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도 내가 새벽 산을 오르는 이유새벽 5시, 핸드폰 알람소리에 눈을 뜬다. 아직 단잠에 빠져 있는 둘째를 들쳐 업고 화장실에 가서 소변을 누인 뒤 주섬주섬 산에 오를 채비를 한다. 사과 하나에 물 한 통 그리고 수건 한 장. 아, 팟캐스트를 듣기 위한 이어폰까지.
집에서 검단산까지는 승용차로 겨우 10분밖에 안 걸리지만, 미사리 한강변을 끼고 가는 그 길은 산을 오르려는 내게 매우 소중한 정보를 제공한다. 바로 눈앞의 산이 얼마나 선명한지, 한강 위로 안개가 얼마나 끼었는지는 등은 내가 그날의 등산로를 결정하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기준이기 때문이다. 뒤돌아볼 필요 없이 마냥 직진하여 정상에 오를 것인지, 아님 등 뒤로 펼쳐진 절경을 눈에 담아가며 앞으로 나아갈 것인지는 바로 그 10분 안에 결정된다.
그러나 가을이 깊어가는 요즘 등산로에 대한 고민은 점차 사라지고 있는 중이다. 새벽 5시가 되어도 환했던 8월과 달리 9월 말, 10월 초의 새벽 5시 30분은 사방이 어둡기 때문이다. 검단산의 팔부능선 정도를 찍어야 동이 트는 바, 어차피 그 전에는 산 아래 풍경을 볼 수 없다. 그러니 정상까지 가장 짧은 등산로를 택하는 빈도가 높아질 수밖에.
따라서 여름과 비교하여 가을에는 발걸음이 더욱 빠르다. 비록 산을 오르기 시작하는 시간에는 사방이 어두워 아직 채 저물지 않은 달빛에 기대어 등산로를 봐야 하지만, 어쨌든 내가 조금만 부지런을 떤다면 정상에서의 일출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검단산 정상에서의 일출. 사실 그것은 내가 가을의 새벽 산을 오르는 가장 큰 동기인지도 모른다. 여름만 하더라도 살 빼는 것이 등산의 주요 목적이었다면 이제는 그 이상이 있어야 몸을 움직일 수 있다. 5kg 감량이라는 목표 달성도 달성이지만(물론 아직 완벽하지는 않다!), 어둠이 깊어진 만큼 새벽에 일찍 눈뜨기도 힘들 뿐더러 이불 속 온기에 대한 미련도 커졌기 때문이다.
한 번 산에서의 일출을 본 사람은 절대 그 광경을 잊을 수 없다. 아니, 없다고 한다. 매일 벌어지는 자연의 순리이지만 일출만큼 사람의 심장을 뛰게 만드는 장면은 그리 많지 않기 때문이다. 하루에 한 번씩 이뤄지는 기적 앞에서 나 역시 새롭게 시작하고 싶다는 욕망. 그것도 온 힘을 다해 오른 산 정상에서 맞닥뜨리는 그 거룩함. 아마도 선인들이 말했던 호연지기는 그때 느낄 수 있는 벅찬 감정을 의미하는 것이리라.
등산, 근대의 발명
5시 30분. 오늘은 기어코 일출을 보겠다고 다짐하며 산을 오르기 시작한다. 그러나 처음부터 만만치 않다. 언제나 하늘은 해가 뜨기 직전 가장 어둡기 때문이다. 게다가 검단산은 등산을 시작하는 곳에 전나무 숲이 있어 더욱 깜깜하다. 혹여 손전등이 있어도 평소 산을 자주 오르지 않았다면 새벽 산행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졸졸 물이 흐르는 계곡을 지나 나무뿌리를 피해가며 오르는 산길. 불현듯 마주친 누군가의 무덤은 여러 상념을 떠올리게 한다.
무덤가의 도깨비불이 더 이상 공포가 아닌 시대. 지금 내가 새벽 산을 오를 수 있음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아마도 그것은 20세기 문명의 혜택(?)일 것이다. 100여 년 전만 하더라도 이 어두운 새벽, 깊은 산을 오른다는 것은 목숨을 걸어야 가능했던 일이기 때문이다.
