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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태도 항공 사진 암태도는 비교적 커다란 섬에 속한다.
▲ 암태도 항공 사진 암태도는 비교적 커다란 섬에 속한다.
ⓒ 신안군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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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태도는 목포와 22km 떨어진 곳으로, 압해도 송공포구에서 차도선이 하루에 10번 다니며 소요시간은 25분 정도 걸린다. 목포에서 서쪽으로 28.5㎞, 서남단 해상에 위치한 암태도는 총 40.08㎢의 면적 중 13.25㎢나 되며, 섬 한복판에 승봉산(해발 355m)이 늠름한 기백을 자랑한다.   암태도는 돌이 많고 바위가 병풍처럼 섬을 둘러싸고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9개의 큰 해수욕장을 갖고 있는 이웃섬 자은도와 달리, 변변한 모래사장 하나 없어 내세울 것이 마땅치 않은 암태도는 본래 쌀 한톨 구경하기 힘든 척박한 땅이었다. 그러다가 마명 방조제를 쌓아 드넓은 갯벌이 옥토로 바뀌게 되었다.

목포 - 압해도를 잇는 압해대교  압해도 송공항에서 암태도 오도항을 차도선이 하루 10번 다닌다.
▲ 목포 - 압해도를 잇는 압해대교 압해도 송공항에서 암태도 오도항을 차도선이 하루 10번 다닌다.
ⓒ 이재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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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를 바꾸는 연도, 이제 연륙을 기다린다

2008년 6월의 일이다. 자은도, 암태도, 팔금도, 안좌도, 추포도, 반월도, 박지도, 우목도, 부소도, 매도, 거사도 등 11개 섬으로서는 혁신적인 사건이 일어났다. 목포와 압해도 바다를 연결하는 압해대교가 8년여 공사 끝에 완공된 것이다.

예전에는 독립된 섬으로 여객선이 하루 두세 차례만 이 섬들을 정박하였기에 시간도 많이 걸리고 요금도 비싸 여간 불편한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지금은 하루에 10번이나 압해도 송공항을 통하여 차를 가지고 가면 다 돌아볼 수 있게 됐다. 더 혁신적인 일도 기다리고 있다. 2018년 압해도 송공항과 암태도 오도 간에 연륙교 새천년대교가 완공되면 압해도는 자동차로 드나들 수 있는 육지화를 실현하게 된다. 연장 16km(도로 9km, 해상교량 7km)의 새천년대교는, 이미 다리가 착공된 안좌도―자라도 그리고 장산도와 신의도, 하의도, 비금도, 도초도 등과도 이어지게 되어 '섬이 더 이상 섬이 아닌' 천지개벽과도 같은 일이 실현되는 것이다.

흑산도와 우이도를 제외한 신안의 다이아몬드 제도와 연결되는 교량으로서, 10개 면 3만여 명의 주민이 혜택을 보게 될 것이며, 새천년대교 건너 더 많은 여행객들이 이 지역을 찾아올 것이다. 돌이켜보면, 신안군의 눈부신 발전은 자은도―암태도―팔금도―안좌도가 3개의 연도교로 연결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할 수 있다. 이 3개의 연도교 공사는 다도해 특정지역 개발계획의 일환으로 도서주민의 생활환경을 향상시켜 균형발전을 도모하고 해상국립공원 개발을 추진시키기 위함이었다.

2008년 압해대교가 건설되기 이전에 목포 북항에서 암태도를 거쳐 비금과 도초도를 향해 가는 향남호가 오전과 오후에 걸쳐 하루 두 번 다녔다. 암태도와 육지를 이어주는 유일한 교통수단인 이 배로 1시간 40분 정도 달려오면 암태도 남강 나루터에서 종선이 반갑게 마중 나왔다.

