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생애 한가운데 책 읽는 할머니가 있었다몸집 큰 컴퓨터 두 대가 놓여진 창밖은 고궁의 정원처럼 잘 꾸며진 모 회사 연수원 마당이다. 은행나무, 회화나무와 어우러진 여러 그루의 소나무들이 아담한 숲을 이루고 있다.
나는 최근부터 이 정원이 내 정원처럼 여겨져서 이런 홍복(洪福)을 누릴 수 있나 싶어 매우 행복하기까지 하다. 뿐만 아니다. 새벽 다섯 시면 까마귀 한 마리가 빠짐없이 찾아와서 까옥까옥 울어대며 나를 깨워준다.
나는 비몽사몽에서 듣는 이 까마귀 소리에서 종종 돌아가신 외할머니와의 추억을 회상한다. 그리고 까마귀 우는 소리가 마치 할머니가 책을 읽는 소리처럼 낭랑하다고 느껴지는 것이다.
그런데 똑 같은 까마귀 소리라도 듣는 사람의 입장에 따라서 천차만별처럼 다른 모양이었다. 우리 아파트 옆집에 사는 사람은 까마귀 소리 때문에 잠을 이루지 못한다고 야단인데, 바로 위층에 사는 사람은 까마귀는 길조라며 좋은 일이 있을 것 같다고 말하고, 아래층 사는 사람은 까마귀를 어떻게 쫓아내는 방법이 없을까 생각하는 것이었다.
비슷비슷해 보지만 결국 하나도 같은 모습이 아닌 사람들의 생각처럼, 많은 시인들이 발표해서 나온 시들도 똑 같은 시는 하나도 없다. 따라서 이를 읽는 사람의 관점도 다 다르다. 또 시에 대한 개념도 저마다 다르다. 아니 이렇게 이 관점과 시점이 교차되면서, 다양한 시학을 낳는다 싶다.
나는 습작기 시절에 "한 편의 위대한 시는 세상을 태산처럼 옮겨 놓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제는 이런 생각을 하지 않는다. 그러나 왜 그때 그런 생각을 내가 하게 되었는지는 어렴풋이 지금에야 알 것도 같다.
어느 시인은 "나를 키운 것은 8할이 바람이었다" 했지만, 나를 시인으로 키운 것은 8할이 나의 외할머니였다고 말할 수 있다. 지면상 내가 외할머니와 함께 살게 되었는지의 연유는 여기서는 생략한다.
유년 시절의 나는 생사의 귀로에서 헤매는 불치병같이 힘든 결핵을 앓아서 학교 갈 때보다 골방에서 누워 지낼 때가 많았다. 요즘처럼 TV나 동화책이 없던 시절이다 보니, 온 종일 열이 올랐다가 내렸다가 각혈을 하며 사색이 되어 누워 있는 손녀딸을 위해, 외할머니께서 틈이 나시면 이야기를 들려주거나 책을 읽어주셨다.
그런데 할머니가 읽어주는 책은 동화책이 아니라서 내게는 어려웠다. 그렇지만 어린 마음에 부모님도 날 돌보아주지 않는데 나를 위해 별의별 민간약재를 구해서 약을 달여 주거나 아프다고 칭얼대는 내게 자장가처럼 책을 읽어주셨던 할머니는 그때의 내게는 어머니 이상의 존재였다.
어린 나는 할머니의 청아하면서도 듣기 좋은 책 읽은 소리에, 끙끙 앓아누워 쳐다보는 천장을 캔버스삼아 아름다운 상상의 나래를 펴곤 하였다. 그 후 한참 커서 알게 되었는데, 할머니가 그때 내게 읽어주셨던 책들이 김삿갓 시집, <구운몽>, <장화홍련전>이나 중국의 이태백 시 따위 등이었다.
나의 외할머니는 옛날 여성이지만 한글과 한문을 익히고 계셨다. 그러나 그때 그 시절의 여성들이 제대로 대우 받지 못했듯이 제적등본을 떼어보면 당신의 이름은 빠져 있고, 성씨(姓氏)만 기재되어 있는 것이다.
나의 할머니는 오늘날의 여성들이 누리는 가장 기본적인 권리도 누리지 못한 분이시다. 당신은 98세인가 돌아가셨는데, 그 할머니의 생의 한가운데는, 도도한 우리네의 역사의 아픔이 가슴 쓰린 한탄강 물소리처럼 콸콸 흘러간다.
당신께서는 종종 철부지였던 나에게 이런 말씀을 하셨다.