언제 출몰할지 모르는 호랑이와 같은 산짐승들. 과연 선인들에게 일출은 그 모든 위험을 감수하고서라도 볼 만한 장관이었을까? 아니, 어쩌면 그래서 그들의 일출은 더욱 아름다웠을지도 모른다. 목숨을 걸고 오른 산이니만큼 그 감정은 배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씁쓸해졌다. 결국 지금 내가 일출을 보려고 이 시각에 아무 걱정 없이 산을 오르는 것은 그만큼 인간이 자연을 파괴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지 않는가. 어두운 밤 손전등 하나 없이 달빛에도 환히 잘 보이는 정비된 등산로나 야밤에 산을 올라도 사나운 산짐승을 만날 리 없다는 믿음 등은 그만큼 우리의 문명이 건강하지 않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사실 그러고 보면 특정한 목적 없이 건강을 위해 혹은 취미로 산을 오르는 것 자체가 극히 근대적인 개념인지도 모른다. 결국 먹고 사는 것과 크게 관련 없는 시간의 향유는 근대의 생산력 향상으로부터 시작되었고, 이것이 이후 개인의 건강 관리나 취미 생활로 자리 잡은 것이기 때문이다.
과거 선인들이 산을 오를 때는 제를 올리거나, 성을 쌓거나, 지리를 살피거나, 봉수를 올리는 등 반드시 분명한 목적이 있지 않았던가. 물론 극히 일부 계급들은 유람을 위해 산을 올랐겠지만, 그들은 대부분 가마꾼들이나 일꾼들을 대동했을 터, 지금과 같은 개념의 등산객들은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오늘도 보지 못한 검단산 일출
30분쯤 올랐을까. 동이 트기 시작했다. 희미하던 등산로가 선명해졌고, 명멸하던 산 아래 불빛은 어느새 사라지고 없었다. 대신 떠오르는 태양빛으로 인해 산 밑의 풍경들이 발갛게 물들기 시작했다. 조급해지기 시작했다. 지금 이 수준이라면 정상에 올랐을 때 역시나 간발의 차이로 일출을 보지 못할 것이 빤했기 때문이다. 조금 더 속력을 내야 한다. 해가 떠오를 때는 단 1분의 시간도 매우 큰 차이가 난다.
바빠지는 발걸음. 하지만 이내 위기에 봉착하고 만다. 어느 산을 오르든 어김없이 등장하는 바로 그 깔딱 고개가 눈앞에 나타난 것이다. 굳이 명칭을 붙이지 않아도 저절로 깔딱일 수밖에 없는, 하지만 계곡에서 능선으로 갈아타기 위해서는 필히 거쳐야 하는 그곳. 오늘 일출을 볼 수 있느냐 없느냐는 결국 이 급경사를 얼마나 빨리 극복하느냐에 달려 있다.
오늘만은 이 급경사를 날듯이 뛰어넘을 수 있을까? 그러나 발걸음은 더 이상 나의 것이 아니다. 급한 마음에 상체는 앞으로 기울이지만 하체는 따라주지 않는다. 사실 검단산을 두세 번 오르면서부터 굳혀진 정상까지의 등정 시간은 더 이상 단축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그래도 10년 전에는 여차하면 죽을 힘을 다해 정상까지 뛰기도 했는데, 이젠 그럴 힘도, 패기도 없다. 다만 꾸준히 페이스만 유지해도 감지덕지하다. 산을 오르면서 얼마나 쉬지 않고 발걸음을 옮기느냐 정도가 시간에 영향을 끼칠 뿐이다.
드디어 도착한 검단산 정상. 아쉬움에 탄식이 나올 수밖에 없다. 안됐지만 오늘도 태양은 이미 지상으로부터 약간 떠올라 그 붉고 둥그런 자태를 뽐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걸음이 조금만 빨랐어도 일출을 볼 수 있었을 텐데 아까 물 한 모금 마시며 잠시 쉬었던 것이, 어둠 속에 발걸음을 잠시 지체한 것이 한스러울 뿐이었다.
대체 언제쯤 나는 산에서 일출다운 일출을 볼 수 있을까? 연휴가 되면 검단산 정상 즈음에 일출을 보기 위해 숙박을 하는 사람들의 텐트를 볼 수 있는데, 그 정도의 정성이 있어야만 일출을 볼 수 있는 걸까? 이제 계속해서 해 뜨는 시각이 늦어지니 시간이 조금 더 흐르면 자연스럽게 일출을 볼 수 있지 않을까? 설마 그때는 일어나기 힘들어서 일출을 못 보는 건 아니겠지?
비록 일출은 못 봤지만, 해가 뜬 직후의 검단산에서 바라본 전망 역시도 가히 일품이었다. 남한강과 북한강을 따라서 피어있는 물안개는 불그스레한 새벽 햇빛을 받아 아름다운 운해를 이루고 있었으며, 그 구름 위로 삐죽삐죽 솟아 있는 주변 산들의 모습은 하나의 수묵화였다. 이러니 과거 선인들이 검단산을 신령스럽다고 할 수밖에.
내려오는 길. 다시금 결심한다. 내 다음에는 반드시 일출을 보고 말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