암태도의 남강 나루터는 90여 년 전 암태도의 역사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곳이다. 암태도 소작쟁의를 주도한 서태석을 검거하기 위해 목포에서 온 경비정 앞에 수많은 군중들이 몰려가 이 나루터에서 무언의 시위를 감행했다. 일제시대에는 대여섯 시간씩 풍선을 타고 목포로 갔다. 소작쟁의로 투쟁하던 이곳 주민들이 문재철 지주와 경찰 그리고 법원이 있는 목포로 원정시위를 했던 그 뱃길은 이제는 25분으로 단축되었다. 그래도 이곳 섬주민들은 압해도와 암태도를 연결하고 있는 새천년대교의 개통을 학수고대하고 있다.

암태도의 관문 남강포구  물이 가득 들어와 있는 전경
▲ 암태도의 관문 남강포구 물이 가득 들어와 있는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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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년 전 목포항에서 여객선 향남호는 암태도를 경유하여 비금도, 도초도로 뱃길이 오전과 오후 하루 두 번 있었다. 바로 이웃 섬인 자은도와 팔금도가 연도가 되기 전에는 암태도와 육지를 잇는 유일한 교통수단이었다. 목포에서 이 배를 타고 1시간 40분 정도 파도를 헤치고 갔는데 들머리인 남강나루터에서 종선이 반갑게 손님을 맞았다. 송기숙님의 소설 <암태도>의 현장을 찿아서 지금도 한 해에 약 2백여명의 사람들이 이곳을 찾는다고 한다.

남강나루터에서 암태중학교까지는 도보로 약 40분 정도 소요된다. 교정 오른쪽에서 약 2시간 정도 올라가면 승봉산 정상에 다다른다. 이곳에 서면 신안군의 전체 섬이 한눈에 들어온다. 승봉산 기슭에 위치한 노만사는 신안군에서는 가장 오래된 사찰로 1873년에 창건되었으며, 해남 대흥사의 말사末寺이다.

노만사  신안군에서 가장 역사가 깊다.
▲ 노만사 신안군에서 가장 역사가 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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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상 산중에 세워진 이 절의 입구에는 덩굴식물로 칭칭 감긴 일주문이 묘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주변은 기암괴석이 병풍처럼 감싸고 있어 자못 이색적인 풍경이다. 절을 찾았더니 주지스님인 대경스님만이 외롭게 절을 지키고 있는데, 스님은 "신도도 거의 없고 찾는 사람도 별로 없고, 나 혼자 덜렁 있네" 하며 쓸쓸히 웃는다.

대웅전 1동, 칠성각 1동, 요사채 1동으로 구성되었으며, 법당 뒤편에는 10년 가뭄에도 마르지 않는다는 자궁 모양의 약수터가 있다. 노만사에서 10분 정도 가면 승봉산이 나온다. 암태도에는 불교보다 기독교가 매우 강하다. 암태도 출신인 문준경 전도사가 6 ․ 25 전에 매우 활발하게 활동하여 목포 앞바다의 수많은 섬들을 다니며 전도한 결과, 성결교회들이 많이 생겼다. 암태도를 비롯하여 자은도, 팔금도, 임자도 등은 대부분 성결교회이다.

암태도 농민소작쟁의

농업을 삶의 근본으로 살아온 신안군 섬들은 역사적으로 땅을 지키기 위해 피와 땀을 많이 흘렸다. 일제시대에는 하의도에서 소작작쟁의 시조가 되는'하의도 소작쟁의'가 330년 동안 계속되는 기록이 있고, 이웃 섬인 암태도에서는 서태석과 열성을 가진 청년들에 의해 농촌계몽운동과 애국독립 운동이었던 농민항쟁사가 암태도 현장에서 살아 숨쉬고 있다.

암태도는 가난하고 보잘 것 없는 섬이었는데 '근대사에 길이 빛날' 소작항쟁의 횃불을 치켜들었던 것이다. 암태도는 일제시대에 소작쟁의의 대명사로 기억되고 있을 정도로 유명한 섬이다. 소작쟁의의 전말은 이러하다.

