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염 달린 교황이 있었을까?
'있었다.'
교황의 수염 기르기는 교회법 금지 사항인데 흥미롭게도 수염 기른 교황이 있었다. 최초의 수염 기른 교황은 바로 216대 교황 율리오 2세(재위:1503년~1513년)이다.
관광객 붐비기로 세계에서 손꼽히는 이탈리아에서는 이분을 업어 드려야 하지 않을까 한다. 왜냐하면 이탈리아를 찾게 하는 수많은 문화 예술품들에 바로 율리오 2세의 업적이 숨어 있기 때문이다. 르네상스 전성기 시기와 율리오 2세의 즉위 시기는 일치하는데 그는 이 시기에 예술과 문학 분야에 활발한 후원활동을 하였다.
그는 이탈리아의 보물 중에 하나인 베드로 대성전의 신축을 지시하였으며 당대 최고의 예술가인 미켈란젤로, 라파엘로, 브라만테 등의 곁에서 그들을 지속적으로 후원하였다. 이탈리아 보물 중에 하나인 시스티나 성당은 교황 선출을 위한 비밀회의인 콘클라베(conclave)가 열리는 곳인데 이 사실보다 더 잘 알려진 것은 미켈란젤로가 그린 천장화(천지창조) 일 것이다. 이 위대한 예술품을 지시했던 사람이 바로 교황 율리오 2세이다.
이 외에 미켄란젤로가 만든 많은 예술품에는 율리오 2세의 지시로 만들어진 것이 많다(엄밀히 말하면 미켈란젤로와 율리오 2세의 관계는 단순히 후원자와 예술가의 관계를 넘어 억압과 굴종이 버무려진 애증관계라는 게 맞을 것 같다). 지금 이탈리아가 가지고 있는 많은 보물 같은 예술작품의 탄생에는 르네상스 시기 막강한 영향력을 가진 교황 율리오 2세가 큰 역할을 한 것은 틀림없다.
13세기까지 교회법으로는 교황의 수염 기르기는 금지돼 있었다. 율리오 2세 역시 즉위 시에는 수염을 기르지 않았었다. 하지만 후에 볼로냐 지방을 교황령으로 탈환하려고 베네치아공화국과 치른 전쟁에서 많은 병사들이 사망하자, 그들을 위한 애도의 표시로 잠시 수염을 길렀다.
율리오 2세의 업적에 대한 평가는 차치하고 자신의 지시로 죽어간 병사들에 대해 수백년 지켜온 교회법까지 어겨가면서 수염으로 애도했던 행동은 지금 리더들이 본받아야 할 일이다. 율리오 2세는 애도의 기간이 끝난 뒤 사망하기 전에 자신의 수염을 밀어 다시 교회 전통을 지켰다.
그 뒤로 수염 기른 교황은 없었을까?선례라는 것은 무서운 것이다. 백범 김구 선생이 애송했다는 '눈 덮인 들길 함부로 걷지 마라'라는 시구처럼 누군가 한 번 하는 일은 후대의 하나의 선례가 된다. 219대 교황 클레멘스 7세(재위:1523년~1534년)는 율리오 2세에 이어 수염을 기른 교황이 됐다.
당시 신성로마제국이 부르봉 샤를 3세 등과 손잡고 로마를 점령하여 약탈을 자행하게 되었다. 1527년 있었던 로마약탈로 도시는 폐허가 되다시피 했고 많은 이들이 희생 되었다.
이에 클레멘스 7세는 희생 당한 사람들을 애도하기 위해 유폐기간 동안 교회법을 어기고 수염을 길렀다. 클레멘스 7세는 율리오 2세와 달리 애도 기간이 끝난 후에도 선종할 때까지 수염을 길렀다. 이 때문에 후임 교황들도 뒤를 이어 수염을 길렀고 그 뒤를 이은 교황들(무려 24명)이 242대 인노첸시오 12세 교황(재위:1691년~1700년)때까지 100여 년이 훨씬 넘는 기간 동안 수염을 계속 기르게 되었다(자료출처: 위키백과 참조).
자료를 찾아 보았지만 그 뒤로 수염 기른 교황은 더 이상 나오지 않았다.
교회법을 가장 잘 수호하고 지켜야 하는 교황이 교회법을 어겨 가며 수염을 기른 이유가 바로 희생자들의 위로와 애도의 표시였다니 놀랄만한 일이다. 율리오 2세는 교회법으로 따지면 법을 어긴 교황이지만 종교적 권위나 계율보다 현실의 고통을 감싸줄 알았던 교황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프란치스코 교황의 방한을 환영하며 간청한다
가난한 이들의 성자, 프란치스코 교황이 14일부터 18일까지 한국을 방문한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지난해 <타임>지 '올해의 인물' 선정 및 2014년 3월 미국의 <포춘(Fortune)>지 선정 세계에서 최고 영향력 있는 사람 1위로 뽑힌 종교지도자이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바로 교황의 권위에서 내려와 현실의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과 함께하는 그의 실천적인 행보에서 찾을 수 있다. 무개차 방탄유리 제거, 마피아에 대한 경고 메시지, 바티칸 은행 개혁 등 그가 보여주는 혁신적이고 파격적인 행동들은 신자 비신자를 넘어 많은 이들에게 울림을 주고 있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선출된 이후로 바티칸 시티를 찾는 관광객 수가 무려 3배나 늘었다고 하니 그가 주는 울림을 짐작할 만 하다.
이런 멋진 분을 이 땅에 모시게 되니 영광스럽고 축복이라는 생각이다. 비신자이긴 하지만 방한을 진심으로 환영하며 그의 사랑이 이 나라에 소외 받고 가난한 사람들과 지치고 상처 받은 사람들에게 위로와 희망의 빛이 되어주길 바란다.
사고 120일째(13일) 고통 속에 살아가는 세월호 유가족들과 각종 사고로 목숨을 잃은 군장병들 그리고 상처받고 소외된 수많은 이 나라 사람들을 생각하며 교회법을 어기고 희생자 위로를 택했던 율리오 2세의 수염을 떠올려 본다.
그리고 방한하는 프란치스코 교황에게 청한다. 수염까지 기를 필요는 없지만 진심으로 이 땅의 낮은 소리를 들어 주고 보듬어 주길 청한다. 특히 어린 고등학생을 포함해 300여 명의 생명을 죽여 놓고도 사고 원인은커녕 책임자 이름조차 못 밝히는 답답한 이 나라 국민들에게 힘을 주었으면 좋겠다. 이 나라 위정자들이 법과 제도, 권위와 명예보다 더 낮은 곳으로 임해야 함을 깨닫게 해주길 간절히 청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