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명량>의 관객 수가 1500만을 돌파했다고 한다. 이는 그동안 국내에서 개봉된 영화 가운데 최다 관객의 신기록이라 한다. 이 영화 <명량>은 명량대첩에서 이순신 장군이 승리를 거둘 수 있었던 구체적이고 실제적 이유와 상황에 대해 명확하게 설명해 주지 못하고 있다고 평가된다. 스토리 전개에서도 설명되기 어려운 장면도 있고, 영화적 재미와 구성을 위해 개인적 스토리를 넣은 점도 고려되야 한다.
필자에게 이순신 장군은 여러 장면에서 등장해 강한 영향을 미쳤다. 먼저 춘원 이광수의 소설 <이순신>은 청소년기에 심대한 영향을 미쳤고, 이후 김진규 주연의 영화 <성웅 이순신> 그리고 드라마 <불멸의 이순신>과 김훈 소설 <칼의 노래>가 있었다. 최근의 영화 <명량>도 그 중의 하나다. 이 영화의 소재가 기적과 같은 전투였던 명량대첩이라 점과 주연 배우인 최민식의 중후한 연기력이 뛰어난 점, 바다에서의 스펙터클한 전투신이 압권이었다는 점에서 새로운 장을 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국가 혼란의 위기 시의 탁월한 지도자로서 이순신에 대한 기록은 다양하다. 먼저, 장군의 조카 이분이 쓴 <이순신행록>을 보면, 이순신은 항상 군량을 걱정하여 백성들을 모아 둔전을 경작하게 하고, 고기를 잡게 하고 소금을 굽고 질그릇을 만들게 한 뒤, 이를 시장에 내다 팔아 양식으로 바꾸어오게 했다고 한다.
<선조실록>에는 장군이 명량해전 이후 고하도를 거쳐 고금도로 진을 옮긴 뒤에도 둔전을 많이 일구고, 물고기와 소금을 팔아서 군량을 넉넉히 마련함으로써, 몇 달 되지 않아 군사의 기세가 산중의 호랑이마냥 크게 떨쳤다고 한다. 이순신은 수영(水營)의 경제와 재정 문제를 스스로 해결해야만 했는데, 다양한 정책으로 백성들과 함께 이를 해결했다는 점에서 그는 매우 유능한 경영자라 할 수 있다. 또 <선조실록>에 "이순신은 사람이 충성스럽고 용감한 데다 재능과 지략이 있었으며, 규율을 세우면서도 군사들을 사랑하였기 때문에 사람들이 모두 따랐다"라고 썼다.
장군이 직접 쓴 <난중일기>에 의하면 장군은 탈영을 한다든가 군량미를 훔친다든가 하는 자에 대해서는 군율을 엄격히 적용했다. 그러나 그는 전투에 지친 군사들에게는 휴가를 주어 휴식을 취하도록 했다. 그는 또 항상 병사들의 입는 것, 먹는 것에 신경을 썼고, 장교들과 함께 가끔 회식을 함으로써 중간 지도자들과의 소통에 최선의 노력을 다했다.
이순신의 리더십을 짧게 논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나 굳이 요약한다면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첫째, 근면하고 전문성을 겸비한 실력있는 지도자란 점이다. 병법과 지리와 경세에 해박하며, 현지의 제반 사정을 깊게 연구하고 사전에 대비하는 전문성과 현장 파악의 혜안과 실력을 갖춘 지도자였다. 둘째, 충절과 효성의 지도자인 점을 들 수 있다. 마음 깊은 곳에 나라와 백성에 대한 충성과 절개가 남다르고 충직한 점을 들 수 있다. 부모님, 특히 어머님에 대한 효성과 그리움이 깊고 크다른 점을 들 수 있다. 충절과 효행은 고금을 통해 중요한 가치이자 인격과 조직 유지, 발전의 터전임은 자명하다.
