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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른쪽에 높게 솟은 건물이 한일극장이다.
오른쪽에 높게 솟은 건물이 한일극장이다. ⓒ 추연창

대구 동성로는 1906년 이전까지 대구읍성의 동쪽 성곽이 놓여 있었던 자리를 따라 새로 났다. 친일파 대구군수 박중양이 일본인들의 장사에 도움을 주기 위해 임의로 성곽을 부순 뒤 그 자리에 신작로를 내었던 것이다. 길 이름이 동성로가 된 것도 그 때문이다.

동성로는 동장대 터(대구역 맞은편 대우빌딩 뒤의 삼거리)에서 진동문 터(동아백화점 네거리)를 거쳐 한일극장, 대구백화점, 그리고 중앙파출소까지 이어진다. 그 중 한일극장에서 중앙파출소까지는 대구에서 가장 번잡한 길이다. 동장대 터에서 한일극장까지도 그렇지만 이곳 역시 아예 차량은 통행을 못하도록 금지되어 있다. 사람만 다닐 수 있다.  

 세월호와 관련하여 농성 시위를 하는 천막에 "특별법 제정 약속, 대통령이 책임져라"는 요구가 쓰여 있다.
세월호와 관련하여 농성 시위를 하는 천막에 "특별법 제정 약속, 대통령이 책임져라"는 요구가 쓰여 있다. ⓒ 추연창

그 중에서 가장 인파가 많은 곳은 대구백화점 앞이다. 그래서 대구백화점 앞 광장은 정치 집회, 문화 행사 등이 거의 날마다 이어진다. 대통령 선거 때에도 박근혜, 문재인, 안철수 등 대권주자들이 찾아와 유세를 펼쳤다. 오늘도 광장에는 천막이 세워져 있고, 천막에는 "특별법 제정 약속, 대통령이 책임져라!"는 현수막이 걸려 있다.

대통령이 책임져라? 현수막이 말하는 대통령은 '박근혜 대통령'이다. 재미있는 것은 이곳에서 박근혜 대통령 생가터가 아주 가깝다는 사실이다. 박 대통령 생가터 안내판은 동소문 터에서 왼쪽으로 보면 눈에 들어오는 파리바게트 출입문 바로 옆에 세워져 있다.

이명박 대통령 생가에 사람이 북적이던 때가 있었다. 그의 당선 직후 일이다. 그러나 지금은 거의 찾는 사람이 없다. 박근혜 대통령 생가터는 그와 대조가 된다. 생가터를 보기 위해 인파가 몰려든다는 말은 없다. 생가가 아니라 생가터이기 때문인가? 아무것도 없고 생가터 표지판 하나뿐이기 때문인가?

 박근혜 생가터 안내판이 빵집 출입문 옆에 세워져 있다.
박근혜 생가터 안내판이 빵집 출입문 옆에 세워져 있다. ⓒ 추연창

동소문은 대구읍성의 동문인 진동문과 남문인 영남제일관 사이에 있던 작은 문을 말한다. 물론 동소문이 남아 있는 것은 아니다. 그저 본래 위치가 대구백화점에서 중앙파출소 방향으로 100미터가량 올라가면 나오는 작은 네거리 일대라고 회자될 뿐이다.

대구백화점에서 중앙통으로 가면 그 중간쯤에 송학구이라는 오래된 술집이 있다. 대구 사람이 아닌 외지인들은 '구이'라면 육류나 생선을 불에 구워서 내놓는 안주를 연상하겠지만 오히려 그 반대다. 대구의 구이집들은 피가 금세 뚝뚝 떨어질 것만 같은 붉디붉은 소의 생고기를 뭉텅뭉텅 잘라서 접시에 담아준다. 

하지만 답사자들을 송학구이 주차장으로 안내하는 것은 생고기를 먹자고 제안하기 위해서는 아니다. 주차장의 동쪽과 남쪽 일대을 덮고 있는 검은 차광막 뒤편이 윤복진의 생가이기 때문이다.  물론 그의 집은 없어졌고 지금은 현대식 건물로 된 식당이 그 터를 차지하고 있다.

윤복진의 이름을 평소에 기억하고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윤복진은 매우 유명한 인물이다. "윤복진이 누군지 모르겠다"는 답사자들을 위해 "<아! 가을인가>, 알죠?"하고 반문해본다. 그제야 "아!" 하고 탄성들을 지른다. <오빠 생각>과 <동무 생각>을 작곡한 박태준의 노래 중 거의 대부분이 윤복진의 가사로 곡을 만들었다고 부연 설명도 덧붙인다. 

 송학구이 건물 오른쪽 부분과 건물 우측 일대가 윤복진 생가터
송학구이 건물 오른쪽 부분과 건물 우측 일대가 윤복진 생가터 ⓒ 추연창

이제 동성로 답사가 대단원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 동성로가 끝나면 남성로가 이어진다. 남성로라면 잘 몰라도 약전골목은 누구나 익히 안다. 즉, 동성로와 남성로의 현재 접합 지점은 중앙파출소 앞이다.

중앙파출소는 조선 시대 대구읍성의 남장대가 있었던 곳이다. 남문(영남제일관)과 동소문 중간쯤 되는 성곽에 다시 높은 대를 올린 다음, 그곳에서 장군이 군사들을 지휘했다. 물론 지금 중앙파출소 자리에서 남장대의 흔적을 찾는 것은 불가능하다.

 4.19 진원지 표지석
4.19 진원지 표지석 ⓒ 추연창

하지만 파출소 건물 오른쪽 도로변에 놓치지 않고 보아야 할 것이 하나 있다. 4·19혁명기념사업회가 2010년 11월 17일에 설치한 '4·19 혁명의 진원지' 표지석이다. 표지석에는 '1960년 4월 19일 자유당정권의 부정, 부패, 독재에 항거하여 수많은 학생들이 이곳에서 격렬하게 시위한 4·19혁명의 진원'라고 새겨져 있다.

대구 중심가를 4·19혁명의 진원지라고 말하는 것은 대구 2·28 학생의거에 근거한 표현이다. 1960년 2월 28일, 대구의 고등학생들은 자유당 정권에 항거하여 대규모 시가 행진을 벌였다. 이 대구 학생들의 의거는 마산 의거, 고려대 등 대학생 의거의 노둣돌이 되었고, 마침내 독재자 이승만의 퇴진을 낳았다.

4·19 표지석에서 정면을 응시하니 염매시장 출입구가 보인다. 염매시장은 '싼값에 판다'는 뜻이다. 돌이켜 보면, 2·28과 4·19는 물론 그 뒤 줄기차게 이어진 독재 정권에 저항하다가 허다한 학생들이 죽고 다쳤다.

하지만 우리나라의 민주주의는 아직도 요원한 듯하다. 젊은 학생들이 흘린 그 많은 피가 그토록 '싼값'이었던가? 문득 마음이 답답해진다. 하지만 걸음을 멈출 수는 없다. 이제 남성로를 걸을 차례다.


#박근혜 생가#윤복진#4.19#동성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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