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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봉누리길
 고봉누리길
ⓒ 유혜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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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와, 대추 알 정말 굵다!"

상감천 마을이었다. 대추나무에 주렁주렁 매달린 대추는 알이 엄청나게 굵었다. 어린아이 주먹만 했다. 가지가 휠 정도로 대추들이 잔뜩 매달렸다. 가을이구나, 하는 생각이 저절로 들었다.

9월의 마지막 날, 고봉누리길을 걸었다. 전날, 흠뻑 내린 비 덕분인지 하늘은 아주 말갛게 갰고, 공기는 신선했으며, 길은 촉촉하게 젖었다. 가을을 머금은 바람은 아주 상큼했다. 이런 날 걸으면 발걸음이 저절로 가벼워졌다.

고봉누리길은 안곡초등학교에서 출발해 안곡습지공원, 고봉산, 금정굴, 황룡산을 지나고 용강서원을 거쳐 상감천 마을에 이르는 길로 전체길이는 6.72 km다. 예상 소요시간은 2시간 30분. 코스 길이가 짧은데도 걷는데 소요되는 시간이 2시간 30분이나 되는 것은 고봉산과 황룡산을 거쳐 가기 때문이다. 숲이 우거진 고봉산, 황룡산 숲길은 걸을 때마다 "길이 너무 좋다"는 감탄이 저절로 나오는 길이다.

이날, 우리는 상감천 마을에서 출발했다. 고봉누리길을 걸을 때마다 안곡초등학교에서 출발했기 때문에 이번에는 길을 거꾸로 걸어보기로 했던 것이다.

 상감천마을에서 해바라기가 익어가고 있었다.
 상감천마을에서 해바라기가 익어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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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추나무 앞에서 까치발을 했지만 알이 굵은 대추는 손에 닿지 않았다. 대추나무 키가 아주 컸기 때문이다. 대추들은 햇빛을 받아 반짝이면서 조금씩 익어가고 있었다. 익어가는 건 대추만이 아니었다. 엄청나게 키가 웃자란 해바라기 역시 고개를 푹 숙인 채 씨앗이 영글어 가고 있었다. 해바라기도 어찌나 큰지 가마솥 뚜껑만 했다. 상감천 마을은 땅이 비옥한 것이 분명했다. 대추알이 굵고 해바라기도 저렇게 큰 것을 보니 말이다.

용강서원 앞에서 오래 서성였다. 맑은 날씨 때문인지 용강서원 태극문의 태극 문양이 아주 선명했던 것이다. 용강서원은 '함흥차사'의 어원이 되었던 박순(朴淳)을 모시기 위해서 세워졌다. 처음부터 황룡산 자락에 용강서원이 세워졌던 것은 아니었다. 원래 위치는 박순이 죽임을 당한 함경도 용흥 강변이었다.

태조 이성계가 왕위를 태종에게 물려주고 머물렀던 곳은 함경도 함흥이었다. 태종은 이성계를 한양으로 다시 모시려 했지만 이성계는 거부했다. 한양으로 돌아가는 것을 거부했을 뿐만 아니라 아들이 보낸 문안사(問安使)들을 죄다 죽였다. 함흥으로 한 번 가면 다시는 돌아올 수 없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 바로 함흥차사였던 것이다.

 용강서원
 용강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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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순은 죽음을 각오하고 이성계를 만나러 갔고, 이성계는 마음을 움직여 결국 한양으로 돌아가겠다는 약속을 한다. 하지만 박순은 결국 영흥강변에서 죽음을 맞이한다. 이성계는 그를 죽이고 싶지 않았지만 신하들이 그 역시 죽여야한다고 주장하자 어쩔 수 없이 "박순이 강을 건넜으면 살려두고 강을 건너지 않았으면 죽이라"는 명령을 내렸던 것이다.