셋째, 철저한 기록과 과학적 사고에 기초한 판단과 행동의 지도자임을 들 수 있다. 충무공은 전쟁 후에도 많은 시기 질투와 비방에 시달렸으나 <난중일기> 등 자신의 행동과 전시의 상황 등을 정확하고 구체적으로 기록한 사실(事實) 등에 의해 극복할 수 있었다. 또한 현장에 대한 정확한 기록과 지리, 해양, 해류, 조수간만, 기후 등 과학적 사실을 토대로 전황을 파악하고 결정하여 위기에도 승리할 수 있는 기본을 축적해 나갔다고 할 수 있다. 넷째, 사명감과 책임의식을 들 수 있다. "필사즉생 필생즉사(必死卽生 必生卽死. 죽기로 마음을 먹으면 반드시 살 것이고 살기로 마음을 먹으면 반드시 죽는다)는 각오와 사명감으로 장군은 함께한 병사들과 위기를 극복할 수 있었다. 또한 '장부가 세상에 나서 쓰일진데 목숨을 다해 충성을 바칠것이요 만일 쓰이지 않으면 물러가 밭가는 농부가 된다 해도 또한 만족할 것이다'란 책임정신과 사명감으로 맡은 일을 용기있게 감당할 수 있었다.
다섯째, 애민사상을 들 수 있다. 충무공은 어떤 상황에도 백성들의 안위를 생각했고 백성들의 호응과 후원을 기반으로 전쟁에 승리할 수 있었다. 그의 깊은 애민사상은 오늘날 모든 조직과 지도자의 핵심 덕목이라 할 수 있다.
보물 제326호인 '충무공 장검' 두 자루가 충남 아산 현충사에 보존돼 있는데, 칼날에 '삼척서천 산하동색(三尺誓天 山河動色)'과 '일휘소탕 혈염산하(一揮消蕩 血染山河)'라고 새겨져 있다. '석자 되는 칼로 하늘에 맹세하니 산과 물이 떨고, 한 번 휘둘러버리니 피가 강산을 물들인다'라는 뜻으로 장군의 사명감과 기개를 느끼게 하는 글이다. 후에 정조대왕은 이순신을 영의정에 추증하고 이순신 장군의 일기와 유고 등을 모아 <이충무공전서>를 만들었다. <정조실록>에는 "이번 일(이충무공전서 발간)은 충의를 드높이고 공에 보답하며 무용을 드러내고 공적을 표창하려는 뜻에서 나온 것이다"라는 정조의 하교가 있다.
우리역사에 이순신 모델을 먼저 내세운 가장 대표적인 인물이 단재 신채호와 춘원 이광수다. 신채호는 1908년 5월 2일부터 8월 18일까지 <대한매일신보>에 <이순신전>을 연재했다. 원제는 <수군제일위인(水軍第一偉人) 이순신>이다. 신채호는 <이순신전>의 마지막 부분에 "지금 이순신전을 선택해 고통에 처한 우리나라 국민에게 양식으로 삼게 하노니 (……) 제2의 이순신을 기다리노라!"라고 적었다.
1931년 5월 13일자 <동아일보>에 이순신 장군 종손의 빚 때문에 이순신의 위토가 경매로 넘어갔다고 보도되자, 장군의 위토를 되찾고 현충사를 중건하는 대중운동으로 발전했다. 이를 계기로 춘원 이광수는 소설을 <동아일보>(1931.6.26~1932.4.3)에 연재했다. 춘원은 소설 끝부분에서 "그가 돌아간 지 334년 4월 2일에 조선 500년에 처음이요 나중인 큰사람 이순신(충무공이란 말을 나는 싫어한다. 그것은 왕과 그 밑에 썩은 무리들이 준 것이기 때문에)의 슬픈 일생을 그리는 붓을 놓는다"라고 썼다. <뜻으로 본 한국역사>에서 함석헌은 이순신을 이 민족의 아픔을 보시고 하늘에서 보내준 사람이라는 표현을 하였다. 그의 애국, 애족사상과 리더십이 새삼 그리운 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