일제강점기, 일제의 가혹해진 소작료 수취가 발단이었다. 당시 암태도의 지주는 문재철, 나카시마 세이타로, 천후빈이었다. 이 가운데 문재철은 논 29만 평, 밭 11만 평을 소유한 제일 지주였다.

농민 항쟁 사적비  암태도 소작쟁의 비석
▲ 농민 항쟁 사적비 암태도 소작쟁의 비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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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평균적인 소작료는 50% 정도였는데 문재철은 생산량의 60~80%에 이르는 소작료를 요구했다. 따라서 암태도민들은 이러한 가혹한 소작료로부터 대책을 마련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청년 서태석, 서창석 등은 1923년 말 암태소작인회를 조직하였다. 지난해 진주소작노동자대회와 순천소작쟁의에서 결의한 대로 논 40%, 밭 30%로 하며, 불응하는 지주에게 소작료를 내지 말 것, 소작료로 내는 농작물 운반은 1리(4km) 이내로 결의하였다. 이 결과, 지주 나카시마 세이지로나 천후빈은 이를 대체로 수용하였으나, 문재철은 이를 거절하였다.

이에, 소작료 납부 거부와 함께 협상을 시도하던 중 문재철 측은 암태소작인회 간부에게 린치를 가하여 부상을 입히자 문재철의 부친 송덕비를 무너뜨리는 등 경찰 고소와 고발, 구속 등으로 이어졌다. 이 과정에서 지주측에게 유리한 집행으로, 소작인회는 13명의 구속석방 운동을 대대적으로 펼치기 시작하면서 쟁의가 확대되기 시작하였다.

6월 4일과 5일, 7월 두번에 걸쳐 암태면 주민 1천여명이 수십척의 풍선을 타고 목포까지 나와 광주지방법원 목포지원 앞에서 6월 8일까지 단식 농성을 계속하였다. '죽어도 같이 죽고 살아도 같이 살자'는 마음으로 아사동맹결의 때문에 그 당시에 커다란 사회문제로 비화되었다. 신문의 보도로 전국적인 반향을 불러일으켰음에도 13명의 석방은커녕 공판에 회부되고 말았다. 그러자 다시 500명의 섬주민이 목포법원 마당에서 밤낮을 불문하고 6박 7일에 걸친 단식농성을 시작하였다. 이에 서울·평양 등 전국적으로 지원하는 강연회와 지원금을 모금하였다. 한국인 변호사들은 무료로 변호를 자청하면서 파문이 계속 확산됐다.

이에, 마침내 일제는 더 이상 문제가 확산되는 것을 막기 위해 목포경찰서장이 암태도로 달려와 중재를 시작하였다. 전남도청과 무안군청 쪽도 문재철을 설득하여, 결국 타협안 6항(1항, 소작료 40%, 10%는 농업장려금 외 5항)이 마련되었다.

이 중재로 인하여 쌍방간의 고소를 취하하면서 구속자들은 집행유예와 벌금형으로 풀려났다. 암태도 소작쟁의는 섬주민들의 강고한 단결력과 지속적인 투쟁으로 전국적 반향을 불러일으켜 다른 소작쟁의에 큰 힘을 불어넣어주었다는 의의를 갖는다. 목숨을 걸고 싸운 결과 소작인회의 커다란 승리였으며 반일투쟁과 반봉의 상징으로 손색이 없을 것이다. 암태도에서 불이 붙은 이 소작쟁의는 1925년 도초도, 26년 자은도, 1927년 지도의 매화도 등 신안군 등 섬지방과 전남은 물론 전국적으로 소작쟁의에 큰 영향을 미치었다.

암태도 소작쟁의 기념비  섬 중앙 면소재지에 서 있다.
▲ 암태도 소작쟁의 기념비 섬 중앙 면소재지에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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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여 년의 세월이 지났음에도 빛나는 항쟁의 맥은 이 섬에 남아 있는 듯하다. 쟁의위원들이 뛰던 고샅길과 아사투쟁에 나서던 결의에 찬 섬주민들의 목포행 뱃길 따라 그들의 자취를 이곳 암태도 사람들은 가슴 속에 그대로 새겨두고 있다.

