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태어나기 전부터 선택을 경험한다. 일부이기는 하지만 태아의 성별이 부모가 원하는 것이 아닐 때 태아는 세상과 만나지 못한다. 성급한 부모들은 태교라며 음악과 독서에 열중한다. 태교가 실제로 태아에게 영향을 미치는 것이라면 아이들은 뱃속에서부터 자기의 의지와 관계없이 교육에 좋은 음악이라며 선택을 강요당하는 것이다. 돌잔치때 하는 돌잡이를 시작으로 선택은 인생의 매 순간 마다 우리 삶에 영향을 미친다. 커피의 종류와 오늘 입고 나갈 옷을 선택하는 데도 많은 시간이 소비된다. 죽음 뒤에는 후손들이 관의 종류와 가격을 선택한다.
그렇다면 선택은 주체적 인간이 누릴 수 있는 축복일까? 유명 철학자인 슬라보예 지젝의 첫 아내로도 잘 알려진 레나타 살레츨은 <선택이라는 이데올로기>(후마니타스, 2014년)에서 선택은 행복이 아니라고 말한다. 선택의 자유는 불안, 죄책감, 부족감을 낳는다. 선택을 통해 '너만의 모습을 찾는' 일은 사람들을 불안하게 만들기까지 한다. 아름다움을 선택하기 위하여 성형 중독에 걸린 사람들의 의식에 자리 잡고 있는 불안감이 좋은 예일 것이다. 살레츨이 말하는 선택은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후기 자본주의가 강요하는 이데올로기다. 이런 이데올로기는 사회의 변화를 가로막는다.
자기 계발서가 주장하는 것처럼 결코 사람은 자신의 삶의 주인공이 될 수 없다. 내가 하는 선택 같지만 실제로는 사회가 교묘하게 우리를 그렇게 하도록 유도하는 것이다. 결국 선택으로 인한 불안은 사회의 구조적 모순을 자기 잘못으로 돌리게 만든다. 자신을 자기 삶의 전적인 주인으로 착각하면서 오히려 사회를 변화시키는 선택들에 대해서는 외면하게 된다는 것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기에게 선택권이 있다고 믿는 것은 착각이다. 물론 레나타 살레츨이 선택을 완전히 부정하지는 않는다. 선택을 개인적 변화에 제한시키지 말고 사회적 변화로까지 확장시킬 때 진정한 변화가 가능해진다고 본다.
한국 사회와 반기문 UN 사무총장후기 자본주의 또는 신자유주의의 생생한 각축장인 한국사회는 선택의 무한한 자유로 인해 오히려 선택이 어려워지는 사회다. 젊은 연예인들의 얼굴은 모두 엇비슷하게 성형되어 아주 유명한 연예인이 아니고서는 얼굴을 구분 못한다. 아프리카 초원에서 스프링 벅 한마리가 뛰면 모두 따라 달려가다가 파멸을 맞는다는 유명한 이야기처럼 한국 사회에서 선택은 유행이라는 이데올로기에 의해 강제된다.
집단 유행에 의해 강요된 선택이면서 개인의 선택이라고 착각하는 거짓 주체들은 한국 사회 변화에 대해서도 유행을 따른다. 개인의 욕망에 따른 선택만 하며 살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기라도 하듯이 한국 사회의 정치적 관심은 서구에 비해 월등히 높다. 사회적 변화를 위한 조건을 갖추고 있는 셈이지만 실제로 한국 사회는 변화하지 않는다. 저자도 마지막 결론의 제목을 '사회는 왜 변하지 않을까'로 잡았다.
최근 각종 여론조사에서 반기문 UN 사무총장이 차기 대선후보로 선두에 나섰다. 여야할 것 없이 골고루 지지를 받는다는 점도 특이하다. 반기문 총장을 선택하는 데는 어떤 이데올로기가 작동할까? 안철수를 선택했을 때처럼 온화한 리더십을 원하는 대중들의 마음의 반영이다. 다양한 국제 현안을 조정하는 직무와 연관된 조정자의 이미지도 한 몫 한다. 독립적인 권력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권력지향의 한국 사회에서 사무총장직은 '세계의 대통령'이라는 권력 개념으로 착각되어 온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한국의 유권자들이 실제로 원하는 것은 다른 데 있다. 마지막 선택의 순간에 갈등의 중재자를 찾지 않고 갈등의 제압자를 찾는다는 점을 숨기고 살아간다. 이 시대를 살아가면서 제압자를 찾는 일이 부끄러운 줄 알기 때문에 여론 형성 과정에서는 조정자를 찾는 척하고 밀폐된 투표실에서는 제압자에게 투표한다.
레너드 살레츨은 개인이 스스로 선택할 수 있다고 믿는 위험성을 아래와 같이 말한다.
