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영선 새정치민주연합 비대위원장님,
저는 베를린자유대학교 정치학과에서 에너지 정책으로 박사학위 논문을 쓰고 있는 염광희라고 합니다. 늦깎이로 공부하는 처지에 그저 공부만 매진해도 될까 말까인데, 한국에서 벌어지는 일들로 밤잠 설치는 나날을 보내고 있습니다. 유민 아버지의 40일 넘는 단식을 지켜보면서, 그리고 한 번 만 만나달라고 절규하는 유가족을 '민간인'이라 칭하는 정치인을 보면서, 제가 할 수 있는 무언가라도 해야겠다는 생각에 이렇게 편지를 쓰게 되었습니다.
세월호 사고와 그 이후 벌어지는 일련의 일들이 그간 쌓여있던 한국 사회의 민낯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현재의 제1 야당인 새정치민주연합 또한 그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기에, 그리고 두 차례의 선거 참패로 꾸려진 비상대책위원회가 어쩌면 변화의 기회가 될 수도 있기에, 밑거름이 될까 싶어 이렇게 글을 쓰게 되었습니다.
당원이 주인되는 정당으로 거듭나 주십시오.
선거의 5대 원칙 중 하나는 보통선거입니다. 만 19세 이상의 대한민국 국민이면 부자든 가난한 자든, 장애가 있든 없든, 서울에 살든 대구에 살든 모두 똑같이 한 표의 권리를 행사할 수 있습니다. 50.1%가 49.9%를 무시하는 다수결의 폐해와 같은 민주주의의 함정이 숨어있습니다만, 그렇다고 이 보통선거의 원리를 거부해서도 안 되고 다른 대안을 찾아내기도 쉽지 않습니다. 싫으나 좋으나 모든 국민의 1인 1표에 따라 대통령도 선출되고 국회의원도 선출되고 개헌 여부도 결정됩니다.
그러나 정당 내부에서 이러한 보통선거의 원칙이 잘 지켜지는지 의구심이 듭니다. 선거를 앞두고는 당원의 의사와 무관하게 '전략공천'이 이루어지고, 또 당선 가능성을 살핀다는 이유로 당원 뿐 만 아니라 비당원에게까지도 선호를 묻는 여론조사를 실시해 그 결과를 주요 지표로 활용하고 있습니다.
또한 당의 정책을 결정하는 과정에서 과연 '일반' 당원이 얼마나 참여하고 있는지도 의문입니다. 그저 소수의 엘리트 전문가와 국회의원 몇 사람이 모여, 또는 국회의원으로 선출된 사람들이 문 걸어잠그고 비공개로 의원총회 개최하는 것으로 특정 정책을 결정하는 것이 그간의 관행 아니었나 싶습니다. 꼬박 꼬박 당비 내는 당원이 존재할 이유가 없는 셈입니다.
각종 경선에서 '당선 가능성'을 빌미로 진행되었던 비당원을 포함하는 여론조사나 오픈 프라이머리는 더 이상 채택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이것은 당원들의 존재를 무시하는 방식입니다.
정책을 결정하는 과정 또한 당원이 직접 참여하는 플랫폼을 마련할 필요가 있습니다. 인터넷 포털 <다음>에서 운영하는 토론마당 아고라같은 플랫폼을 응용하는 것도 방법일 것이다.
예를 들어, 한 당원이 교육제도 개혁을 안건으로 제시했는데, 이 안건에 대해 500명 이상의 당원이 동의할 경우 중앙당 또는 각 시도당 차원에서 이 안건을 다듬는데 필요한 법률과 행정을 지원하는 것 입니다. 그 수가 1000명을 넘었다면 이와 관련한 상임위의 해당 국회의원실이 결합해 이 안건을 다루는 것입니다.
당 차원의 법률적 행정적 지원 및 해당 의원실의 지원을 통해 이 안건이 잘 다듬어지면, 전체 당원을 대상으로 이 안건을 당론으로 채택할 것인가를 다툽니다. 이러한 플랫폼이 잘 마련된다면, 사회 곳곳에서 활발하게 활동하는 다양한 시민단체, 노동조합, 각종 이익단체의 관심이 자연스레 새정치연합으로 수렴될 것입니다.
이러한 정책 결정 플랫폼은 주요 쟁점에 대해 사전에 국민 의사를 검토하는 과정으로 기능할 수도 있습니다. 환경단체에서 강력하게 주장하는 탈핵을 예로 들자면, 새정치연합 당원의 과반 이상이 탈핵 대신 기존 원전을 안전하게 운영하자고 결정했다면 이것이 바로 새정치연합의 당론이 되는 것입니다. 탈핵을 주장하는 이들은 새정치연합의 당론으로 탈핵이 채택될 수 있도록 자신들의 논리를 더 보완해 당원을 설득하는 활동을 펼쳐야 할 것입니다.
