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일 <한겨레>는 "꼰대스러운 '숙대 축제', 그들만의 '드레스코드'"라는 제목의 기사를 게재하였다. 최근 숙명여대 한 학과의 선정적인 주점 홍보물이 논란이 되었고, 숙명여대 총학생회가 축제 복장 규제안을 내놓았던 사실이 알려졌다. 이에 대해 적절한 처사가 아니었다는 비난 조의 기사를 내보낸 것이다.
이 기사는 복장을 규제한다는 것은 전근대적 발상이라는 말을 하고 싶은 듯, '복장 규정 안이 꼰대스럽다'고 표현하고 있다. 복장을 규제한다는 것 자체가 가지는 위험에 대해서는 많은 사람들이 우려하는 것이리라. 하지만 전후 사정을 살핀 흔적없이 '꼰대스럽다'는 말까지 동원하며 숙대 총학생회를 비꼬는 것은, 축제에서 스스로를 성상품화하며 호객에 열을 올리는 일부 대학생만큼이나 생각없어 보인다.
숙명여대 총학생회의 이번 안에는 매우 상세한 복장 규정과 함께 규정을 어겼을 시 벌금을 부과할 수 있다는 내용까지도 포함되어 있어, 그 내용만 보았을 때에는 즉각적인 거부감을 일으킬 수 있다. 하지만 <한겨레> 보도 이전에 나와 있는 다른 기사들을 보면 알 수 있듯이, 복장 규정은 최근 대학축제에서 흔히 일어나는 불미스러운 행태에 대비한 방책인 것이다.
일부 대학생들이 실제로 퇴폐업소가 연상되는 야한 의상을 입고 주점을 운영하거나, 성적 비유로 가득한 메뉴판을 내놓는 등, 대학축제의 선정성은 이미 사회문제가 되어 왔다. 또한 '일베'로 대표되는 일부 남성들이 축제에서 여대생들의 몸을 촬영하여 SNS에 올리고 조롱하는 일도 있었다.
일부 선정적 옷차림이 축제 전체 분위기를 흐리는 것을 원하지 않는 것은 물론이고, 남성들의 폭력적 시선 또한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을 터. 이런 상황에서 복장 규정은 '우리 모두 조심하자'는 여대생들의 조금은 미숙하지만 자연스러운 목소리인 것이다.
일부에서는 숙대 총학생회의 규제는 '여성들의 노출이 성폭력의 빌미를 제공한다'는 남성 중심적 담론을 받아들이는 퇴행적 결정이라는 주장도 한다. 분명 어떤 경우에도 성폭력은 정당화될 수 없다. 하지만 작정을 하고 속옷을 훔쳐보려고 달려드는 늑대들 속에서 여성이 자신을 지킬 수 있는 방법은 좀 촌스러워지더라도 단추 하나 더 잠그는 것 밖에 무엇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
복장 규정의 내용을 보면 알 수 있듯이 발목을 가리는 치마를 입고, 단추를 목까지 채워 잠그자는 이야기가 아니다. 선정적인 복장이나, 일을 하다 보면 의도하지 않은 노출이 생길 수 있는 상황을 피하자는 것인데 이를 대학문화의 보수화로까지 연결시켜 해석하는 것은 무리수 중 무리수가 아닐까?
대학축제에 침투해 들어온 선정적 문화는 예사롭게 여길 문제가 아니다. 이번 일을 계기로 대학 축제에 대한 근본적인 반성을 해야 한다는 의견은 새겨들을 만하다. 대학 축제가 젊은이의 열정을 다양한 모습으로 표출할 수 있는 장이 되어야 한다. 지금과 같이 모든 학생들이 과나 동아리 운영비를 마련한다는 명목으로 주점을 열고, 경쟁이 치열해지자 스스로를 돋보이기 위해 선정적인 색깔을 입는 것은 젊은이다운 선택이라 할 수 없다.
문병란 시인이 노래하듯, 젊은이는 그 웃음 하나로도 세상을 초록빛으로 바꾼다. 하지만 우리 사회의 젊은이들은 자신들이 이미 가지고 있는 힘, 그 아름다움을 보지 못하고, 바깥으로만 눈을 돌리고 있다.
어린이들이 사회의 거울이라는 말이 있듯이, 대학 축제의 선정성은 우리 사회의 모습이 그대로 투영된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놀라움을 금할 길이 없는 일부 젊은이들의 행태는 사실 기성세대의 모습을 닮아 있다. 요새 우리 사회를 특징화할 수 있는 단어는 안타깝지만 천박(淺薄)이다.
'천박하다'는 말과 나란히 두었을 때 가장 잘 어울리는 단어는 '자본주의'일 것이다. 이 '천박자본주의'의 혼령은 이제는 우리 사회 각 영역으로 침투한 듯하다. 돈이 되는 일이라면, 권력을 잡는 데 유리하다면, 주목을 끌 수만 있다면, 모든 자극적인 말과 행동을 서슴지 않는 정치인, 방송인, 막장 드라마, SNS의 글들 그리고 기사까지도 생각이 없어도 너무 없어 보인다.
대학 축제의 선정성을 비판하기에 앞서 생각의 깊이와 품위를 잃어버린 우리 사회의 천박함을 통탄해야 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