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매화분에 물을 주어라."

대학자 퇴계 이황이 임종 직전 마지막 안간힘을 다해 당부했던 말이라고 전해진다. 이 말을 당부하기 전 가족들의 도움으로 간신히 몸을 일으킬 수 있었던 퇴계는 늘 그래왔던 것처럼 매화나무를 만진 채 지그시 눈을 감고 한참동안 있었다고 한다. 외출할 때를 빼고는 늘 함께 했던 나무였다. 그 후 아들에게 자신처럼 나무를 만져볼 것을 요구했고, 아들이 매화나무를 만진 후 자세를 바로 하자 비로소 눈을 감았다고 한다.

퇴계는 마지막으로 매화나무를 만지고 그 매화나무를 돌보라 당부했다. 조선의 대학자 퇴계 이황은 이처럼 죽는 순간까지 매화를 사랑했다. 이처럼 나무를 사랑한 선비는 그만이 아니었다. 이이, 김정희, 성삼문, 송시열, 정약용 등 우리 역사 한 획을 그었던 인물들을 그들이 사랑한 식물들을 통해 만날 수 있다.

죽을 때까지 매화를 걱정한 퇴계 이황

<선비가 사랑한 나무>(강판권 지음 / 한겨레출판사 펴냄 / 2014.04 / 1만 4000원)
 <선비가 사랑한 나무>(강판권 지음 / 한겨레출판사 펴냄 / 2014.04 / 1만 4000원)
ⓒ 한겨레출판사

관련사진보기

<선비가 사랑한 나무>는 나무를 통해 '주요 역사인물들의 삶'을 조명한 책이다.

평생 매화나무 바라보는 것을 낙으로 삼았던 퇴계는 한양에서 늘 함께 했던 매화분을 미처 귀향길에 데려가지 못했음을 아파했다. 주변 사람의 배려 덕분에 배편으로 따로 그 매화분을 전해 받는 순간 재회의 기쁨에 시까지 지을 정도로 열렬한 매화나무 애호가였다.

특정 매화나무를 만나기 위해 먼 길을 떠나기도 했다. 옛 선비들은 매화를 사군자의 으뜸으로 둘만큼 사랑했다. 자신의 매화를 함께 감상하자고 제안하는 사람들도 있었고 퇴계는 마다하지 않고 찾아갔다.

김언우도 퇴계에게 매화 감상을 같이 하자고 제안한 사람 중 하나였지만, 건강상의 이유로 끝내 성사되지 못한다. 퇴계는 김언우의 매화를 보지 못한 아쉬움이 가득 담긴 시 두 편을 지어 보내며 그 아쉬움을 달랬다. 퇴계는 죽을 때까지 92제 107수의 매화시를 썼고 그중 62제 71수를 모아 <매화시첩>이란 책을 엮었다.

이 책을 통해 만나는 퇴계의 사랑은 유별나다. 퇴계는 건강이 좋지 못해 뜰의 매실나무 앞에 자주 가지 못하게 되자 매화가 핀 가지 하나를 꺾어다 책상 위에 올려놓고 바라봤다. 그러나 매화 향이 빨리 사라질까봐 마음껏 바라보지도 못했다고 한다. 퇴계는 왜 그리 매실나무, 매화를 사랑했던 것일까?

"퇴계를 비롯한 수많은 성리학자들이 매실나무를 사군자의 하나로 꼽은 것은 이 나무의 삶을 통해 자신들의 삶을 돌아보기 위해서였다. 우리가 위대한 스승으로 꼽고 있는 성리학자들도 한 그루의 나무를 공부의 대상으로 삼아 격물(기자 주 : 나무를 제대로 만나고, 제대로 느껴 이치를 깨닫는 것)을 실천했다. 퇴계처럼 한그루의 나무를 절실하게 사랑하는 마음으로 격물을 한다면, 인간은 누구나 위대한 존재로 성장할 수 있을 것이다." (본문 중에서)

정조에게 사랑받고 싶었던 남자, 이옥

퇴계 이황의 매화 사랑 못지않게 책에서 인상 깊었던 인물은 이옥이다. 그는 당시의 내로라하는 명문가 선비들이 천대시한 식물을 연구했다. 자귀나무와 만남을 갖고, 나무 심는 법을 통해 자신의 억울한 처지와 분노를 달랬다. 후세에 도움이 되는 수많은 식물관련 책들을 저술한 우리나라 식물전문가이다.

이옥은 자귀나무를 통해 정저의 문제반정 그 희생자인 자신의 억울한 처지와 분노를 삭히며 오히려 식물연구를 하고 수많은 식물관련 책들을 썼다.
 이옥은 자귀나무를 통해 정저의 문제반정 그 희생자인 자신의 억울한 처지와 분노를 삭히며 오히려 식물연구를 하고 수많은 식물관련 책들을 썼다.
ⓒ 김현자

관련사진보기


1790년 증광 생원시에 합격한 후 이옥은 성균관에서 지내고 있었다. 그는 글쓰기에 자부심을 갖고 있었다. 그 누구의 비평에도 개의치 않고 평소 세상일에도 크게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럼에도 정조에게만큼은 문장을 인정받고 싶어 노심초사했다고 한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그는 정조의 문체반정의 가장 큰 희생자가 되고 만다.

