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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이리'라 불렸던 전라북도 익산에는 백제의 향기를 간직한 많은 문화 유적들이 있다. 그 중 우리나라에서 가장 크고 가장 오래된 미륵사지 석탑이 많이 알려져 있다. 그로부터 5Km 남쪽, 미륵사지 석탑보다 조금 덜 유명하기는 하나 더 많은 신비로움을 간직한 왕궁리 유적지가 있다.

지명 조차 '왕궁리'이니 지금도 이곳에는 백제, 아니 그보다 훨씬 더 오래전 마한시대의 왕궁이 있었다는 전설이 전해 내려 오고 있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는 백제의 무왕이 사비에서 이곳 익산으로 천도해 나라를 경영했다는 전설이 그것이다. 실제 인근의 미륵사도 무왕이 창건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니 어딘지 모르게 신빙성도 엿보인다.

그러나 삼국사기를 비롯한 국내외 역사서 어디에도 무왕이 익산으로 천도했다는 기록은 찾아 볼 수 없으며 무왕의 바로 다음 왕이었던 의자왕이 나당 연합군에 의해 사비성에서 붙잡혔다는 기록 등을 볼 때 이곳에 왕궁이 있었다는 이야기는 한낱 소문일 뿐이었다. 왕궁이 여기에 있었다면 의자왕은 이곳 익산의 왕궁에서 붙잡혔어야 하는 것이니 말이다.

그뿐 아니라 왕궁이라는 곳에 떡하니 5층 짜리 석탑까지 버티고 서 있으니 백제가 아무리 불교국가라 해도 왕궁에 탑까지 쌓을 수는 없는 법, 왕궁리의 전설은 그저 허무맹랑한 전설로 치부될 뿐이었다.

그런데 '대반전'이 일어났다. 1970년대에 일본 교토의 한 절에서 그동안 없어진 줄로만 알았던 중국 기록 '관세음응험기(觀世音應驗記)'가 발견되었고 곧이어 이에 대한 연구결과가 발표된 것이다. 여기에 '백제 무광왕(곧 무왕)께서 지모밀지(곧 지금의 익산시 금마면 왕궁면 일대로 추정)로 천도하시어 새로이 정사를 경영하셨다'는 기록이 발견됐다.

그뿐 아니라 여기에 실려 있던 당시의 기록대로 1965년 왕궁리 석탑의 해체 과정에서 심초석 사리공에 있던 사리장엄 금강경판과 사리병의 내용이 정확히 일치하니 무왕의 천도설은 전설에서 사실로 인정받게 된 것이다.

이에 따라 왕궁리 유적은 1989년부터 지금까지 계속해서 발굴조사가 진행되고 있다. 그 동안의 발굴 성과를 정리해 보면 이곳은 백제 무왕대(AD 600~641)에 천도해 왕궁을 건설했다.

남북 490m 동서 245m의 약간 틀어진 네모꼴로 처음부터 치밀한 계획에 의해 1:1 또는 2:1의 비례로 공간을 분할해 만든 왕궁으로 백제 최고의 정원 유적과 금, 은, 유리 등을 생산했던 공방지 화장실 유적, 그리고 수도 사비성에서만 출토되었던 수부(首部)명 기와 등이 발견되었다.

특히 우리나라 고대 왕궁으로는 처음으로 왕궁의 외곽 담장과 함께 왕이 직접 정사를 돌보던 정전 건물지를 비롯 14개의 백제 건물터가 발견되었다. 담장은 궁궐 건축의 마무리 단계이니 왕궁리 유적은 명실상부한 백제의 완성된 궁성이었던 것이다.

2008년 개관한 왕궁리 유적 전시관. 지난 1989년 부터 조사 발굴된 유물 중 300여 점을 선정, 전시하고 있다.
▲ 왕궁리 유적 전시관 2008년 개관한 왕궁리 유적 전시관. 지난 1989년 부터 조사 발굴된 유물 중 300여 점을 선정, 전시하고 있다.
ⓒ 이양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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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불구하고 왕궁리 유적은 풀어야 할 난제가 쌓여 있다. 첫째, 왕궁에서 사찰로의 변화 과정이다. 왕궁의 중요 건물을 파괴하고 그 위에 사찰을 건립한 것이 고고학적으로 확인되고 있는데 이는 사후 인근에 모신 무왕과 왕후의 명복을 빌기 위해 원찰로 활용하기 위함이었다는 설과 사후 무왕 세력의 결집을 약화시키기 위한 것이라는 주장이 양립하고 있다. 수원 화성이 정조 사후 황폐화 된 것을 연상해 보면 좋을 듯하다.