경제개혁, 사회복지 확대, 비정규직 문제, 쌀 개방 문제, 송전탑 문제 등 우리 사회가 직면한 많은 과제와 다양한 갈등은 직접적인 이해 당사자의 의견이 무엇보다 중요하겠습니다만, 갈등 당사자간 해결이 불가능할 경우 비정하지만 어쩔 수 없이 다수결의 원리로 푸는 것이 사회적 비용을 줄이는 방법일 것입니다.
다만, 갈등 사안에 대해 고민할 시간도 없이 거수에 의해 결정하는 것은 극단적인 결과를 가져올 것이 자명하기에, 정당의 정책 결정 플랫폼을 통해 충분한 시간과 고민과 논의를 거치는 것이 보다 원만하게 갈등을 해결하는 민주적인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숙의 과정을 거쳐 도출된 당론이라면, 많은 당원의 지지 뿐 만 아니라 비당원의 동의도 기대할 수 있을 것입니다.
독일의 성숙한 정당정치, 우리도 배워야 합니다정치 신인을 육성하는 정당으로 거듭나 주십시오.
독일의 성숙한 정당정치를 지켜보며 부러운 것 중 하나는, 독일의 청소년들은 장래 희망으로 정치인을 우선순위로 꼽는다는 것입니다. 초등학교 어린 나이에 총리가 되겠다는 추상적인 꿈이 아니라, 리더십이 있고 사회 문제를 고민하는 학생일수록 고등학생·대학생이 되어 정당에 당원으로 가입해 활동하며 정치인이 되고자 하는 꿈을 구체적으로 일구고 있다는 것입니다.
작년에 방문했던 독일 북부 주의 한 고등학교의 학생은 지역의회 선거에 사민당 후보로 직접 출마하기도 했습니다. 정치인이 비리 주범으로 묘사되는 한국의 영화 속 이야기나 나이 들수록 정치인이 되려는 꿈을 접는 한국 청소년들의 모습과 참 대비되더군요.
지금 우리는 매우 다양한 사안과 복잡한 갈등 관계 속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정치라는 것은 이 복잡하며 다양한 것들을 지혜롭고 슬기롭게 해결해 나가는, 엉킨 실타래를 풀어가는 종합적인 사고가 필요한 분야입니다. 그렇다면 그에 걸맞은 인재를 만들어가는 노력이 정당에게도 필요합니다.
저는 새정치연합이 미래 정치인을 인큐베이팅하는 정당으로 변모해 정치가를 꿈꾸는 이들이 현실 정치에 대해 충분히 배우고 경험할 수 있는 훈련장으로 기능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예를 들면, 현재 진행 중인 '청년 정치 스쿨'을 확대 개편해, 대중 정치인이 되고자 하는 모든 이들에게 정치적 교양을 제공하는 정치적 공간으로 활용할 것을 제안드립니다.
의회에서의 입법 과정과 같은 실무 뿐 만 아니라, 쟁점 사안이 발생했을 때 각 이해당사자 간 갈등 접근 및 해결 방법, 그리고 더 크게는 한국 사회의 정치, 경제, 역사에 대한 전문적인 지식을 정치 지망생들에게 제공해야 합니다. 인접 지역 같은 당 소속 의원들이 개발사업을 자기 지역으로 유치하기 위해 다투는 장면은 과연 이들이 국정을 논하는 제대로 된 정치인인가 하는 의구심을 들게 합니다. 이런 폐단을 예방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거주지를 뛰어넘어 국가 단위까지 조망할 수 있는 눈을 갖도록 미래의 정치 지도자들을 가르쳐야 할 것입니다.
새정치연합 경선에 참여하기 위해서는 이 과정을 반드시 수료해야만 하는 것으로 못 박는 강제 규정 또한 필요할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과제로 각자의 정치 출사표를 제출토록 해, 향후 후보자 선출을 위한 경선에 활용한다면 좋을 것 같습니다.
이러한 인큐베이팅 시스템을 거친 당원 누구든 경선에 참여할 수 있고 당원들의 직접 투표에 의해 후보자를 선출하는 구조가 잘 정착된다면, 그간 한국 정당의 적폐였던 계파 파벌주의와 '자기 사람 심기' 등의 구태가 사라질 것입니다.
당원과 소통하는 정당으로 거듭나 주십시오.
