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택배입니다." 젊은 아주머니 목소리가 문밖에서 울렸다. 자그마한 상자의 택배가 아내 앞으로 왔다. 월요일과 화요일만 되면 아내가 주말에 고시 공부하듯 밤늦도록 눈에 불을 켜고 주문한 TV 홈쇼핑, 인터넷 쇼핑한 물건들이 배달된다. 주중에 사지 못해 한이 서렸나 싶을 정도로 종류도 다양한 품목들이다.
금세 거실은 물건과 상자들로 뒤엉킨다. 웬 화장품은 그렇게 종류가 많은지... 아들 녀석, 옷은 계절 별로 필요하단다. 나는 어릴 적에 옷 하나 입고 살았다 하면, "지금이 옛날이냐"하며 눈을 흘긴다.
이제는 오전에 휴대폰이 울리면 당연히 택배이거니 하며 콜센터 직원의 부드러운 하이톤처럼 자연스럽게 답한다.
"경비실 맡겨주세요."전화가 오면 끝자리 네 자리가 눈에 익다. 2~3일에 한두 번은 듣는 택배 아줌마 목소리라 이젠 이웃처럼 편하다. 행여 아파트 주차장에서 뵈면 왠지 모르는 친근감이 든다. 역시 이 시대는 소비의 시대인가 보다. 소비해야 세상이 연결된다. 무서운 '웹'의 시대, '클릭'의 시대.
여지없이 여러 개의 택배를 받으면, 문득 카드 결제일을 한번 떠올려 보기도 하는데, 얼른 그 생각을 지운다. 오래 생각하면 순간 군대 영장 받은 듯이 답답해지니 말이다. 결제일 날에만 집중한다. 나름 한 달에 하루를 제외하고 나머지를 행복하게 살아간다는 현대인의 처세가 생긴 것이다.
TV 채널을 돌리다 아내가 홈쇼핑에 집중하면 나는 일어나 내 방으로 간다. 그녀의 쇼핑이 시작된 것이다. 최소 30분은 탐색할 것이고, 인터넷을 뒤지며 비교 검색하고, 때로는 일정한 주문금액을 맞춰야 할인된다며 필요한 거 없냐 재촉한다. 주문이 완료되면 정말 싸게 샀다고 으쓱하면서 근래 보기 드문 아름다운 미소까지 지어 보인다.
택배가 배달됐다, 그런데...
오늘도 택배가 배달됐다. 자그마한 상자였는데 아내 이름이었다. 사인 해주고 아내에게 주었더니 전광석화처럼 빠른 손놀림으로 상자에 감긴 테이프를 해체한다. 팬티였다. 그것도 6개나 됐다. 며칠 전인가 지나가다 팬티가 필요하다 혼잣말 한 적이 있었는데, 귀신같이 듣고 바로 쇼핑으로 연결한 것이다. 스포티한 디자인이 눈에 익은 것을 보니 여러 번 홈쇼핑 채널을 지나치다 본 것이었다. 중요한 점은 모두 사이즈 '100'으로 구입했다는 것이다.
보통 105 정도로 넉넉하게 허리가 조이지 않는 것을 선호하는데, 아내는 당연히 100 정도로 입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요즘 누가 105를 입느냐고, 100으로 입으라 했다. 복부에 지방을 차곡차곡 저장한 체질이라 걱정이 앞섰다. 아내가 "아마도 선조가 추운 극지방에 계셨었나 보네. 족보 찾아보셔"라고 한다. 그러면, 나는 지구 온난화가 지속돼 빙하기가 다시 오면 나만 살아남을 거라 큰소리친다. 한마디 덧붙인다.
"나는 미래종족이야." "나중에 인류를 구원할 몸을 가지고 있단 말이야."팬티를 곧바로 입었을 때는 불편을 몰랐다. 그런데, 오후가 되면서 머리도 좀 아프고 컨디션이 안 좋았다. 처음에는 몸살기가 있나 싶어 두통약을 먹어 봤는데, 영 나아지지 않았다. 저녁에 샤워를 하고 나서 아픈 것이 나아지는 것을 느꼈다. 이윽고 100 사이즈 팬티가 배를 조여서 발생한 해프닝이란 것을 알았다. 그러나 어찌하랴. 6장이나 구입해서 1년은 입어야 하는데... 아내는 별일 아니라는 듯이 운동해서 입으란다.
예전에 입었던 팬티를 몰래 다시 입고 며칠을 지낸 후, 갈아입을 팬티가 없어, 구입한 팬티를 다시 입었다. 한참 후 며칠 전 상황이 다시 생각나서 고민하게 되었다.
'유레카!' 번개처럼 내리치는 한 줄기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팬티 앞뒷면 밴드를 가위로 네 군데 자르는 것이다. 조금은 허리의 여유가 생겼다. 그 사이로 다시 네 군데를 자르니 비로소 배가 편안해졌다. 합해서 허리와 배를 감싸고 있는 밴드 여덟 군데를 가위로 자르니 몸이 자유로워졌다.
105의 몸매로 100 사이즈로 맞추려 하니 몸이 고생한다. 이놈의 세상. TV에서는 화면에 최적화된 몸매의 훈남들이 등장하고 그에 따라가려니 뱁새가 황새 따라가는 격이다. 남자가 봐도 멋진 몸들이 TV를 종횡무진 한다. 요리조리 채널을 돌려봐도 건강하고 멋진 녀석들이 등장한다.
늦은 밤 치맥에 한잔하며 이 세태를 한탄하지만, 잠자리에 들며 야식 먹은 것을 다시 후회한다. 내일 일어나면 오전에 러닝머신 2시간은 해야겠다. 아직도 튼튼한 100짜리 팬티가 장롱 안에 차곡히 개어져 있으니까...
한 달 후, 아내가 운동화 만드는 한 메이커 브랜드에서 신축성 좋은 팬티가 나왔다며 입어보라 건네주었다. 사이즈 100인 팬티였다. 역시 약간 답답했지만 잘 맞는다고 말해주었다. 오늘 밤에 아내 몰래 가위질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