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 운영 과정에서 재학생들은 소외를 당하고 있으며, 심지어 투표를 통해 선출된 학생대표들 조차도 그 과정에서 학교로부터 제대로 된 설명을 듣지 못하고 있습니다."2011년 대학교수가 선정한 '올해의 사자성어'로 '엄이도종(淹耳盜鐘)'이 꼽혔다. 엄이도종은 자신의 잘못에 대해선 생각하지 않고, 비판과 쓴소리를 듣기 싫어 귀를 막으나 소용이 없다는 뜻의 사자성어다. 당시 교수들은 선정 배경으로 정부의 소통 부족과 독단적인 정책 강행을 꼽았다.
대학교수가 고른 '엄이도종'의 세태는 정작 대학에서도 재현, 반복되는 듯하다. 학생들이 대학의 통보식 소통을 지적하며 행동에 나섰다. 대학 운영의 의사 결정 과정에서 학생의 의견 수렴과 참여가 배제된 데 대한 문제의식이다. 그에 따른 피해는 정작 학생 스스로가 짊어가야 한다는 점도 행동을 일으킨 원인이다. 대학의 의사 결정 구조가 임계점에 도달한 상황이다.
국민대는 13개 단과대, 학부·과를 비롯한 학생 대표 60여 명이 "학생들이 더 이상 학교 운영에 소외돼선 안 된다"며 '비상대책위원회(아래 비대위)를 꾸리고, 15일 오전 8시부터 입장서를 담은 유인물 배부와 집회 등 단체 행동에 나섰다.
비대위는 학내 공간 재배치 등 현안들이 학생 의견 수렴 없이 대학 본부의 단독 결정으로 처리되고 있는 점을 항의하는 동시에, 학생-학교 간 의사소통 구조의 변혁이 필요하다는 입장을 내놨다. 현재 학교의 일방적 사후 통보를 타파하는 대신, 학생이 학교가 구상 중인 계획의 설명을 미리 듣고 학교와 의견을 나누는 상호 소통의 의사 구조를 만들어가겠다는 것이다.
하향식 통보에 염증 느낀 학생들
비대위가 행동에 나서게 된 발단은 학생들과 협의 없이 진행된 '열람실 철거'였다. 지난 7월 3일 국민대는 종합복지관의 열람실을 철거한 후 도서관 지하 2층으로 이전한다는 내용을 발표하고, 그 자리에 평생교육원 강의실을 조성했다.
그뿐 아니라 8월 4일엔 경상관에 있던 경상대를 학생 대표와 사전 의논 없이 국제관 A동으로 이전하겠다고 밝혀와 경상대의 반발은 물론이고, 학생은 통보만 받아야 하느냐는 학생 사회 여론이 대두됐다.
15일 낮 12시 국민대 민주광장에서 열린 비대위 주최 집회에선 대학의 민주주의가 갈 길을 잃었다는 성토가 이어졌다. 비대위가 학교에 내건 요구 사항은 크게 학생들 의견 수렴과 설득 없이 통보된 공간 이전 계획의 백지화, 학생 대표가 요구하는 의사소통 체제의 적극 수용이었다.
집회의 첫 연사로 나선 경상대 부학생회장 민승기씨는 "경상대 이전과 관련한 어디에도 학생 의견은 반영되지 않았다"며 "8월 4일 통보를 받은 이후 학교와 한 달여간 소통을 시도했으나 입씨름에 불과했다"고 지적했다. 이어 "공간 배정의 이유도 명확한 설명을 받지 않았다"고 말했다.
같은 자리에서 문과대 회장 김다은씨는 "무진장 정의감이 있는 것도 아니고, 지금 4학년 막 학기지만 하루아침에 '방 빼라'라는 통보에 정말 화가 나 행동에 나서게 됐다"며 "우리는 학원처럼 돈 내고 다니는 수강생에 불과한 것 아닌가"라고 문제를 제기했다.
집회가 열리는 무렵 비대위 학생 대표 3인은 국민대와 협상을 진행한 끝에 학생 의견을 수렴할 때까지 경상대의 이전을 유보하고, 열람실과 학회실 등 학생 자치 공간의 경우 이전 등 논의 사항이 있을 때 학생 대표들과 필수로 협의해나가겠다는 답을 학교로부터 얻어냈다. 그러나 열람실 철거 및 이전이 이미 완료되는 등 의사 결정을 둘러싼 내홍은 쉽게 그치지 않을 전망이다.
대학의 주인은 누구?... 학생 목소리 없는 공식 기구이러한 일련의 과정은 국민대뿐 아니라 타 대학에서도 되풀이되고 있다. 고려대는 공간 배정에 대해 학생이 의견을 개진할 수 있는 공식적인 기구가 없는 상황에서 지난해 정보통신대 동아리방이 일부 철거됐으며, 학생 테니스코트도 신규 건물의 착공을 이유로 사라졌다.
이에 고려대 총학생회는 "학생 자치 공간은 학교의 일방적인 공간 계획에 따라 결정되고서 통보된 것에 좌우돼 왔다"며 "이는 학교에 대한 학생의 불신과 불만을 키워왔다"고 밝히면서 공간관리위원회에 학생 대표자를 참여시켜 학생의 목소리가 반영되도록 하겠다는 방침이다. 현재 고려대 공간관리위원회에는 교무부총장으로 하는 위원회장을 비롯해 위원 6인 모두 교직원으로, 학생 의중이 반영되기 어려운 구조다.
서울과학기술대 역시 지난 2010년 공간 배정을 둘러싸고 홍역을 치렀다. 서울과학기술대는 당시 다산관을 리모델링하면서 산업정보시스템공학과와 기계공학과 동아리방 10곳을 폐지하겠다는 내용을 학생 측에 통보했다.
이에 기계공학과 학생회가 반발하자 기계공학과 동아리방 3곳은 다산관에 머무를 수 있었다. 서울과학기술대의 공간 배정을 의논하는 공간조정위원회는 총장을 위원장으로, 처장과 학장 교수들이 모여 진행되는 가운데 학생 대표의 참여는 배제돼 왔다.
한편 10일 비대위가 주최한 집회에 연단으로 나섰던 국민대 동아리연합회 부회장 권태환씨는 "지난 7월 열람실 철거 문제로 학교 교직원과 면담할 당시, 학생이 공간 조정에 참여하게 되면 이해관계가 복잡해질 수 있다고 했다"며 "학교의 주체가 학생이 아니라는, 비민주적 의사 결정을 보여주는 대목 아닌가"라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