 꿰매는 게 일이었다. 이소선은 낮에는 중앙시장에 가서 헌옷 장사를 했다.

"너희들은 사무실에 출근해서 열심히 일들 잘 해라. 나는 시장에 가서 돈 벌어 올 테니까."

이소선은 전태일 친구들과 함께 집을 나서면서 당부를 하고 중앙시장으로 갔다.

헌옷 장사는 전태일 사건이 나기 전부터 해오던 것이었다. 전태일 사건이 터지고 노동조합을 해야 했기 때문에 계속 할 수가 없었다. 뭐니 뭐니 해도 노동조합을 하려면 돈이 필요하다는 것을 이소선은 절실하게 깨달았다. 그렇게 하려면 돈을 벌어야 했다. 상근자를 굶기지 말고 노동조합을 잘해나가기 위해서는 그가 옷 장사를 해야만 했다.

당시에는 가난하게 사는 사람들이 워낙 많아서 헌옷들을 잘 사 입었다. 이소선은 헌옷 장사를 하면 남들보다 돈을 더 많이 벌수가 있었다. 헌옷은 대개 군복, 작업복, 고물 등 여러 경로를 통해 나오는데 그 중에서도 죽은 사람의 옷을 갖다가 팔면 돈이 많이 남는다. 남들은 죽은 사람의 옷은 무섭다고 취급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소선은 사람이 죽으면 영혼은 떠나버리고 육신만 남는데 뭐가 무섭냐는 생각에 아무렇지도 않았다. 죽은 사람의 옷을 걷어다 그것을  밤새도록 깨끗하게 빨고 고쳐서 내다 팔면 아무런 손색이 없는 옷이 되었다.

하루는 최종인하고 신진철이 엉뚱한 말을 주고받고 있었다.

"어머니, 우리 암만 해도 고기나 한번 실컷 먹고 죽어야 할까 봐요."

이소선은 가슴이 철렁했다.

'쟤들이 지쳐서 이제 노동조합을 안 하려고 하는가보다.'
"고기가 어디 있어서 실컷 먹냐? 안 죽고 열심히 하면 되지 않겠냐!"

이소선은 애들이 못 먹다보니까 정신마저 이상하게 되는가 싶은 게 공연히 불안해졌다. 그날 저녁에 콩나물을 넣고 쌀로 죽을 끓였다. 그리고 그들한테 듬뿍듬뿍 퍼주었다. 돌이라도 씹어 삼킬 만한 한창 때의 젊은이들인지라 순식간에 먹어 치웠다.

"저녁 잘 먹었으니까 집에 잘 있어라 너희들이 노동조합 안하려고 하니까 나는 하나님 앞에 가련다."

이소선은 성경책을 들고 교회 갈 준비를 했다.

"어머니, 하나님 앞에 가면 뭐해요? 하나님이 밥을 주나요, 돈을 주나요?"
"그래도 기도를 해야지. 너희들이 노동조합 안하려고 하니까 나는 집에 못 있겠다."

이소선은 너무나 허탈해서 밤새도록 기도를 했다.

'하나님, 정말 죽어가는 생명을 구하려고 했는데 정부사람하고 사업주가 한통속이 되어서 노동조합을 방해하고, 쟤들은 배가 고파서 노조를 못하겠다고 하니, 우리 아들이 얼마나 답답해하겠습니까? 우리 하는 일이 나쁜 일이 아니니까, 제발 쟤들에게 고기 한번 먹여주게 해주세요.'


#이소선#전태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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