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중 교류가 언제 시작됐다고 특정하기는 쉽지 않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단군의 시대가 되면서 우랄알타이어계인 이 땅에는 한족들과는 별개의 정치적 문화적 국가가 만들어졌다. 이 시기를 기점으로 본다면 근 오천 년간 한중 교류가 이루어진 셈이다.
그 유구한 역사 속에서 가장 위대한 인물을 꼽으라면 누구를 꼽을까. 혹자는 중국에 가서 필명을 떨친 최치원이나 장군으로서 공을 세운 고선지 등을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이런 이들은 뭔가 부족하다. 그런데 이곳에 '김교각'을 넣으면 비로소 완전한 풀이가 완성된다. 우리나라에는 그다지 알려져 있지 않지만 중국에서는 유일하게 실존하는 보살이 된 김교각(金喬覺 696~794)은 중국에서는 '김지장'으로 더 많이 불린다. 그는 누구일까.
선덕여왕(재위 632∼647)의 시대가 지나고 신라는 당의 힘을 빌어 삼국통일을 이룩한다. 물론 당과의 갈등이 있지만 이 시기에는 한국과 중국의 가장 활발한 인적 교류가 이뤄진다. 7세기 중반부터 원효(元曉 617~686), 의상(義湘(相) 625~702)을 비롯해 혜초(慧(惠)超 704~787), 김운경(金雲卿 ?~? 821년 당 빈공과 합격), 최치원(崔致遠 857 ~ ?) 등 수많은 유학생이 당으로 가서 유학했다.
사실 통일신라 이후 고려나 조선 때도 유학생을 파견했지만 이 때만큼 왕성한 인적교류가 있었던 적은 없었다. 다시 인적 교류가 활발해진 것은 일제가 우리 땅을 점령한 이후부터 해방까지의 시간이었고, 이후 다시 교류가 축소되었다가 1992년 한중 국교 정상화 이후 다시 활발해졌다.
그런 인물 가운데 김교각이 지닌 가치가 높다고 보는 이유는 뭘까.
김교각은 선덕여왕의 시기를 지나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고 시간이 얼마 지난 후 성덕왕(聖德王 재위 702∼737)이 된 김흥광의 큰 아들이었다. 즉위한 성덕왕은 714년 18세인 교각을 당나라에 숙위학생으로 보낸다. 그 곳에서 교각은 현종의 부름을 받기도 하고, 대감(大監)직을 받는 등 두각을 나타낸다. 또 중국 최초의 사찰인 백마사(白馬寺)나 선종의 출발지인 소림사(少林寺)를 보고 불교에도 깊은 관심을 갖는다. 그렇게 4년이 지났을 때 교각은 어머니의 급전을 받고 신라에 귀국한다. 그 때는 교각의 어머니 성정왕후가 폐위되고, 동생인 중경이 태자로 책봉되는 등 왕실은 갈등의 연속이었다.
번민하던 교각은 한 절에서 출가하고, 719년에는 하얀개 체청(諦廳)만을 데리고 당나라행 배를 탄다. 이후 다양한 고난과 행적을 겪으면서 안후이성 북쪽에 있는 지우화산(九華山)에 도착한다. 그는 그곳에서 지주 민양화(閔諒和)가 불사에 필요한 땅을 묻자 가사자락으로 구화산 전체를 덮어서 그 땅을 얻는다.
이후 김교각은 그곳을 터전으로 수많은 사람들을 구제하고, 아름다운 덕을 펴서 그곳을 아름다운 정신이 깃든 땅으로 만든다. 중간에 그를 찾아온 어머니(혹자는 애인)가 울다가 눈이 멀자, 눈을 뜨게 해서 봉양하고, 그를 찾아온 숙부들에게도 불법을 베푸는 등 신념을 잃지 않았다.
서기 794년 7월 30일 김교각은 대중들을 불러놓고 가부좌를 한 채로 홀연히 입적했다. 제자들은 유체를 그대로 석함에 넣었는데, 3년 후에 석함을 열자 스님의 모습이 그대로 있었다. 제자들은 김교각이 살아온 것으로 알고 그에게 금분을 입혀 삼층석탑(육신보전)에 모셨다. 명 숭정제는 물론이고 청의 강희제, 건륭제 등도 편액을 내렸고, 시선 이백(李白)도 지장을 위한 시를 세 편이나 지었다.