오도선착장 가는 길에 '암태도농민항쟁사적비'가 세워져 있었다. 사적비에는 항쟁에 대한 내용이 적시되어 있었고 그 옆에 서태석 선생 추모비가 세워져 있다.

삼거리 가운데에 큰 탑이 하나 눈에 들어온다. 국내 첫 소작쟁의였던 암태도 소작인 항쟁을 기리는 기념탑인데 주변에 '암태도 농민소작쟁의기념공원'이 조성되어 있었다. 기념탑 비석에는 소설 '암태도'를 쓴 송기숙 선생의 글이 새겨져 있다. 그날의 투쟁을 증거하는 글이다. 1998년에 암태면사무소 옆 부지 4백여 평에 높이 7m, 폭 1.2m의 크기로 건립된 이 기념탑에는 소작인 항쟁사와 항쟁에 참여했던 농민 43명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농민항쟁의 아픔을 딛고 분연히 일어난 섬 암태도는 이제 푸른 바다가 넘실대고 이야깃거리가 가득한 섬으로 인식되었다. 21년 전에 암태도를 방문하여 처음 알게 된 암태도 소작쟁의 배경지, 이 일을 생각하면 가슴이 아프다. 요즈음도 공권력과 맞선다는 것은 자신과 가정을 희생해야 되는데, 90여 년 전 그것도 총칼로 지배하던 일제시대에 감히 상상도 못할 일이 벌어졌다니 더욱 의미가 깊다.

소작회장으로 쟁의를 이끌었던 서태석(1885~1943)의 말로는 비참했다. 소작쟁의 뒤에 독립운동을 하다 고문 후유증으로 고향사람들마저 일제의 감시와 탄압으로 돌봐주지도 못했고 고향에 돌아와 빌어먹다 죽었다고 한다.

소작쟁의의 핵심적인 인물은 서태석(1885∽1943)인데 1913년부터 7년간이나 암태 면장을 지낸 바 있다. 3.1운동을 계기로 서태석은 민족의식을 자각하고 독립운동가의 삶을 살기 시작했다. 3.1운동 1주기 때 유인물을 배포하다 체포돼 1년간 수감생활을 하기도 했다. 이후 사회주의 사상을 접했고 1923년에는 암태소작인회를 결성해 소작쟁의를 주도했다.

하지만 서태석은 불행한 말년을 보냈다. 소작쟁의 후에도 독립운동을 하다 수차례 투옥됐는데 그때 받은 고문 후휴증으로 정신분열증을 앓았다. 서태석은 정신병자처럼 거리를 전전하다 압해도의 어느 논에서 벼 포기를 움켜쥐고 죽음을 맞이했다. 사회주의 사상을 가졌었다는 이유로 해방 후에도 서태석은 금기의 대상이었다. 일가친척은 감시와 탄압을 받으며 고난의 세월을 살았다. 친일파의 나라가 만든 비극이었다. 서태석은 2003년에야 비로소 독립유공자 훈장을 받았다. 서태석의 며느리는 1923년 11월에 일어났던 광주학생의거의 주역 박기옥이었다. 1998년 '암태도소작인항쟁기념탑'이 세워졌다.

소작쟁의 이후 해방 뒤에 당시 지식인들이 그랬듯이 사회주의 사상을 받아들인 것 때문에 추모비 하나 제대로 세우지 못하였다. 그가 독립유공자로 지정된 것은 노무현 정부 들어서이다. 암태면사무소 직원은 "그동안 사회주의 사상과 관련이 있다는 이유로 기념탑 조성이 쉽지 않았다"고 했다. 이제는 세월이 많이 흘러 소작쟁의의 흔적을 찾을 수 없다. 지난 1998년 우여곡절 끝에 조성된 암태도 소작인항쟁기념탑이 전부이다.

