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 학부모가 된 지 반년이 지나갔다.
3살 때 어린이집에 가는 걸 보며 대견해 했던 심정으로 초등학교에 아이를 보냈다. 아이가 새로운 세상을 경험할 것을 기대했다. 새로운 친구들도 사귀고, 학교의 학칙과 규정에 의해 움직이고 대한민국의 교육이 제시하는 방향을 어떻게 따라갈지 걱정도 하며 말이다.
지나고 보니 우리 부부도 참 많이 변했다. 치열한 학업 스트레스와 순위 경쟁에 덩달아 편승해 아이를 달달 볶고 있다. 다른 아이들이 그렇게 하고 있으니 우리는 으레 그렇게 해야 하는 것으로 알고 초심을 버렸다.
'누구누구 아이가 어느 학원에 다닌다더라, 같은 반의 어떤 아이는 수학을 백점 맞았다더라, 벌써 영어를 이만큼 한다더라' 등에 민감해진 것이다. 그런데 우리 아이는 알파벳도 모르고, 우리말 읽기 쓰기도 제대로 못 한다.
그렇게 1학기가 지났다방학이 되어 몰아치기로 각종 숙제를 해치우고 드디어 2학기가 되었다. 학교에서 오는 통신문과 과제물을 보니 한층 난이도가 높아졌다. 부모 참관 수업으로 교실에 들어가면 아이들의 성적이 스티커로 순위가 매겨져 있다.
받아쓰기를 비롯해 국어 단원 문제라든지 수학 문제는 업그레이드 된 채 아이 책가방에 들어가 있다. 갈피를 못 잡겠다. 성적에 연연하지 말고 나름대로 고집스럽게 나가던지, 아님 우리도 다른 아이들처럼 경쟁의 마당에서 바짝 조여 가며 채찍질할 건지 말이다.
우리 어릴 시절과 비교하는 것은 말도 안 된다는 것을 안다. 그래도 우리는 2시경에 수업이 끝나면 친구들과 학교 운동장에서 놀던지 산으로 들로 돌아다니다 저녁이 돼서야 집으로 돌아왔다.
숙제가 있으면 대충하고 저녁 먹고 또 밖에 나가 놀다가 졸리면 집에 들어와 잤다. 당시에도 시험과 숙제가 항상 부담이었지만, 사실 놀이보다 더 중요한 건 없었다. 우리 집은 아버지가 공무원이라 다른 아이들보다 우리 형제의 성적에 신경을 많이 쓰는 편이었지만, 다른 아이들은 그다지 성적에 연연하지 않았던 것 같다. 성적의 우열과 석차는 존재하지만, 기본 학습능력은 5, 6학년이 되면 거의 동등해진다.
선행학습 없이는 공교육을 따라가기도 힘들어대한민국은 공교육이 사교육을 활성화하기 위한 제도처럼 보인다. 고액 학원에서 제대로 공부하는 아이들은 학교 수업에 그다지 신경을 쓰지 않는다고 한다. 이미 그들은 선행학습으로 1~2년을 앞서 가고 있으니까.
더구나 우리나라는 학원이 아니면 또래들과 어울릴 수도 없다. 아이들의 문화는 같은 학원에 다니는 친구끼리 만들어진다. 한 반에 25명쯤 하는 아이들 중 학원 하나라도 다니지 않는 아이는 찾아볼 수가 없다. 그러니 학원 문화는 이미 공교육에도 심각한 부작용을 던져주고 있다.
기본적인 알파벳과 수학 셈법은 유치원이나 학원에서 미리 배워 온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학교는 그 과정을 뛰어넘고 시작한다. 아이들이 일정 수준이 있어야 학교 수업을 따라갈 수 있는 것이다. 아이들이 학습능력에 부족한 부분이 있으면 상담 전화가 온다.
"어머님, 아이가 아직 OOO을 모르네요. 좀 신경 좀 써주셔야겠습니다.""아버님, 아이에게 OOO 부분을 좀 익혀서 오라고 해주세요."학교에서 가르쳐야 할 것을 학원에서 혹은 가정에서 미리 배워오라는 것이다. 우린 어릴 때 학교에서 배웠는데...
