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열한 아침 장사가 끝났다. 이젠 그래도 여유롭다. 아침 내내 서서 손님(악동이라고 부르는 그들) 맞이하고, 일일이 물건 찾아주며 정신없었던 초기. 지금은 사뭇 다르다. 카운터에 턱하니 앉아, 찾는 물건을 말로 위치 설명해 주고, 손짓으로 아이들을 움직인다. 아이가 찾기 어려운 종이나 악기 같은 것들만 직접 찾아준다.
왁자지껄한 아이들이 한바탕 지나간 8시 반. 이때부턴 유아들을 어린이집에 등교시키거나 일찍 장을 보러 오는 '어머니'들의 차례. 한 어머니가 들어오며 "송곳 있어요?"
드디어 올 게 왔다. 없는 물건이다!
"예? 송곳이요? 잠깐만요. 그게 지금 없네요. 죄송합니다. 언제까지 필요하세요? 갖다 놓겠습니다."꾸벅 인사하고는 카운터에 놓인 장부에다 크게 적는다. '송곳'. 익숙한 생활 패턴. 손님들이 찾는 물건이 없을 때, 내가 (반드시 해야만) 하는 행동. 송곳의 자리에 다른 단어를 넣어 수십 수백 번씩 사용했던 문장이다. 이젠 자연스럽게 그 문장이 나온다. 마치 유행어처럼 하루에도 몇 번씩.
송곳, 유리병, 철끈, 우비, 빗자루, 석고가루, 인주, 영수증, 마우스패드, USB, 안전가위, 털실, 바늘, 이력서, 돋보기, 과자, 핫팩…. 왜 이렇게 문방구에서 찾는 게 많은 거야?
문방구는 아이들만 오는 데가 아니다문방구를 시작할 때, 내 생각은 이랬다. '아이들을 상대하는 거니까 그래도 괜찮겠지? 어렵진 않겠지?' 착각이었다. 나의 명백한 생각의 실수. '문방구=아이들'이 아니었던 것! 그렇다면 정답은 무엇일까?
찾아오는 손님을 보자. 기본적으로 근처 학교 학생들이 온다. 근처에 초등학교 2개, 중학교 2개, 고등학교 1개가 있다. 문방구 위치에 천혜의 장소 아닌가. 아직 학교를 다니지 않는 아이들(5~7살)도 주기적으로 방문한다. 마치 동네 마실 나오듯. 딱히 살 것도 없으면서 딱히 필요한 것도 없으면서 훅 둘러보고 간다. 더 어린 아이들도 온다. 엄마 손을 잡고 와서 '나 저거 사줘!' 떼쓰는 신공을 발휘, 엄마와 심각한 협상을 하기도 한다.
여기까지가 내가 생각한 시나리오였다. 하지만 내가 미처 생각지 못한 변수가 있었다. 바로 아이의 필요가 아닌, 순전히 '자신'의 필요로 문방구를 찾아오는 손님들이다. 생활용품을 찾는 어머니들, 사무용품을 찾는 아버지들, 볼펜이나 사소한 물건을 찾는 어르신들, 이력서를 찾는 취준생(취업준비생)에 이르기까지...
그렇다! 실로 모든 계층의 사람이 다 오는 것이다.
'문방구=아이들 + α(알파)'이었던 것! 그렇기에 찾는 물건의 스펙트럼도 다양할 수밖에. 공간이 여유로웠던 가게는 손님들이 찾는 물건을 부지런히 갖다놓는 터에 조금씩 좁아지고 있다. 학용품의 종류도 참 많아서 보기 좋게 잘 정리하는 게 매일 숙제다.
문제는 가게가 좁다는 것. 그런데 물건을 매일 들여놓아도 들어갈 공간이 보인다. 6평 가게가 60평처럼 계속 들어간다. 참 신기한 일. 옛날 전래동화에서 본 듯한 요술주머니 같다. 물건이 들어갈 만큼 들어갔어도, 계속 들어갈 공간이 보이고 생기니까 말이다.
때로는 손님이 찾는 물건이 없어 사 왔을 때, 떡하니 그 물건이 빛을 발하며 웃을 때도 있다. "아저씨, 나 여기 있어요!" 그때의 머쓱함이란….
이젠 아까 언급한 물건들 외에도 손님들이 찾을 만한 것들을 미리 구비해 놓고 있다. 유비무환! 문방구의 필수 아이템 '게임기'도 놓았다. 아이들에게 인기만점이다. 가게가 조금씩 자리를 잡아가나 보다. 대표적인 생활용품 상점 다** 까지는 아니더라도 우리 가게도 있을 건 다 있다!
할아버지의 연애 스킬점심을 앞둔 시간. 가게 문을 열고 들어오신 할아버지. '어떤 물건을 찾으실까? 없는 걸 찾진 않으실까' 난 또 긴장모드. 할아버지 왈
"혹시 축하카드 같은 거 있나?" 휴~ 다행. 카드 정도는 당연히 있다. 종류도 다양, 디자인도 다양, 가격도 다양. 친절히 두 손으로 가리키며 "저 쪽에 있어요."
할아버지: (환히 웃으시며) "다행이네! 다른 문방구가 닫아서 여기까지 걸어 왔어."나: (괜시리 나도 기분 좋아 웃으며) "누구한테 편지 쓰시나 봐요?" 할아버지: (약간 부끄러우신 듯) "울 마누라 생일이야. 수십 년 동안 생일 때 편지나 카드를 꼭 써!" 나: (입을 쩍 벌리며) "우와! 대단하세요." 수십 년 동안 써 온 생일 축하카드를 올해도 무사히 쓸 수 있게 된 것을 좋아하시는 듯 할아버지는 연신 웃으신다. 이럴 때 작은 보람을 느낀다.
오매불망 원하던 장난감 로보트를 손에 쥐었을 때 기뻐하는 아이들, 꼭 필요한 생활 용품을 적당한 가격에 샀을 때 만족하는 어머니들, 등교할 때, 쌍테(쌍꺼풀 테이프)를 사는, 외모에 한창 신경 쓰는 여 중고생들.
자신이 원하는 것을 곧바로 살 때, 손님들은 기뻐한다. 그럴 때 나 역시 작은 기쁨을 맛본다. 그런 맛에 장사를 하나 보다.
한 가지 불행(?)한 것. 할아버지의 범상치 않은 연애 스킬을 옆에 있던 아내도 들었다는 사실이다. 할아버지의 말을 듣자마자 아내는 눈이 커지고, 입꼬리가 올라갔다. 아! 듣지 말았어야 했는데... 내년 아내 생일엔 뭉툭한 내 손이 고생 좀 하겠다.
덧붙이는 글 | 제 블로그(blog.naver.com/clearoad)에도 실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