"내가 시인이나 작가라면 얼마나 좋겠니? 그럼 내 인생이 소설 12권으로 나올 될 텐데…"라고 한탄하시거나, "만약 네가 커서 시인이나 소설가가 된다면 김삿갓 시인이나 김만중 선생처럼 많은 사람들의 위안이 되는 글을 써다오"라고 말이다.
그때의 할머니의 말씀이 내가 문학의 길을 잃고 헤매일 때 자이로콤파스 같은 역할을 해주곤 한다….
겨우 내내 실밥 뜯고 검은 물 들여, 팔과 가슴과 다리, 등, 허리 부분을 건어물처럼 묶어 둔 미군복(美軍服)을 압수해 갔지. 큰 오빠는 '슈샤인 보이'가 되고, 막내 누이는 식모살이로 팔려가고, 작은 오빠들이랑 껌 팔다 털레털레 집으로 돌아오면 앉은뱅이 재봉틀에 엎드려 엄마는 자고 눈 먼 할머니 뿌연 실 보풀 날리며 괴뢰군 군복 뜯다가, 신문지에 궐연 말아 피우며 말했지. — 어린 것들 걸리고 굶기며 피난 안 가길 잘했지. 정말 잘했지. 안 그러니 애미야 (중략) 달밤이면 검은 염색공장 지붕 위에서 까마귀 영혼의 옷을 갈아입고 시끄럽게 울다 날아갔지.- 송유미 시, '미군부대 옆 염색공장 …' 일부'1947년 12월 8일생'이란 부제를 단 '미군부대 옆 염색공장…'는, 껌팔이로 나선 아이가 주인공이다. 시 전체에 스며드는 억수로 퍼붓는 현재의 "장맛비"가 저 망각 너머 암연(黯然)을 퍼 올리는 구실을 한다. 전해들은 바로는 송유미는 이산가족의 3세이다. 시인의 간접 체험에의 진실한 의태 묘사가 흡인력에 기여한다. 이번 시집은 특이하게 시의 제목에 생년월일로 적고 있는 시편이 많다. 이는 그때 태어난 사람들의 유년의 기억이나 현재 상황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기 위해서다. 하여 주인공의 전쟁 중의 가족사, 생활사를 리얼하게 윤색해 낸다. <검은 옥수수밭의 동화>의 해설에서― 이경철 문학평론가여자 2는 화색이 도는 얼굴로 차(茶)를 끓인다. 서서히 끓는 차(茶)처럼 서서히 홍등에 내리는 가랑비 내리는 빌딩 처마 밑에서 환전하는 아줌마 앞을 지나는 행인 1, 행인 2에 조명은 옮겨진다. 신용대출카드 대출을 권하는 아줌마 2에서 조명은 잠시 꺼진다. 동동동 그들의 찻잔 속으로 떠오르는 은행잎 같은 지폐 몇 장에 조명은 다시 오프. (중략) 예수를 사랑합시다. 천국이 당신 곁에 있습니다. 천국이 당신 곁에 있습니다. 머리에 붉은 띠를 두른 신의 전사. 동전바구니를 끌어안고 잠든 앵벌이 잠 위로 오는 비 올 지라도 한 사흘 내렸으면' 하는 노래와 함께 비가 쏟아진다. 홍등은 비에 젖어 감처럼 붉다.그리고…… 암전. - 송유미의 시, '오늘도 소월의 비는 …' 일부위의 시는 시나리오의 형태를 띤 실험시이다. 장면마다 대화와 해설 지문으로 이뤄진 이 독창적인 시는 읽으면 읽을수록 창작자의 시적태도와 사유의 배경이 얼마나 체험적인지, 그리고 시의 기법 중 '관찰'과 시각적 이미지가 또 얼마나 중요한지 그 특장이 고스란히 살아 있다. (중략) 시각이미지의 다양성 추구는 한국 현대시가 빠뜨린 시나리오 시작법 형태의 전범으로 남을 만하다. (<시에 미치다>에서― 김동원 시인)영국 속담에 "시는 낳은 것이지 만드는 것이 아니다"라는 말처럼 나는 '오늘도 소월의 비는 …'를 쓰고 2003년인가 모 지방지에 발표한 바 있다. 그 발표된 시를 읽으면서 나는 내가 시를 만들었다는 생각에 후회스러움이 밀물처럼 밀려들었던 것이다.