초등학교부터 '자립형 사립 고등학교'를 목표로 고액을 들여 체계적인 학습을 해 가는 아이들이 있다. 이런 아이들을 일반 아이들이 따라갈 순 없다. '뱁새가 황새 따라간다'고 고액 과외를 하는 아이들을 따라가기 위해서 나머지 아이들도 엄마 등에 업혀 학원을 찾아다닌다. 여기서 내 아이는 그렇게 키우지 않겠다고 장담하며 학교에 입학을 시킨 부모라도 상황이 이렇다면 고민하게 된다. 내가 아이에게 잘 못 하고 있는 걸까?
"엄마, 나 한 시간만 놀면 안 돼요?"우리 아이는 아침 8시 반까지 학교에 도착하여 수업이 끝나고 돌봄 교실과 방과 후 교실을 번갈아가며 추가 수업을 한다. 오후 5시경에 태권도장을 가며, 학원에서 국어 및 수학 예습·복습을 하고 집에 온다. 그러면 오후 7시 반이나 8시 정도. 그나마 집에 오면 편히 쉴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금요일에 치르는 받아쓰기 연습을 반복해서 하고, 일기 쓰고 수학이랑 국어 문제집 한 페이지씩 풀다 보면 9시가 넘는다.
토요일이나 일요일 외엔 8살짜리 어린아이도 맘 편히 놀 수 있는 시간이 없는 셈이다. 주말에도 다음 주에 시험이 있거나 단원평가가 있으면 한두 시간은 책과 씨름해야 한다. 그렇다고 아이가 학습 수준을 제대로 따라가는 것도 아니다. 지난주에는 아이가 문제집을 풀다가 힘들게 말했다.
"엄마, 나 한 시간도 못 놀았어요" 난 속으로 내뱉는다. '미안하다, 아들아' 수학문제나 국어 문제는 왜 이리 어려운지……. 벌써 논술을 준비하는 건가? 문단의 이해력이 따르지 않으면 알 수 없는 설명과 풀이 과정이 문제로 나온다. 가끔은 나도 이해하지 못하는 문제도 있다.
어제는 국어 문제집을 풀고 있는데 마지막에 이런 문제가 있었다.
<앞서 제시한 <보기>를 읽고 생각나는 점과 느낀 점이 있다면 쓰시오.>아이가 이해를 못 하기에 난 몇 분 동안 설명을 해 줬다.
"OOO아, 위에 읽은 것 있지? 그거 읽으면서 무슨 생각이 들었어? 느끼는 게 있었어?아이는 한참을 고민한다. 얼굴도 찡그리고 고민하는 척도 하고. 이내 하는 말이,
"아무 생각도 안 나요."그러더니 공책에다 '몰라'라고 써 버렸다.
그렇다. 아이는 아무 생각이 없었다. 아직도 받침이 있는 글자는 힘들게 읽는 아이인데 문단을 읽고 무슨 생각이 떠오르겠는가? 그 말이 정답인 것이다. 아무 생각이 없는 것이다.
아내와 나는 아이의 대답을 듣고는 그냥 웃고 말았다. 그리고는 문제집을 덮어 버렸다. 도대체 이게 뭐하는 짓인지.
정부와 교육관계자들은 아이들을 학업의 스트레스에서 벗어나게 하며 공교육을 최대한 살리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고 하였다. 사교육의 폐해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대책 마련을 한다고 하였다. 그러나 정작 소위 고위층이라는 분들의 자녀들은 어떤가? 해외 유학에, 사립 초등학교에, 고액 개인과외에, 강남으로 위장전입까지. 과연 이 교육이라는 배가 강물을 떠나 제대로 바다로 흘러갈지 자신이 없다. 교육은 백년지대계라고 늘 떠들고 다니지만, 도저히 바뀌지 않을 것 같은 절망은 나뿐만은 아닐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