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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계절이 아름다운 연세대 매지리캠퍼스로 가는 길. 이즈음은 황홀한 노란 은행잎이 떨어져 유감이다.
 사계절이 아름다운 연세대 매지리캠퍼스로 가는 길. 이즈음은 황홀한 노란 은행잎이 떨어져 유감이다.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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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지함으로 온 메일 한 통


<제목 : 안녕하세요. 선생님, 저는 원주 연세대학교 학생입니다>

보낸 이 : 김가영
보낸 날짜 : 2014.11. 04
받는 이 : 박도

안녕하세요. 선생님, 저는 최근 현대사 수업 과제로 역사 기행문을 써야 해서 서울 경교장에 다녀왔던 학생입니다. 변명이지만 공대생이라 역사에 대해 아는 것이 너무 없었는데, 최근 수업을 통해 많이 배우고 있습니다. 경교장에 갔을 때 뭔가 모르게 몰려오는 뭉클함과 서러움에 마음이 많이 짠하더군요.... 기행문을 쓰기 위해 자료 조사를 하던 중 선생님께서 쓰신 <백범 김구 암살자와 추적자> 라는 책을 찾게 되었고, 앉은 자리에서 다 읽게 되었습니다.

자신의 생각을 실천으로 옮겨 직접 문서를 찾아보시고 정리해 집필까지 하신 선생님이 정말 대단하시다는 생각이 들어서, 또 책 마지막 '원주 치악산 기슭'이라는 글을 보고 신기하기도 해서 이렇게 쪽지를 보냅니다. 제가 책을 정말 잘 안 읽는데(^_^;) 정말 재미있게 잘 읽었습니다. 앞으로 더 공부 열심히 해서 후손에게 부끄럽지 않은, 청렴하고 똑똑한 사람이 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며칠 전 내 쪽지함에 온 메일이다. '고객이 왕'인 이 시대에 아무쪼록 내 책을 읽고, 메일을 보내준다는 것은 대단한 성의로 고맙기 그지없었다. 몇 차례 메일과 문자가 오간 끝에 지난 10일 오후 1시 연세대 매지리 캠퍼스 학생복지관 앞에서 학생과 만나기로 했다.

연세대 매지리 캠퍼스는 내가 원주로 이사 온 이후 단골 산책로 가운데 하나다. 내가 사는 동네에서 그곳까지는 시내버스 교통도 매우 좋아 몇 해 전부터 이따금 찾는 곳이다. 이곳은 사시사철 경치가 좋은 데다가 잠시 쉬어갈 수 있는 의자들이 여기저기 많다. 게다가 커피 값도 매우 싸다. 젊음이 넘쳐나는 그곳에 가면 나는 문득 40여 년 전 대학 시절로 돌아간 기분이다. (관련기사 : 아빠 잘하셨어요, 고마워요.)

내가 그곳을 특히 좋아하는 이유는 젊은 학생들을 바라보는 즐거움 때문이다. 대학 시절 이따금 교문 앞 느티나무 그늘 돌 벤치에 머리가 허옇게 센 한 할아버지가 두루마기에 흰 고무신을 신고 앉아 있는 모습을 자주 보았는데, 그 어른이 바로 함석헌 선생이셨다.

그때는 그분이 왜 대학 캠퍼스를 찾아왔을까 의아했는데, 이즈음 나는 그때의 함석헌 선생님이 이해된다. 사실 머리가 굳어진 기성세대들에게 아무리 '민족'이니 '독립'이니 얘기해 봐야 그들에게는 '귀신 씨나락 까먹는 얘기'일 것이다.

조선혁명군 총사령관 양세봉 장군의 전기에 보면, 소년 양세봉이 안중근 의사가 하얼빈 역에서 침략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했다는 얘기를 듣고, 장차 당신도 안중근 의사와 같은 인물이 되고자 맹세했다고 한다. 그래서 그는 후일 대일 항전의 선봉으로 조선혁명군 총사령관이 되었다. 

내가 시간에 맞춰 약속 장소에 가자 같은 과제물 팀인 세 학생이 먼저 알아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들은 김가영(의료공학, 4), 황승준(행정학과, 2), 박경훈(경영학과, 2) 등이었다. 그들은 내일 제출한 리포트를 쓰고자 나에게 이런저런 질문을 던졌다. 그 가운데 일부만 소개한다.

 연세대 학생 독자들(매지리 캠퍼스 복지회관 앞에서. 오른쪽부터 김가영, 황승준, 박경훈 학생)
 연세대 학생 독자들(매지리 캠퍼스 복지회관 앞에서. 오른쪽부터 김가영, 황승준, 박경훈 학생)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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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를 배우는 까닭

- 김가영 : 왜 근현대사에 관한 책을 쓰십니까?
"젊은 세대들이 우리의 역사, 특히 근현대사를 너무 모르기에 쓰게 되었지요. 사실은 나는 고교 교사였습니다. 어느 날, 대학 수시 입시에 응시한 한 학생이 구두 시험에서 안중근 의사와 윤봉길 의사를 혼동해 답변했다는 얘기를 듣고, 그를 꾸중하다가 그 책임은 나에게도 있다는 자성에 역사 공부를 하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기존의 역사책은 한자말이 너무 많아 젊은 세대들이 접근하기에는 어려울 것 같아 국어 선생인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찾은 겁니다. 저는 역사를 쓰기보다 선배 역사 학자들이 써놓은 것을 가능한 쉬운 글로 확대 재생산합니다."