이성계는 박순이 강을 건넜을 것으로 짐작될 때가 돼서야 그런 명령을 내렸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박순의 명은 거기까지였다. 강을 건너지 못하고 지체했기 때문이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병이 나서 지체했단다.

용강서원이 세워진 것은 1686년, 숙종 때였다. 하지만 분단으로 용강서원에서 제사를 지낼 수 없게 된 후손들이 1980년, 황룡산 자락에 용강서원을 세웠다. 현재 용강서원에는 박순 외에도 박순의 고조할아버지인 박서(朴犀) 장군의 위패도 함께 모시고 있다. 박서 장군은 고려 때 명장으로 귀주대첩에서 큰 공을 세웠다.

황룡산으로 들어서는 길에는 밤송이들이 잔뜩 떨어져 있었다. 봄이나 여름에는 고양힐링누리길에 밤나무가 아주 많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 나무를 올려다보면서 걷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가을이 되면 밤나무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길 위에 엄청나게 많은 밤송이들이 떨어져 있기 때문이다.

 고봉누리길, 황룡산
 고봉누리길, 황룡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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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송이들은 대부분 속이 비었지만 가끔은 밤알이 남아 있기도 하다. 또 밤송이에서 튕겨져 나온 밤알들이 길 위에 흩어져 있기도 한다. 이날, 우리는 밤송이 속에 담긴 밤톨을 꺼냈고, 길 위에 뿌린 듯이 흩어진 밤톨들을 줍기도 했다. 나중에 주운 밤을 모두 모으니 한 되는 족히 되었다.

그뿐인가. 도토리들도 제법 많이 굴러다니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입에 도토리를 물고 산 속을 폴짝이며 뛰어다니는 다람쥐들이 평소보다 많이 보였다.

아직 여름을 머금어 잎이 무성한 나무들은 울창한 숲을 이루고 있었다. 숲 사이로 난 길은 고즈넉했다. 바람이 이따금 나뭇잎을 흔들며 지날 갈 뿐이었다. 황룡산의 높이는 해발 134.5m에 지나지 않지만 숲이 울창해 도심에서 아주 멀리 떨어진 외진 곳을 걷고 있는 느낌을 자아낸다. 이 산에 누런 용이 산다고 해서 황룡산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단다.

숲길을 걷고 또 걸었다. 길을 구불거리면서 이어졌고, 걷는 걸음은 그 어느 때보다 가벼웠다. 그 가벼운 걸음이 갑자기 무거워진 것은 금정굴 때문이었다.

 금정굴 입구
 금정굴 입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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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10월, 20여 일에 걸쳐 고양경찰서 경찰관이 불법으로 파주와 고양 일대의 주민 153명 이상을 부역자 또는 부역자의 친척이라는 이유로 학살한 곳이 바로 금정굴이었다. 이곳에 끌려온 사람들 가운데 단 한 사람만이 기적적으로 목숨을 건졌다고 한다. 이런 사실이 세상에 알려진 것은 지난 2006년이었다.

2006년, 금정굴 희생자 유족들이 금정굴 희생자 유족들이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약칭 '진실화해위')에 진실규명을 요청했던 것이다. 약 1년에 걸친 조사 끝에 진실화해위는 진상을 밝혀냈다.

금정굴 부근에는 진실화해위가 2007년에 세운 금정굴의 진상규명을 알리는 내용의 표지판이 있다. 전쟁은 오래 전에 끝났지만 상흔은 여전히 현재 진행형인 것이다. 가족이 처참하게 살해당한 상처를 안고 살아온 유족들의 한은 진상규명이 된 지금도 남아 있다.

그 표지판에서 멀지 않은 곳에는 1994년에 금정굴 피해 유족들이 학살의 진실 규명을 호소하는 표지판이 세워져 있었다. 아픈 우리의 역사가 금정굴에 아로새겨져 있는 것이다. 그러니 발걸음이 무거워질 수밖에 없었다.