유관순 누나와 서태석은 둘 다 똑같이 독립만세를 불렀지만 한 사람은 오래 전에 교과서에 실렸고 한 사람은 2003년에야 비로소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됐다. 독립운동을 하면 후손이 불행해진다는 속설이 실감난다.

암태도는 1973년도에 주민수 8만 8,340명에 이르기도 했으나, 산업화와 이농바람으로 인구가 줄어 현재 2천여 명이 소작항쟁의 횃불을 치켜들었던 자랑스러운 역사의 땅에서 긍지를 간직하며 살고 있다.

암태도 민속

송곡리에 있는 매향비  이 비는 섬에서 유일하다.
▲ 송곡리에 있는 매향비 이 비는 섬에서 유일하다.
ⓒ 이재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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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향비

익금에서 나와 송곡리로 가면 매향비가 하나 있다. 길 옆 논 가운데에 위치한 보호각 속의 비석이다. 안내문에 의하면, 매향은 향을 묻는 의례이다. 말단 향촌사회를 단위로 해서 구현되며, 특히 발원자들이 공동적으로 느끼고 있는 현실적 위기감에서 시작된 순수한 민간신앙에서이다. 1405년 건립된 매향비는 암태면 장고리에서 동쪽으로 2km 정도 떨어진 '비석거리'에 위치한다.

높이 157㎝, 너비 65㎝, 두께 30㎝인 '매향비埋香碑'는 정제되지 않은 자연석의 평평한 면에 음각되어 있는 상태로 발견되었고 7행의 글씨가 새겨져 있는데 향나무를 바다에 묻어 언젠가 환생할 미륵과 인연을 맺고자 하는 신앙의례의 한 가지로, 매향의식을 행하고 기록을 남긴 것이다.

비문의 내용에는 제1행에 '매향처반사도'라 하여 매향의 위치와 방위가 명시되어 있다. 나머지 비문의 내용은 '매향처, 사방기준기, 매향시기, 주도집단, 매향과 비석을 세운 경위, 참여자, 시주자' 등이 기록되어 있다. 매향비의 특징은 매향의 주도층으로 '향도'가 명시된 점과 '매향처'를 명확하게 기록하고 있으며 남북한을 통틀어 현재까지 유일하게 섬에서 발견된 점이 특이하다.

송곡우실  바람을 막는 방파제 역할
▲ 송곡우실 바람을 막는 방파제 역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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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금우실
1830년경 우씨가 배를 타고 와서 지금의 익금, 신석 일대를 돌아보고 방풍 및 방파제로서 사대문을 건립하기 위해 농치를 동문, 생김을 서문, 오루골을 남문, 익금을 북문이라 하였다. 현재는 북문인 익금우실만이 남아 있다.

송곡우실
송곡마을 어귀에 길다란 담장이 있는데, 이 담장은 1905년 지나가던 스님이 마을 번창과 우환을 막으려면 이곳에 담을 쌓아야 한다고 하여 돌을 이용해 우실을 만들었다.

소작인항쟁기념탑
암태도 소작쟁의는 1920년대의 대표적 소작쟁의로 1923년 8월~1924년 8월까지 전개되었다. 암태도 소작쟁의는 서해안 섬들과 전국적인 소작쟁의가 계기가 되었으며, 지주와 그를 비호하는 일제 관헌에 대항한 항일운동이었다. 이에, 1998년 5월에 조성면적 95평에 높이 6.74m의 기념탑을 건립하여 암태도의 숭고한 소작인 항쟁을 기념하고 있다.

추포노도비
수곡리와 추포리를 잇는 노두는 여느 섬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명물인데, 썰물때면 2.5km에 이르는 두 마을을 연결해주는 이 징검다리는 오래 전부터 전천후 바닷길 구실을 해왔다.

남강수사휼은선정비
1799년에 나주제도민의 이름으로 건립된 이 비는 당시 전라우수사 김처한의 휼은공덕을 기린 것으로, 여기에는 1755년 이후 건비 당시까지의 민막 내용과 그 제역除役의 사실이 나타나 있다.

