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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선대원군이 가야산에 지은 남연군의 제각은 명덕사다. 잊힌 조선왕실의 제각을 가야산역사문화연구원이 1872년 덕산군고지도와 고종 실록의 고증을 통해 제각의 위치와 이름을 밝혔다. 60년대 초에 사라진 남연군의 제각은 왕실의 제례사 및 향토유적으로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

흥선대원군은 남연군 묘을 연천에서 가야산의 상가리로 면례하며 별반 기록을 남기지 않았다. 그 곳은 바로 백제 시대 사찰인 가야사가 있던 곳으로 남연군 묘를 면례하기 위해 불태워졌기 때문이다. 또 하나의 이유는 남연군 묘를 지을 당시 흥선대원군이 실권을 잡기 전의 일이라 절집을 불태우는 행위는 의궤로 기록할 수 없었으리라는 것이다.

대원군은 생전 아버지의 묘를 쓰는 일에 운명을 걸어 서울에서 최고의 석공과 목수들을 동원해 남연군의 제각과 묘지의 장명을 왕궁 건축물과 버금가도록 세웠다. 영원할 것 같던 조선 왕조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 가야산의 조선 왕실 제각 시설 혼란기에 헐려 사라지게 됐다.

올해 4월에 발족한 가야산의 역사와 문화를 바로 잡기 위해 출발한 가야산역사문화연구소는 가야사 지와 남연군 묘의 제각(실)등을 연구하며 첫 번째 결과물로 1960년 초에 사라진 남연군 묘의 제각 이름을 고증을 통해 밝혀냈다고 전했다.

1872년 덕산군고지도
가야산에서 남연군의묘와 제각을 중심으로 그려진 1872년 덕산군지도
▲ 1872년 덕산군지도 1872년 덕산군고지도 가야산에서 남연군의묘와 제각을 중심으로 그려진 1872년 덕산군지도
ⓒ 규장각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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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2년에 제작된 덕산군 고지도와(사진) 1872년 이전에 가야사 터에 지어진 남연군의
제각에 관한 고증은  다음과 같다. 승정원일기 고종 9년의 기록을 통해 남연군 제각의 이름을 알 수 있다.

조경호가 아뢰기를
"신이 명을 받들고 경기전의 일을 마친 후 이어 덕산(德山)으로 가서 남연군(南延君)의 묘소를 살펴보니 탈이 없었고, 명덕사(明德祠)를 살펴보니 탈이 없었습니다. 감히 아룁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대신과 예조 판서도 같이 덕산의 묘소에 갔는가?"
하자, 홍순목이 아뢰기를
"돌아오는 일정에 역참을 배정하였기 때문에 과연 예조 판서와 같이 묘소에 갔습니다."

위 대목을 보면 남연군 묘의 제각이 명덕사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명덕사라는 제각은 조선 왕실 최고의 기술과 시설로 건축된 것으로 보인다. 당시 동원된 석공과 목수는 당대 최고의 기술자들로 1893년 남연군 묘(가야사 지)를 방문한 운양 김윤식은 서울 왕릉에 버금가는 제각과 제실이 있었다고 명양 행견 일기에 기록했다.

이 사실은 면양 행견 일기를 통해 고증할 수 있다.

1893년 5월 초 5~6일.

가야동에 도착하니 산길이 구불구불하고 곳곳마다 물소리가 시끄럽게 들렸다. 남연군묘에 도착하였는데 이곳이 바로 가야사의 유적이다. 산세가 웅장하고 사방을 에워싼 듯 멀리서 바라보니 맑고 깨끗했다.

예부터 이 산은 왕기가 있다고 했는데 과연 이곳으로 묘소를 이장한 뒤에 성인이 탄생하고 이어서 용흥(임금)의 경사가 있었으니 지관들이 풍수를 떠드는 것을 괴이하게 여길 것이 없다. 산을 가꾸고 소나무를 기르고(조경) 각을(집) 짓고 비 세우는 등의 일들이 능소보다 덜하지 않다. 보덕사는 동북쪽 기슭에 있었는데 역시 갑자년 이후로 나라에서 세운 것이다.

이 같은 고증은 필자가 상가리가 고향인 75세 김창남씨를 통해서도 확인했다. 남연군 제각의 건축물과 사당의 이름에 대해 명덕사라고 하는데, 이에 대해 아는지 물하니 어렵게 기억을 되살려 명덕사를 정확히 한자까지 기억하며 "어린 시절의 놀이 마당이었던 제각과 그 주변의 웅장한 제실은 높다란 담장이 온전히 있고, 동쪽으로 정문이(홍살문) 있었으며 커다란 현판도 있었다"고 기억했다.

현재 가야사 지는 3차 발굴 중이다. 가야사 지 즉, 남연군의 제실(각)의 터를 발굴하는 것이다. 가야사는 1845년 대원군에 의해 불태워 사라지고, 그 터 위에 남연군의 제각을 세운 것이다. 발굴 중인 가야사 지에서 왕실 묘역과 같은 제단으로 추정되는 제각 터를 발견했다. 가야사의 흔적은 제각의 기단 아래쪽에 묻혀 있는 것이다.
실선 표시는 잡석의 통기초 남연군 제각인 명덕사터다
 실선 표시는 잡석의 통기초 남연군 제각인 명덕사터다
ⓒ 이기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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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충남역사문화 연구원의 발굴 책임자는 "왕실의 제각이 서울 지역에만 있고 왕실과 그 후손들에 의해 나름 잘 관리돼 있지만 제실 발굴의 예가 그동안 없어 남연군 제각의 발굴이 소중한 자료가 된다. 추가 발굴을 해야한다"고 말했다.

이는 조선 왕실 제각 터의 정보를 얻을 수 있는 기회로 조선 왕실 제각 등 복원을 통해 향토 유적으로 지역을 위해 활용할 수 있을 것이다. 현재 기단은 3단으로 조성돼 이곳이 제를 드리기 위한 제단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두 채의 제각중 1개소는 제기 등을 관리하는 곳이며. 1개소는 제를 직접 드리던 장소로 추정된다.

제각 주변은 제각을 보호하기 위한 담장이 둘러져 있고, 배수를 할 수 있는 기능도 함께 있을 것으로 추정한다. 주민들이 주장하는 당시의 모습과 일치하는 모습이 고종 실록의 고증과 현장 발굴을 통해 54년 만에 드러난 것이다.


태그:#명덕사, #남연군제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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