그후 개인적인 사정으로 이사를 자주 다니면서 내 작품이 게재된 잡지인 줄도 모르고 많은 책들을 정리하는 과정에서 해당 잡지를 버렸다(그 파일이 저장된 컴퓨터도 몇 차례나 바뀌었다). 그리고 10여 년 넘은 올 여름 무렵, 내게로 부메랑(?)처럼 그 "시"가 돌아왔다.
그러니까 나도 까맣게 잊어버린 시를 대구시인협회 전 사무국장이었던, 김동원 시인이 그의 <시에 미치다> 평론집에 시의 원본과 평이 나란히 게재하여 보내온 것이었다. 나는 탕자처럼 돌아온 내 시를 읽으면서, 법화경의 "의내명주(衣內明珠)"란 말씀을 떠올렸다.
한 친구가 길을 떠날 때 그의 친구가 주머니 속에 넣어준 보석을 찾지도 않고 거지꼴로 내내 떠돌았다는 불교설화처럼 말이다. 하여 곧 출간 될 나의 시집 <검은 옥수수밭의 동화>에 '미군부대 옆 염색공장…'와 게재할 예정이다.
시로 쓰는 다큐멘터리 가끔 내가 쓴 시가 이상하게 나도 낯설게 느껴질 때가 있다. 또 가끔 내 시의 스타일을 바꾸어 쓰고 싶다는 열망에 의해 내가 쓴 것인가 하는 생각도 들 때가 있다. 어딘가 미흡하게 느껴져서 다시 쓰는 시도 더러 있다.
'오늘도 소월의 비는…'는, 부산 초량동 텍사스촌, 그러니까 한국 전쟁 뒤 미군과 유엔군을 상대하는 기지촌이었던, 부산역 바로 건너편 외국인 거리(상해 거리)가 시의 무대이다.
'미군부대 옆 염색공장…'는, "시로 쓰는 "다큐"라 할 수 있다. 나의 어머니와 외할머니의 삶과 인생이 고스란히 깃든 시다. 해서 다시 이야기는 외할머니의 손에 의해 자란 나의 유년 시절로 돌아간다.
내가 태어나서 열 살까지 자란 곳은 서울시 중구 신당동 16번지이었다. 이 신당동에서 왕십리는 멀지 않은 거리이다. 그 당시 어머니는 동대문 시장에서 장사하셔서, 외할머니가 살림을 도맡아 하셨는데 우리 집에는 객식구(客食口)가 많아서 밥하는 언니들이 별도로 서너 명이나 있었다.
6.25사변 이후 우리네의 어머니들이 다 그랬듯이 우리 어머니께서도 억척여성이셨다. 그래서 생활력 강한 어머니 덕분에 나의 유년은 모친의 사랑을 받을 수 없었지만, 그 시절의 누구나 힘들어 했던 가난을 모르고 풍요하게 자랐다.
시대를 읽는 감각이 유난히 밝았다고 할 수 있는 어머니는 집안에 재봉틀 수십 대씩 들여놓고 가내 공장을 차려 생산한 제품들을 동대문시장 가게에 직접 내다 파셨다. 그때 일하는 미싱공 언니들은 수십 명에 달했다. 그녀들은 대개 시골에서 상경하여 남의집살이를 전전 하다가 우리 집에 온 사람들이라 과년(瓜年)했다.
언니들이 쉬는 날은 일감이 없는 날이었고, 그들의 휴일이었다. 모처럼 휴일을 만나 아침 일찍 단장하고 서울구경을 하러 나간 언니들이 통금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을 때도 있고, 아예 집을 나가서 연락이 두절된 언니들도 많았다.
그런 프로그램이 생기면 할머니는 왕십리 번화가나 종로(종삼)가는 전차를(1968년까지 다녔다) 타고 언니들을 찾으러 다니곤 하셨다. 그럴 때마다 어린 나는 혼자 있기 싫다고 울고불고해서 하는 수 없이 할머니의 등에 업혀서 왕십리역에서 전차를 탔던 기억이 물안개처럼 피어나기도 한다.
'미군부대 옆 염색공장…'은 나의 유년의 기억의 현상학이라고 하겠다. 그 기억의 바탕 위에 현재의 부산의 "상해의 거리의 눈 푸른 여자 '오늘도 소월의 비는…'들의 삶과 중첩되고 있다 하겠다.
시는 내게 삶의 거울이다. 내 삶(기억)과 시는 결코 별리 될 수 없다. 살아남은 날까지 내 삶의 일부이면서, 전부이기도 한 외할머니의 아픈 삶을 "시로 다큐화" 하는데 신명을 다 하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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