선택이 더는 개인의 특혜로 간주되어서는 안 된다. 오늘날 사람들의 선택권은 실제로는 사회적 분할에 따라 심각하게 제한되어 있고 노조 조직화, 보건과 안전, 환경과 같은 안건들은 점점 더 우리의 선택지에서 멀어지고 있는데, 선택 이데올로기는 우리의 눈을 가려 이것을 보지 못하게 한다. 바로 이것이 선택 이데올로기가 지금껏 승승장구해 온 원인이다. 그 결과 사회적 차원에서 우리는 우리가 알고 있는 권력관계들을 변화시킬 선택의 가능성을 잃어버리고 있다. 당연히 선택 이데올로기는, 지금 이 순간을 살며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라고 부추기는 뉴에이지 이데올로기와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211쪽)이처럼 대중들은 진짜 중요한 것을 간과한다. 갈등의 중재자 역할을 할 온화한 이미지를 찾는 이유는 우리 사회가 갈등이 많다는 것을 전제하기 때문인데 갈등의 원인에 대해서는 깊게 파고 들려 하지 않는다. 한국의 노동운동은 강성이며, 노동운동뿐 아니라 다른 사안에서도 절차를 따르기 보다는 이슈를 거리고 직접 들고 나오는 방식을 보면 한국 사회의 갈등은 분명 심각해 보인다. 하지만 강성 노동 운동 속에서도 비정규직은 양산되고, 거리로 나온 이슈들도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 기득권자들은 영리해서 결코 선택지를 그들에게 양보하지 않는다. 때문에 이쪽 저쪽 말을 다 듣고 갈등을 중재하는 온화한 리더십을 궁극에 가서는 선택하지 않는다.
갈등의 원인은 분석하지 않은 채 현상만을 보는 사람들은 중재자가 아니라 제압자를 찾고 박정희 전 대통령의 제압 이미지를 빼어 닮은 그의 딸을 선택한다. 그러므로 반기문 총장은 차기 대선 정국에서 페이스메이커로서의 역할은 할지 몰라도 선택되지 않을 것이다. 사무총장으로서 북미문제도 해결하지 못한 그가 차기 대통령 후보군의 상위에 랭크되어 있다는 현실 자체가 한국 사회의 위선적 선택을 가감 없이 보여준다.
기득권과 함께 가는 보수교회도 우리가 조롱하는 것만큼 그렇게 바보가 아니다. 갈등 제압형 리더십의 출현에 큰 기여를 해온 교회는 반 사무총장의 동성애 인권 발언, 세계 교회협의회 축사 건을 두고 흠집내기를 벌써 시작했다. 온화한 갈등 중재자가 아니라 갈등의 한 복판에 있는 사람임을 부각시키려는 의도이다. 대중들은 여론 형성기에는 중재자형을 찾으면서 그들의 정치 의식을 보여주는 시늉이라도 하는 반면 교회는 노골적으로 드러낸다.
그러면 우리는 선택이라는 이데올로기로부터 벗어나서 어떤 선택을 할 수 있을까? 저자는 선택 이데올로기에 대항하는 투쟁을 통해 오히려 선택을 지배 이데올로기를 전복하는 방식으로 활용하자고 제안하면서 런던 젊은이들이 무가지들에 대항하는 풀뿌리 운동을 소개한다.
버스나 지하철을 타는 사람들의 손에 쥐어지는 무가지들은 선정적인 폭로 기사와 유명인의 취향과 업적을 다른 기사들로 도배되어 있다. 이런 무가지에 반대하는 한 무리는 '무엇을 읽을지 선택하십시오'라는 구호를 내걸고 사람들에게 헌 책을 나누 주기 시작했다. 그들은 이런 활동을 통해서 무가지로 사람들의 마음이 오염되는 일이 사라지기를 바랐다. (211~212쪽)자본주의라는 거대 프레임에 갇힌 '선택'을 작은 장으로 끌어내어 그들의 기획에 말려들지 않는 방법인 것이다.
한국 교회의 대부분은 정치적 선택을 비롯한 여러 선택에서 후기 자본주의의 영향을 받은 선택 이데올로기의 편에 서왔다. 하느님은 자본주의자나 갈등 제압자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교회는 충실한 보수 이데올로기의 수호자로 자처해 왔다. 기독교인들이 이러한 지배 이데올로기를 극복하는 방법은 성서의 세계관에 주목하면서 그 세계관을 모방하는 일이다. 어차피 주체적 선택을 할 수 없도록 기획된 사회에 대항하려면 과감하게 주체를 유보하고 르네 지라르가 말한 대로 예수를 모방하는 것도 그들의 법칙에 말려들지 않는 방법이다.
살레츨은 정신분석학자 자크 라깡의 개념을 빌려 응시(Gaze)와 시선(Eyes)을 구분한다. 응시는 대타자의 시선으로 주체를 보는 것을 말하는데 기독교적으로 말하자면 하느님의 시각으로 자신을 바라보아야 한다는 말이다. 시선이란 타인의 시선으로 자신을 보는 일인데 시선을 극복하고 응시를 생각하라고 저자는 말한다. 그녀가 기독교적인 의미에서 이런 말을 하지는 않았지만 매순간 선택에서 초월자의 응시를 생각하면 우리의 선택이 비로소 세속의 이데올로기로부터 자유로워 져서 사회의 변화를 위한 선택으로 확장된다.
덧붙이는 글 | 김기대 / 미주 지역 한인 기독교 매체 <뉴스 M>의 편집장이며 로스앤젤레스 평화의 교회 목사로 일하고 있다.