- 황승준 : 사실 도서관에서 <백범 김구 암살자와 추적자>를 대출할 때는 김구 선생이 안두희의 흉탄을 맞은 부분만 찾아 읽으려고 했는데, 막상 잡고 보니 그 자리에서 끝까지 다 읽었습니다. 저자분이 이렇게 나이 드신 분인지 몰랐습니다. (일동 웃음) 정말 요즘 세태는 SNS의 발달 탓인지 책을 읽지 않는 것 같아요.

"흔히들 요즈음은 인문이 죽어가는 시대라고 합니다. 사실 이런 세태 때문에 오늘의 세월호 사태가 일어난 것입니다. 이 시대의 대부분 사람은 '역사 의식'이라는 게 거의 없습니다. 백범 선생을 시해한 안두희도 역사 의식이 전혀 없었기에 그런 일을 저질러 그 부끄러운 이름을 후세에 남긴 것입니다. 세월호 선장도 그 순간만 모면하자는 기회적주의적 발상으로 승객도, 배를 버리고 도망간 겁니다.

사실 근현대사를 읽어보면 우리 정치지도자 가운데도 세월호 선장 같은 사람이 많습니다. 나라와 민족을 반역하거나 동지를 배신해도 본인 뿐 아니라 그 후손조차 잘 사는 것을 보고, 정의와양심의 대의를 위해 자기를 희생하겠다는 생각보다 위기 때 우선 도망을 가자는 심사가 많을 것입니다.

정말 근현대사를 공부하면 분통 터지는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일제강점기에 만주에서 '간도 특설대'라는 독립군을 토벌하던 아주 고약한 특수부대가 있었습니다. 거기 출신의 한 군인을 일부 언론들이 몇 년째 번갈아 연재를 하며 '영웅'으로 받들고 있는 게 현실입니다. 그럼 '간도 특설대'에 죽어간 우리 독립군은 뭘까요? 이런 사회 풍토에 정의와 양심, 도덕이 살아나겠습니까? (관련 기사 : 백선엽 '전쟁영웅' 만들기 '무리수'... 볼썽사납다)

자기 적성에 맞는 직업을 찾아라

 네 사람이 연세대 독수리상에서 인증 샷을 남기다.
 네 사람이 연세대 독수리상에서 인증 샷을 남기다.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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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학생 표정이 갑자기 침울한 듯 보였다. 그래서 내가 역사 문제가 아닌 다른 이야기를 하자고 했다.

- 박경훈 : 인생 선배로서 저희에게 참고될 말씀을 부탁합니다.

"요즘 젊은이들이 취업난으로 고생 많은 걸로 압니다. '좋은 직장과 좋은 자리'에 연연하지 마십시오. 내 경험에 비추어보면 좋은 직장, 좋은 자리일수록 경쟁이 심하고, 또 그런 직장은 입사 후에도 피곤합니다. 그리고 대한민국에서 좋은 자리란 뭡니까? 그곳은 검은돈의 수입이 많은 곳 아닙니까? 좋은 자리에서 검은돈 많이 챙긴 사람들은 대부분 제 명대로 살지 못하고 비극적으로 생을 마쳤지요.

솔직히 나도 시골중학교에서 교직을 시작해 세 차례나 좋은 학교라는 곳으로 옮겼는데, 지금 생각해 보니 부끄러운 점도, 후회스러운 점도 많네요. 내가 몇 차례 미국에 가 보니 한국에서 이름 있는 대학을 나온 동포들이 그곳에서 당당하게 세탁소를 하거나, 식당에서 생선회를 뜨거나, 봉제공장에서 재봉틀을 돌리더군요.

왜 우리나라에서는 그런 일을 못합니까? 미국에서는 그런 힘든 일을 이겨내는 사람만이 성공하더군요. 우리나라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들은 아무쪼록 자기 적성에 맞는 직업을 찾아 누가 뭐라고 하든 그것을 평생 직업으로 삼고 앞만 보고 열심히 사십시오. 그러면 늘그막에는 명장으로 남는 후회 없는 인생이 될 것입니다."

우리 네 사람은 대화 장소와 가까운 연세대 상징 독수리상을 배경으로 '인증샷'을 남긴 뒤 헤어졌다. 김가영 여학생이 나에게 과자 봉지를 건넸다.

"선생님, 내일은 빼빼로 날이에요. 사모님과 같이 드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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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 은퇴 후 강원 산골에서 지내고 있다. 저서; 소설<허형식 장군><전쟁과 사랑> <용서>. 산문 <항일유적답사기><영웅 안중근>, <대한민국 대통령> 사진집<지울 수 없는 이미지><한국전쟁 Ⅱ><일제강점기><개화기와 대한제국><미군정3년사>, 어린이도서 <대한민국의 시작은 임시정부입니다><김구, 독립운동의 끝은 통일><청년 안중근>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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