노만사
신안군에서는 가장 오래된 사찰로 1873년에 창건되었으며, 해남 대흥사의 말사로 규모가 작다. 해상산중에 세워진 이 절은 대웅전, 칠성각, 요사채 1동으로 구성되었으며, 법당 뒤편에 10년 가뭄에도 마르지 않는다는 자궁모양의 약수터가 있다. 발 아래 펼쳐지는 바다경치도 놓치기 아까운 비경이어서 암태기행의 필수코스로 각광받고 있다.

암태도 가는 길
압해도 송공포구에서 차도선이 하루에 10번 다니며 소요 시간은 25분 정도 걸린다.

지리적 개요
암태도는 전라남도 신안군 암태면에 딸린 섬으로 동경 126°06′, 북위 34°49′에 위치하며 면적 29.04㎢, 해안선 길이 39.8㎞이다. 인구는 2011년 970가구 1,933명이다. 목포시에서 서쪽으로 약 25㎞ 떨어져 있다.

 지명유래
돌이 많고 바위가 병풍처럼 둘러싸여 있다 하여 암태도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암태도를 떠나면서
암태도를 이곳 사람들은 항쟁의 섬으로 부른다. 일제치에서 가혹한 소작료 착취에 반발하는 반일농민항쟁은 보기 드문 승리를 얻어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암태도는 소작쟁의 역사에 길이 남을 무용담이지만 그러나 오늘날 교과서에는 나오지 않는 묻혀진 역사가 되어 안타깝다.

암태도는 1973년도에 1,506가구 8834명에 이르기도 했으나, 지금은 산업화로 인하여 급격한 이농현상으로 현재 1,945명이 살고 있다. 자랑스러운 역사를 간직한 암태도 소작항쟁의 횃불을 높이 치켜들었던 그때를 생각하면 얼마나 자랑스럽고 긍지가 생긴지 모른다. 그러나 이런 대단한 자부심에도 암태도소작쟁의는 여전히 미완으로 남아있다. 소작쟁의 뒤에 섬을 휩쓸고 간 이념의 생채기는 아직도 기록에 담아내진 못하고 있다.

지주와 소작농 사이에 있었던 6.25 전쟁 당시의 극심한 좌우대립이 있었고 60년대에는 섬을 떠나야 했던 토박이들의 아픈 사연들이 그렇다. 그 동안 안기부의 방해 공작으로 항쟁비도 1990년대에 세워졌다. 곡절이 너무 많은 암태도의 진실을 밝히는데 여전히 시간이 필요하다.

필자가 전국의 섬들을 답사하면서 섬의 자취나 역사, 풍정과 생활상 등을 스케치해온 지도 벌써 20년이 넘었다. 22년이 넘도록 섬에 살면서 섬에 대한 답사와 수집을 대부분 지속하였다. 여객선을 타고 섬을 다니면 시간을 맞춰야 하고 예산 또한 맞추는 게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래서 2004년도에는 아예 4.67톤짜리 탐사선을 구입하여 직접 운항하면서 전국에 산재한 섬을 답사하고 있다. 그러다보니 웬만한 섬은 안 다녀본 곳이 없다. 그것도 수차례 거듭되고 있다. 이렇게 다녀본 수많은 섬들 중에는 필자의 발길을 오래 머무르게 하고 유독 관심이 쏠리는 섬들이 있다. 암태도는 그 중 하나이다.

덧붙이는 글 | 전과 동일



#소작쟁의 #암태도 #노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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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포대학교 도서문화연구원 연구원으로 2019년까지 10년간 활동, 2021년 10월 광운대학교 해양섬정보연구소 소장, 무인항공기 드론으로 섬을 촬영중이며 포털사이트 네이버의 재정 후원으로 전국의 유인 도서 총 447개를 세 번 순회 ‘한국의 섬’ 시리즈 13권을 집필했음, 네이버 지식백과에 이 내용이 들어있음, 지금은 '북한의 섬' 책 2권을 집필중

이 기자의 최신기사책 '북한의 섬'을 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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