2차 대전 패망국인 독일이 반세기 만에 지금의 높은 정치의식을 갖게 된 배경에는 시민에 대한 정치교육이 큰 역할을 했음을 많은 전문가들이 인정하고 있습니다. 정치인 하나 잘 못 뽑으면 온 나라가 망할 수 있다는 것을 모든 정당이 시민들에게 찾아가 함께 고민하고 공유했다는 것입니다. 즉, 우리 국민의 정치의식 고취를 위해서는 당이 나서서 당원들과 소통하고 토론하고 공부하는 프로그램이 절실합니다.
지구당, 지역 주민 사랑방 구실해야우리나라 정당법과 선거법에서 얼마나 자유롭게 지구당 활동이 보장되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법에서 허용하는 수준에서 각 지구당의 역할을 다시 설정할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우선적으로 지구당이 지역 주민 사랑방 구실을 해야 할 것입니다. 당원의 법률적인 고민을 들어주는 민원센터의 역할 뿐 만 아니라, 다양한 공부 프로그램이 제공되는 교양센터로서도 운영되어야 할 것입니다. 선거철에만 반짝하는 것이 아닌, 상시적으로 다양한 정치인과 사회 원로가 지구당 사무실에서 지역 당원들과 만나는 기회를 마련해야 할 것입니다.
또한 당 자체의 여러 매체를 그저 중앙당 소식을 하달하는 것이 아니라, 일반 당원의 의견과 생각을 나누고 공유하는 통로로 활용해야 할 것입니다. 선거 때 반짝하는 방식으로는 소통은 고사하고 당원의 정치의식을 높이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투명한 당 운영이 필요합니다.
보다 투명한 당원 민주주의를 구현하기 위해서는 지금까지의 당원 전체에 대한 전수조사를 선행하는 것이 필요할 것입니다. 이 과정은 각 지구당과 해당 당원이 상호 소통하는 기회로도 활용될 수 있을 것입니다.
전수조사를 실시하며 당원들에게 다양한 형태로 당원 확인을 받는 것도 의미 있는 과정일 것입니다. 새정치연합에 대한 기대, 불만, 의견 등 당원이 하고 싶은 말을 스마트폰 동영상, 전화 음성 메시지, 이메일, 사진, 그림 등으로 취합하는 것입니다. 이를 향후 UCC로 제작, 전 당원과 당직자가 공유해 당원들의 생생한 목소리를 경청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홈페이지를 통해 당원 현황을 공개하는 것도 투명성을 높이며 동시에 당원 간 자발적인 활동을 이끌어내는 방법이 될 수 있습니다. 지도에서 내 지역구를 클릭하면 해당 지역의 당원 현황을 수치로 볼 수 있도록 하는 것입니다. 당원 개인의 구체적인 신상 정보는 보호하면서 최소한의 정보 - 성별, 연령대, 주소(동/리) 등 - 만을 통계 수치 형태로 실시간 제공하는 것은 기술적으로도 충분히 가능할 것입니다. 이렇게 당원 현황을 투명하게 공개하는 것은 당원 민주주의의 정당성에 큰 버팀목이 될 수 있으며, 또한 대중 정치인이 되고자 하는 이들이 지역 당원 상황에 맞는 활동을 벌이는 데에도 많은 아이디어를 제공해 줄 것입니다.
한국 정치의 미래를 위해 성공적인 개혁을 이루어주십시오.
저는 개인적으로 녹색당 당원입니다. 그러나 거대 보수 여당에 대응할 수 있는 건실한 제1야당이 필요함에 동의하고 있습니다. 특히 최근의 세월호 사고 이후의 정국을 보면서는 국민의 뜻을 내팽개치는 새누리당에 맞설 수 있는 힘 있는 야당이 필요함을 절실히 느끼고 있습니다.
총선과 대선까지 1년 반 이상의 시간이 남아있는 지금은 어쩌면 새정치연합에게도, 그리고 한국 정치에도 절호의 기회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당원이 주인 되는, 그래서 많은 국민들이 새정치연합 당원이 되고 싶어 하는 그런 정당으로 거듭나 주시길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이번 새정치연합 당 개혁에 있어서 지난 두 차례의 세월호 특별법 합의와 같은 자충수를 두어서는 절대 안 될 것입니다. 목숨을 걸고 싸우는 유가족과 이들의 애끊는 아픔에 공감하는 많은 국민들이 있어 새정치연합이 꺼트린 특별법 논의의 불꽃을 다시 살릴 수 있었지만, 이번 당 개혁의 기회마저 놓친다면 국민으로부터 외면받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