둘째 5층 석탑의 건립 시기 문제이다. 왕궁에서 사찰로의 변화 시기에 대해서는 대체로 백제 말기로 보고 있으나  이 탑의 건립 연대에 대해서는 백제 말기, 통일신라 초기, 통일신라 말 또는 고려 초 등으로 엇갈리고 있다.

왕궁리 유적을 홀로 지키며 외로이 서 있는 이 탑은 전형적인 백제계 양식을 띠고 있다. 단층 기단과 얇고 넓은 지붕돌 등 전체적으로 부여 정림사지와 닮아 있어 백제탑으로 보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탑신부 돌 짜임의 기법과 3단으로 된 지붕돌 층급받침 기법 등이 신라 석탑의 양식을 보이고 있어 통일신라 초기의 것으로 보기도 한다. 또 다른 설로 이곳이 백제의 고토였던 만큼 옛 백제의 양식을 계승하고 신라 양식을 흡수하여 고려 초기에 건립된 탑이라는 주장도 있다.

이는 후백제 견훤의 도읍인 완산(전주)의 지세가, 앉아 있는 개의 형상이므로 도선이 개의 꼬리에 해당하는 이곳에 탑을 세워 누름으로써 견훤의 기세를 꺽어 고려 태조 왕건을 도우려 했다는 향토지 '금마지'의 기록에도 부합한다.(유홍준 답사여행의 길잡이 전북편 참고) 앞으로 좀 더 정밀한 발굴과 연구로 밝혀야 할 대목들인 셈이다.

국보 제289호. 전형적인 백제계 양식을 보이고 있으나 건립시기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엇갈리고 있다. 지금껏 보아 온 탑들 중 가장 '잘 생긴 탑'이다.
▲ 왕궁리 5층 석탑 국보 제289호. 전형적인 백제계 양식을 보이고 있으나 건립시기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엇갈리고 있다. 지금껏 보아 온 탑들 중 가장 '잘 생긴 탑'이다.
ⓒ 이양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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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0년의 세월을 넘어 서동요의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를 담고 있는 무왕의 잊혀진 옛 왕궁이 이제 조금씩 조금씩 그 신비로운 이야기를 풀어 내고 있다. 너른 들을 품고 있어 더없이 풍요로웠던 익산은 이로써 전설 속 아련함마저 더해 가고 있다.

미륵사지 석탑을 해체 복원하던 중 내부의 중심기둥인 심주석에서 출토된 금동제 사리외호. 석탑이 복원중이라 달리 볼 것이 없는 아이들을 위해 미륵사지 유물 전시관에서 2000원을 주고 진흙을 사면 틀에 넣고 만들어 보게 하는 체험 복제품 중 하나. 원래는 진흙만 파는데 특별히 완성품을 살 수 있는 기회가! 모름지기 유적지의 기념품이라면 이 정도는 되어야 하지 않을까?
▲ 미륵사지 석탑 출토 금동제 사리외호 미륵사지 석탑을 해체 복원하던 중 내부의 중심기둥인 심주석에서 출토된 금동제 사리외호. 석탑이 복원중이라 달리 볼 것이 없는 아이들을 위해 미륵사지 유물 전시관에서 2000원을 주고 진흙을 사면 틀에 넣고 만들어 보게 하는 체험 복제품 중 하나. 원래는 진흙만 파는데 특별히 완성품을 살 수 있는 기회가! 모름지기 유적지의 기념품이라면 이 정도는 되어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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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익산, #왕궁리유적, #왕궁리5층석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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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 분야는 역사분야, 여행관련, 시사분야 등입니다. 참고로 저의 홈페이지를 소개합니다. http://www.refdo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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