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미디보다 우습고 영화보다 비현실적인 정치가 펼쳐지고 있는 요즘, 과연 문학은 무엇일까 하는 문학의 본질에 대한 의문과 동시에 도대체 이 천박한 정치 현실 속에서 문학이 무엇을 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자괴감이 든다'고 소회를 밝힌 이가 있다. 문계봉(53) 사단법인 한국작가회의 인천지회장을 지난달 29일 만났다.
작가회의 창립 40주년, 그리고...
1972년 10월 17일, 박정희 전 대통령은 초헌법적인 국가긴급권을 발동해 국회를 해산하고 정치활동을 금지하는 동시에 비상계엄령을 선포했다. 이어서 12월 27일 대통령에 취임한 그는 유신헌법을 공포함으로써 장기집권을 시작했다.
1974년 11월, 일부 문학 작가들은 한국작가회의의 전신인 자유실천문인협의회(아래 '자실')를 창립했다. 고은, 신경림, 백낙청, 염무웅, 조태일, 이문구, 박태순, 황석영 등은 유신체제 속에서 신음하는 민족 현실에 문학인이 더 이상 침묵할 수 없음을 선포했다. 같은 해 10월 24일에는 <동아일보> 기자 180여 명이 철야농성을 시작하며 '자유언론실천선언'으로 반독재투쟁에 불을 지폈다.
소설가 공지영은 최근 열린 작가회의 40주년 기념행사서 "1974년 유신독재 아래에서 행동하는 운동조직으로는 민청학련(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과 '자실'이 독보적이었다"고 말했다.
문계봉 지회장은 다음과 같이 당시를 떠올렸다.
"가장 혹독했던 유신시절이었던 그 당시 우리뿐만 아니라 여러 단체들이 생겼죠. 올해는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과 민청학련이 불혹의 나이가 됐어요. 동아투위도 40년이 돼 가고요. 구속·수배 등 억압도 불사하고 가장 실천적으로 당대의 부조리와 싸우는 일선에서 선배 문인들이 열심히 사셨어요. 문학은 암울한 시절일수록 시대의 등불 역할을 해야 한다고 온몸으로 말한 선배들이죠. 과연 한 편의 시와 소설이 어떤 역할을 할까 회의가 들 때도 있지만, 적어도 한 사람의 노래가 만 사람을 울리는 감흥력이라는 게 문학에는 있다고 확신해요."세월호 참사를 애도하는 문인 754명이 지난 6월 2일, '우리는 이런 권력에 국가 개조를 맡기지 않았다'는 주제로 시국선언을 했다. 미혹되지 않을 40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여전히 문인들은 '코미디보다 우습고 영화보다 비현실적인' 세상과 싸우고 있다.
'작품 돌려막기' 수법은 이제 그만"문학의 기본 임무는 언제 어디에서든 반민주, 부조리, 부자유, 비인간화 등이 잔존하는 시대에 가장 정직하게 진실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작가들은 항상 그것들과의 싸움을 숙명으로 안고 살아야하는 거죠. 자족적 예술이면 결코 안 됩니다. 한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아픔을 위로해주고 나갈 세상을 예술가들의 상상으로 제시해야하는 게 아닌가요? 그래서 예술은 당연히 진보적이죠."문학에 대한 문 지회장의 철학은 단호했다. 그러나 현실은 그의 생각과 좀 달랐다. 서점 문학 코너에는 소녀 감성에 호소하는 작품들이 베스트셀러에 상당히 포진돼있다. 그 작품을 생산한 작가들도 나름 고민해 썼겠지만 현실의 문제를 은폐하는 데 본인의 의도와는 달리 일조하고 있다고 문 지회장은 덧붙였다.
"인생을 사는 데 사랑만 있는 건 아니잖아요. 그런데 시집 몇 권의 내용이 하나 같아요. 전 이것을 시 돌려막기, 소재 돌려막기, 작품 돌려막기라고 표현하고 싶어요."그렇다면 사랑을 소재로 한 작품은 지극히 사적인 영역일까?
"우리 작가회의 작가들도 사랑이야기를 합니다. 그러나 접근하는 방법이 추상적이고 동떨어진 사랑이 아니라, 동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과 삶의 현장에서 부대끼고 슬플 때 같이 울어주고 공감하는 그런 사랑을 얘기하죠. 절망이 깊어 앞이 보이지 않을 때 건강한 상상으로 미래를 같이 꿈꿔보는 거죠."날나리 청년, 문학을 만나다
인천에서 태어나 제물포고등학교를 졸업한 문 지회장은 고등학교 때까지는 친구들과 어울려 학교 밖 생활을 즐긴 이른바 '노는 학생'이었다.