 고봉누리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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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정굴 입구에서 길이 뚝 끊어졌다. 길을 건너야 했다. 고봉로를 건너니 음식점들이 보인다. 시간을 보니 12시가 훌쩍 넘었다. 음식점에서 흘러나오는 음식 냄새를 맡으니 배가 고파진다. 엎어진 김에 쉬어간다고 했던가. 점심 먹고 가자, 이날의 점심메뉴는 쌈밥이었다.

황룡산을 벗어나니 고봉산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산의 품으로 다시 안긴 것이다. 고봉정에서 잠시 쉬었다가 다시 걸음을 재촉했다. 고봉산 역시 높은 산은 아니다. 해발 208m지만, 황룡산 못지않게 숲이 우거졌다. 

고봉산에는 춘향전의 모태라는 한씨 미녀 이야기가 전해 내려온다. 고구려 22대 임금인 안장왕은 태자 시절, 백제에 빼앗겼던 한강 유역의 땅을 되찾겠다는 일념으로 백제의 사정을 살피러 백제로 숨어들었다가 한씨 미녀를 만나 사랑에 빠진다. 하지만 고구려로 돌아갈 때 한씨 미녀를 데리고 가지 못했다.

사랑하는 여인을 남겨두고 고국으로 돌아간 안장왕은 왕 위에 올라 한강 유역의 땅을 수복하고 한씨 미녀를 데리고 오려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세월만 흘러갔다. 이럴 때 한씨 미녀의 미색에 반한 백제의 태수가 그녀에게 청혼을 하게 된다.

사랑하는 사람이 있으니 청혼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태수의 청혼을 거절한 한씨 미녀는 사랑하는 사람의 신분을 밝히지 못해 결국 적과 내통한 첩자라는 누명을 쓰고 옥에 갇히게 되었다. 사랑하는 남자가 고구려 왕이라고 밝혔어도 한씨 미녀는 옥에 갇힐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적국의 왕을 사랑했으니 말이다.

그러나 이 이야기의 결말은 춘향전과 마찬가지로 해피엔딩이다. 안장왕은 위기에 처한 한씨 미녀를 을밀 장군을 보내 구해 고구려로 데려오게 했기 때문이다.

 영천사
 영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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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천사 앞을 지난다. 깔끔하게 정리된 절 마당이 인상적이다. 대웅전 앞에서 잠시 걸음을 멈추고 부처님 앞에 서서 두 손을 모아 절을 했다. 은은한 향냄새가 마음속으로 스며든다.

이번에는 이무기 바위 앞을 지난다. 용이 되지 못한 이무기는 서럽고 슬프다. 천 년 동안 공덕을 쌓으면 이무기도 용이 될 수 있다는데, 천 년이라는 길고도 긴 세월을 용이 되겠다고 기다릴 수 있을까? 그만한 인내심이 있었다면 이무기는 용이 되어야 옳았다. 용이 되지 못한 이무기는 바위가 되어 고봉산 자락에 붙박여 있으면서 사람들의 구경거리가 되고 말았다.

다음에 올 때는 이 자리에 붙박여 있지 마라, 이무기야. 용이 되어 하늘로 올라가렴. 이렇게 마음속으로 되뇌며 이무기 바위 앞을 지나간다.

안곡습지공원이다. 고양시 일대가 개발될 때 사라질 위기에 처한 안곡습지공원을 살린 이들은 고양시민들이다. 가을의 안곡습지공원은 볼거리가 많다. 잠시 걸음을 멈추고 공원 안을 둘러보는 것도 좋으리라. 가을이 가슴으로 폭 안기는 느낌을 받을 수 있을 테니까.

[고봉누리길] 6.72km, 소요 예상시간 2시간 30분.
안곡초등학교 - 안곡습지공원 - 영천사 - 고봉산 - 금정굴 - 황룡산 - 용강서원 - 상감천마을


#고양힐링누리길#안장왕#한씨미녀#고봉누리길#용강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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