김교각의 법명은 지장(地藏)이다. 불교에서 지장보살은 석가모니의 부촉을 받아 석가모니가 입멸한 뒤 미래불인 미륵불(彌勒佛)이 출현하기까지의 무불(無佛)시대에 6도(六道)의 중생을 교화·구제한다는 보살이다. 지옥중생을 모두 제도하기 전까지는 성불하지 않겠다는 불이기에 대부분의 사찰에도 지장전(地藏殿)이 있어 돌아가신 이들을 모시고 있다. 김교각은 이런 지장보살을 지향해서 법명도 지장으로 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자 중국 불교에서는 김교각 스님이 곧바로 지장보살과 동격이 되는 상황이 됐다. 중국 4대 불교명산들은 각기 모시는 보살들이 있다. 쓰촨에 있는 어메이산(峨眉山)은 보현보살도장(普賢菩薩道場)이고, 저지앙 푸투오산(普陀山)은 관음보살도장(觀音菩薩道場)이고, 산시 우타이산(五臺山)은 문수보살도장(文殊菩薩道場)이다. 그런데 이 세 산의 보살들은 모두 인도 불교에서 따온 부처님 제자들을 모신다고 보면 된다. 그런데 지우화산에서 김교각 스님은 지장보살의 현신으로 인식되어 김교각이 곧 지장보살이 되는 구조다.
사실상 중국에 유일하게 실존하는 불교의 신이 우리 조상이라는 점이 시사하는 바는 무엇일까. 왕실의 싸움에서 뛰쳐나와 홀연히 중원을 향했던 그의 마음은 무엇이었을까. 어머니와 숙부들이 찾아와서 신라로 돌아가 왕실을 바로잡자고 간곡하게 말했을 때 거절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만약 그를 찾아온 이들을 따라 신라로 돌아갔다면 어떻게 됐을까. 왕위에 오르든 왕위에 오르지 않든 그는 그만저만한 한 왕이 되었을 것이다.
그가 입적한 지 1200년이 넘은 지금 우리는 김교각 스님으로부터 많은 은혜를 입는다. 개인적으로는 2004년 가을 상하이에서 우연히 말을 나눈 스님이 내가 한국 사람이라는 말에 큰 호감으로 대화를 하던 기억이 있다. 2010년 가족들과 지우화산에 들렀을 때는 산에 있는 모든 이정표에 한글 표기가 되어 있는 것을 보고 놀랐다. 난징의 한 호텔에서도 아침 시간에 말을 건 스님은 우리가 한국 사람이라는 말에 김교각 스님의 후손이라며 축복을 빌어줬다.
공자는 '덕(德)은 외롭지 않고 반드시 이웃이 있다'(子曰德不孤必有隣)고 말했다. 김교각의 덕은 1000년을 이어서도 후손들에게 베풀어지고 있다. 아니 한국이라는 나라가 존속하는 한 수만 년이 가도 중국 사람들에게 그렇게 인식될 것이다. 한 사람이 이룬 역사치고는 너무 위대하지 않은가.
한중 수교 이후 무역을 비롯한 한중 경제교류도 이제 22년이 넘었다. 그 기간에 우리는 수천만 원 투자하는 자영업에서부터 수십억 달러를 투자하는 대형 프로젝트까지 다양한 일들을 벌였다. 또 이제 증가세는 꺽였지만 수십만 명의 사람들이 중국에서 유학하거나 중국을 겪었다.
한중 관계의 미래는 당장의 거래에서 수익을 나는 것도 중요하지만 가장 기본은 덕(德)을 바탕으로 한 큰 장사가 중요하다는 것은 불문가지다. 그 때 김교각 스님이 포기했던 왕권은 지금 돈의 가치로 따지면 얼마나 될 것인가. 사실 목표를 김교각 스님처럼 중국 불교사의 절대적인 영웅으로 잡을 필요도 없다. 가장 중요한 것은 이 땅의 바른 심성을 가지고 대륙의 사람들에게 감화를 줄 수 있는 사람이 어디에 있는가 하는 것이다.
신라 말기에 불교가 그런 역할을 했다면 지금 그런 역할을 해줄 수 있는 것은 무엇일가. 기업은 분명히 이윤을 추구한다. 그럼 점에서 중국에서 밀어닥치는 거대한 회오리는 이 땅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공포의 대상이 될 수 있다.
하지만 역사는 그리 짧은 것만이라고 할 수 없다. 당나라 장안에도 큰 부자들이 많았고, 송나라의 수도인 개봉이나 남송이 수도인 항주, 명의 수도였던 남경이나 북경에도 많은 부가 있었다. 청나라는 한 때 세계 GDP의 35%(지금 미국은 20%대다)를 차지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역사의 수레바퀴는 마른 대지를 굴러가기도 하고, 젖은 웅덩이를 굴러가기도 한다. 기업은 물론이고 개인에게 있어서 김교각 스님이 가르쳐준 만고의 지혜가 뭔가를 봐야하지 않을까. 그 덕은 외롭지도 않고, 시간이 흘러도 줄어들지 않고 이 땅의 후손들에게 넓게 넓게 비추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