"우리 학교가 참 아름다워요. 자유공원 근처에 있어서 학교 담만 넘으면 바다가 보이고 연안부두와 월미도가 인근에 있잖아요. 앞에는 부채꼴 모양으로 인일,인성,인천여고가 있고요. 이국적인 차이나타운이 있고, 여러 가지로 사춘기 남학생들의 예민한 감수성을 자극할만한 요소가 많은 학교입니다. 학교 밖을 많이 돌아다니며 놀았지만, 책을 많이 읽었어요. 집에 전집으로 된 책들이 많아서 초등학교 때부터 많이 읽었죠. 도서관에서 책을 읽고 있으면 같이 어울리던 놈들한테 안 놀고 책 읽는다고 질타를 받기도 했죠."(웃음)학교 밖 세상에 호기심이 많았던 문학청년의 내면은 감수성으로 충만했다. 김동인의 <감자>를 읽고 쓴 감상문이 학교 방송수업 교재로 활용될 정도로 실력을 인정받기도 했다.
1982년에 연세대에 입학한 그는 연세문학회 활동으로 본격적인 문학 공부를 시작했다. 기형도, 성석제, 나희덕 등의 선후배들과 합평회를 하면서 평생 글을 쓸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시대의 아픔을 외면할 수 없었던 그는 문학 서적보다는 사회과학 서적을 주로 탐독할 수밖에 없었고, 작가의 길이 아닌 운동가의 삶을 선택했다.
그가 활동한 인천민중연합 사무실 근처에 인천노동자문학회 사무실이 있었다. 엄혹했던 시절 기록을 남기면 탄압의 빌미가 될 수 있던 때, 담뱃갑 껍데기에 빼곡히 쓰다가 찢어버리기 일수였던 그 때, 창작 욕망을 한순간도 잊을 수 없었던 문 지회장은 인천노동자문학회 사람들이 부럽기도 했다. 그러다 1995년 '실천문학'을 통해 시인으로 등단했다. 하지만 여전히 사회운동에 관련한 일을 더 많이 했다. 1999년에 작가회의 인천지회가 만들어지고 창립멤버로 활동하다가 작년 말에서야 지회장을 맡았다.
시가 나를 불렀다김용택 시인은 2003년 자신이 좋아하는 시인들의 작품들로 '시가 내게로 왔다'는 제목의 시집을 묶었다. 문계봉 시인은 '2008년께 시가 나를 불렀다'고 했다.
"어느 날 문득, 시를 안 쓸 수 없다는 생각을 했어요. '시를 다시 써야지'라고 준비하기보다 그냥 시가 써지기 시작하면서 잃어버렸던 정서들이 새록새록 되살아나더라고요."5년 전, 다른 블로그를 방문하기 위해 본인의 블로그를 만들었다. 사용하다 보니 원체 표현의 욕구가 강해 부지불식간에 블로그가 채워지기 시작했다. 시를 다시 쓰고 방문객들도 많아졌다. 좋은 평이 늘어나면서 책임감도 생겨 다양한 분야의 글 2000편 정도를 썼다.
"내가 시를 꽤 괜찮게 쓰더라고요. 고맙게 시가 다시 찾아와줬구나,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등단은 했으니까 이제는 시인의 삶을 살아야겠다는, 운명 같은 생각을 했습니다."인천 작가들의 베이스캠프를 만들다작가회의 인천지회는 1999년 12월에 '작가들'을 창간했다. 1년에 두 번씩 내다가 2004년에는 계간지로 등록했다. 지난달 11일에는 동구 배다리에 '작가의 집'이라는 공간을 열었고, '작가들'을 작가회의 인천지회 출판부에서 발행하기 시작했다.
불과 몇 년 전에 내홍을 겪으며 작가회의 본부에서 사고 지회로 처리됐던 인천지회가 자체 출판사와 '작가의 집'을 만들고 나서 본부 회의를 갔더니 '가장 안정된 지도력'이라고 칭찬 해 주더란다.
"저는 권력의 양이라는 게 피라미드 구조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위로 올라갈수록 양이 적어지고 아래를 차지하는 회원들의 권력이 많아야죠. 회원들의 모임을 활성화하기 위해 임원들이 도와주고, 회원들의 목소리를 듣기 위해 공간도 얻고, 출판사도 만들었어요. 남구와 업무협약을 맺어 쓰고 있는 사무실이 주안에 있는데 점잖은 도서관 건물이다 보니, 우리들만의 편한 공간이 필요했습니다."인천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배다리에 공간을 마련하기 위해 회원들은 꾸준히 기금을 마련했다.
"인천지회는 발전 가능성이 많습니다. 20~30대 신입회원들이 많이 들어와 분위기가 활성화됐어요. 좀 아쉬운 점은 대선배들과의 관계가 소원한 경향이 있다는 것이죠. 조직의 허리를 받쳐주는 역할이 없다보니 선후배 간 소통이 약간은 부족한데 그 부분을 채울 예정입니다. 또한 창립 정신을 공감하면서도 지역의 여러 사안에 적극적으로 결합하지 못했는데 앞으로는 그 부분도 열심히 할 생각입니다."개인적인 계획은 등단 20주년을 맞아 첫 시집을 내는 것이다. 다른 장르의 작가와 함께 시와 그림과 사진이 있는 책 발간도 계획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