정조는 박지원의 <열하일기>에서도 볼 수 있는 진보적 문장을 잡문이라 규정한다. 그리하여 당시 선비들에게 황경원(1706~1787)이나 이복원(1719~1792) 등 정통적인 고문가들의 문장을 모범으로 삼아 모든 글을 쓰게 한다. 개인의 글은 물론 나라일과 관계되는 모든 글을 이에 맞춰 쓰게끔 한다.

당시 이옥은 박지원과 남공철처럼 선진적 맵시의 글을 썼다. 그런데 정조는 집안이 좋거나 어느 정도 사회적 지위를 가진 사람들에게는 엄하게 훈계한 뒤 고칠 기회를 준다. 특히 당시 안의현감이었던 박지원에게는 문체를 고치면 홍문관과 규장각 등의 벼슬까지 주겠노라고 제안했다.

그러나 일개 유생에 불과한, 심지어 서자인 이옥에게는 문체를 고칠 기회조차 주지 않는다. 한술 더 떠 1795년의 경과(나라의 경사 때 실시하는 시험) 응시자격을 박탈한다. 그리고 충군(군대 편입)의 처벌까지 내린다. 억울하지만 이옥으로선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이옥은 나무도 많이 심었다. 그가 심은 나무는 소나무를 포함해서 31종 880여 그루였다. 이옥은 나무를 심을 때 중국 당나라 유종원의 <종수곽탁타전>에 나오는 곽탁타의 방법을 본으로 삼았다. 다른 사람들이 나무를 심는 방법과 달랐지만, 아주 간단했다. 다른 사람들은 나무의 본성을 무시한 채 늘 간섭했지만, 곽탁타는 나무의 본성을 잘 살펴서 터를 잘 잡고 충분히 거름을 주고 나면 거의 간섭하지 않았다. 그래서 곽탁타가 심는 나무는 늘 잘 자랐다. 이옥이 직접 나무를 심으면서 곽탁타를 언급한 것은 유종원이 곽탁타의 입을 통해 당시 사사건건 간섭하는 군주 정치의 문제점을 지적했듯이, 지식인에 대한 정조의 간섭을 우회적으로 비판한 것이다. 권력에 휘둘리지 않으려 노력했던 이옥은 다양한 분야에 대한 연구와 글쓰기를 계속했다." (본문 중에서)

나무와 얽힌 그들의 사연, 인생 성찰의 기회

퇴계 이황도, 이옥도 굴곡진 삶을 살았다. 연산군 폭정시절에 태어난 퇴계는 7개월 만에 부친을 여의고 홀어머니 밑에서 경제적으로 어렵게 자란다. 그리고 훗날 두 번째 부인까지 죽는 아픔까지 겪는다.

퇴계는 이처럼 불운과 아픔을 겪으며, 수많은 당파싸움으로 인한 희생마저 비켜가고 대학자로 후세에 이름을 남겼다. 이는 어쩌면 매화를 통해 자신의 삶을 늘 성찰하고 올바른 삶을 살고자 노력했기 때문이 아닐까?

이옥은 또 어떤가. 억울하기 짝이 없다. 아마도 성정이 난폭한 사람은 화병에라도 걸려 엄청난 일을 저지르거나, 스스로 비관해 죽었을지도 모른다. 혹은 김삿갓이나 김시습처럼 보편적인 삶을 버렸을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만약 이옥이 정조에게 문장을 인정받았다면 그가 이 땅의 식물에게 관심을 가졌을까? 당시 대부분의 주류들이 천한 것이라며 외면했던 식물에 대해 그처럼 많은 책들을 쓸 수 있을까?

나머지 주인공들도 마찬가지이다. 책은 퇴계나 이옥처럼 자신에게 닥친 불행과 아픔을 '나무와의 만남과 사랑, 성찰'을 통해 이겨낸 위인들의 이야기를 풀어내고 있다. 나아가 많은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는 저술을 하거나 후학을 양성하며 삶의 가치를 드높인 역사인물들의 굴곡진 삶과 그 과정을 들려준다. 역경 없는 삶이 있으랴. 주인공들 저마다의 삶이 역경을 이겨내는 방법과 지혜를 제시해준다. 이 책을 추천하는 가장 큰 이유다.

저자는 나무를 화두로 삼아 수학을 하는 생태사학자로 유명하다. 우리 주변에서 쉽게 볼 수 있는 나무에 대한 풍부한 지식들을 얻을 수 있는 것도 이 책의 큰 장점이다. 그동안 학문이나 사상, 역사 사건 등을 통해 주로 만났던 인물을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나무로 만난 것 역시 신선했다. 이 책을 추천하는 두 번째 이유다.

덧붙이는 글 | <선비가 사랑한 나무>(강판권 지음 / 한겨레출판사 펴냄 / 2014.04 / 1만 4000원)



선비가 사랑한 나무 - 인문학자 강판권의 나무와 성리학 이야기

강판권 지음, 한겨레출판(2014)


태그:#퇴계 이황, #매실(매화)나무, #자귀나무, #이옥, #문체반정
댓글1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오늘도 제게 닿아있는 '끈' 덕분에 건강하고 행복할 수 있었습니다. '책동네' 기사를 주로 쓰고 있습니다. 여러 분야의 책을 읽지만, '동·식물 및 자연, 역사' 관련 책들은 특히 더 좋아합니다. 책과 함께 할 수 있는 오늘, 행복합니다.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